제2장 조선(朝鮮) 선교(宣敎)의 시작

천주교(天主敎) 선교사들과는 달리 개신교(改新敎) 선교사들은 조선 정부의 정식 비자(Visa)를 받고 입국하였다. 아직 입국이 허락되지 않은 천주교 선교사들은 상복(喪服)을 입고 갓을 쓰고 자신의 몸과 얼굴을 가리고 포교활동을 하였지만, 개신교 선교사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다.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3년 전인 1882년, 이미 조선과 미국 사이에 「한미우호수호조약」이 체결되었었기 때문이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구미 각국과 체결한 조약 가운데 가장 첫 번째 조약이었다. 물론 1876년 일본의 무력시위에 의해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기는 하였다. 이제 조선에서 쇄국정책(鎖國政策)은 사라진 것이다.

이 한미우호수호조약에 근거하여 조선과 미국, 양국은 국교를 정상화하였고 대사급의 관리들을 교환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883년 4월 10일 초대 주한 공사로 푸트(Lucius H. Foot)가 서울에 오게 되었고, 정동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조선의 국력은 너무 빈약하여 공사관을 설치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보빙사절단(報聘使節團)1)이란 이름 아래 사절단을 파견하여 미국의 성의에 보답하였다.

보빙사절단
▲보빙사절단 일행.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홍영식, 세 번째가 민영익
이 사절단의 전권대사(全權大使)로 척족세도의 거물인 민영익이 임명되고, 부사로는 홍영식, 그리고 부원으로는 서광범, 유길준 등 개화당의 청년정치인들이 선정되었다. 이 일행은 1883년 7월에 미국의 후트 공사가 타고 온 군함 모노카시(Monocacy)호를 타고 방미 길에 올랐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일행은 기차로 로키산맥을 넘어 미 대륙을 횡단하여 9월 12일 중동부의 중심지인 시카고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당시 21대 대통령 아서(Chester A. Arthur)를 접견하기 위하여 워싱턴DC로 향하게 되었다.

7월 16일 인천에서 출발한 보빙사 일행은 일본 나가사키와 요코하마를 거쳐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거기서 시카고와 워싱턴을 거쳐 뉴욕에 이르는 긴 여정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한복과 갓을 쓴 모습으로 미국의 주요 도시를 돌며 철도회사, 군사시설, 우체국 등을 방문하였고, 새로운 문물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9월 18일 뉴욕에서 아서 대통령을 만나고 고종의 국서(國書)도 전달하는데, 그때 사절단이 아서 대통령 앞에 납작 엎드려 큰절을 함으로써 상대방을 어리둥절하게 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국 언론은 바다 건너 낯선 작은 나라에서 온, 독특한 옷차림을 한 외교사절단의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보빙사절단
▲1883년 9월 뉴욕에 도착한 보빙사절단이 아서 대통령에게 큰절을 하는 모습. 미국 언론은 이들의 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보빙사사절단이 미국 시찰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들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미국에서 얻은 새로운 문물(文物)의 샘플을 200여 개의 궤짝에 나누어 싣고 왔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단순히 서양의 발달한 과학기술 산물(産物)만이 아니었다. 조선을 개화하여 미국처럼 부강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벅찬 포부도 안고 돌아온 것이다. 보빙사절단으로 미국을 다녀온 뒤, 홍영식은 눈이 부신 듯한 광명 속에 갔다 온 것 같다고 토로할 만큼 받은 충격이 컸다. 그렇기에 고종을 열심히 설득해 개화의 길로 치달았다. 보빙사절로 미국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민영익은 미국에 다녀온 소감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나는 어둠 속에서 태어나서 밝은 빛을 보고 이제 다시 어둠 속으로 돌아왔다. 나는 지금 어찌할 것인가를 알 수 없지만 곧 알게 되기를 바란다.’ 같은 단원이었던 홍영식은 ‘그곳은 너무나도 찬란하여 나는 어리둥절하였다’고 하였다.”2)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기독교를 금한 당시 조선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쉽게 입국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이런 것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인들이 조선에서 선교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민영익 일행이 미국을 다녀온 뒤 개화 정치의 산물로 내놓은 첫 작품은 바로 우편 사업의 시작이었다. 개화 정치의 첫발인 우정총국(郵政總局)이 설치된 것이다. 이들은 우체국(郵遞局)을 세워 우편이라는 새로운 통신방식을 실시함으로써 개화의 첫 테이프를 끊고자 했다. 1884년 4월 22일 고종은 우정총국을 설치하라는 전교(傳敎)를 내리고, 병조참판 홍영식을 초대 총판(總辦)으로 임명하였다. 조선은 한성순보(漢城旬報)3)에 고종의 전교를 게재하여 우정총국의 설치를 널리 알리는 한편, 외국 공사관에 그 사실을 통보했다.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총국이 출발하게 되었다. <계속>

[미주]
1)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인 1883년 5월 미국은 우리나라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초대 공사로 푸트를 파견하였다. 고종은 이에 대한 답례로 전권대신 민영익, 부대신 홍영식, 서기관 서광범 등 8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미국으로 보냈는데, 이들을 보빙사라 불렀다.
2) 황규진, 홍종만,. 『인천 서지방사』, p. 44.에 인용된 것을 재인용함
3)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서울(당시 한성부)에서 창간된 조선 최초의 근대 신문이다. 개항 직후 개화파는 국민계몽과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일본의 협조하에 근대 신문의 발행을 도모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 개화파와의 연계를 통해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로 조선의 신문발행을 도와주려 했다. 그밖에도 당시 사회적·문화적 요인이 〈한성순보〉가 출현할 수 있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즉 조선 후기부터 상업이 발달하고 한글을 중심으로 문자문화가 꾸준히 확대되어왔으며, 서양문물의 전래와 서양인의 출몰은 당시 사회의 불안을 가중해 정보 욕구를 증대시켰다.
10일에 1번씩 발행되는 순간 형태를 취한 〈한성순보〉는 17×24㎝ 정도 크기로 오늘날의 국배판과 비슷한 크기였다. 전단으로 매호 24면(1면 23행, 1행 47자)을 발행했으며 표제와 본문 모두 25호 활자를 사용했다. 기사의 종류는 국내관보와 국내사보(사회면 기사), 각국근사(외신기사), 잡록(논문 또는 피처 기사), 본국고백(社告), 시직탐보(물가정보)로 분류하여 게재했다. 순한문으로 발행되어 독자층은 주로 중앙 및 지방의 관리들과 한문을 해독할 수 있는 양반계층에 한정되었다. 신문을 발행한 박문국의 운영은 세금과 구독료에 의존해 이루어졌으나 세금의 체납과 구독료의 미납 등으로 경영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경영난 속에서도 40호 이상을 발행하다가 갑신정변 때의 화재로 박문국 건물이 소실됨으로써 창간 14개월 만에 폐간되었다.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