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스크랜턴이 조선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단한 것은 그의 어머니인 메리 스크랜턴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이번 기회가 소녀 시절부터 꿈꾸어왔던 해외선교사로서의 포부를 실현할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의 제조업자인 스크랜턴(William T. Scranton)과 결혼하고 바로 아들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을 낳은 단란한 가정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스크랜턴 여사는 40이 되던 해에 남편을 잃고 말았다. 이때 아들 스크랜턴의 나이는 16살이었다.
그녀는 남편 없이 아들을 키우는 동안 평소에 그가 꿈꾸던 대로 하나님께 국외의 선교사로서 파송되기를 기도했는데, 아들이 조선의 선교사로 지원하자 자신도 결단하게 된 것이다. 때마침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조선에 가서 사역을 감당할 선교사를 모집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역사상 최초로 아들과 어머니, 모자(母子) 선교사 가정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53세였다. 미국 감리교회의 남녀 선교부에서도 이 모자의 청(請)을 기쁘게 받아들여 이들을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하게 된 것이다1).
이렇게 뉴욕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스크랜턴 목사 일가(一家)는 드디어 1885년 1월 21일 조선을 향해서 뉴욕을 떠난다. 일행은 스크랜턴 부부와 그들의 어린 딸과 그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 등 모두 네 명이었다. 이들은 뉴욕을 떠나 조선에서 같이 사역하게 될 아펜젤러 부부와 합류하게 되어 있었다. 이때 아펜젤러는 27세, 스크랜턴은 29세였다. 모두 20대의 젊은이로서 자신에 넘치고, 야심만만하고, 건장한 사나이들이었다.
이들은 비로소 처음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나 인사를 하고, 그들의 젊음을 불태울 조선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두 선교사는 앞으로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면서, 때로는 경쟁의식을 가지고 조선을 위하여 사역하게 될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던 것이다2). <계속>
[미주]
1) 송길섭, 『상동교회 100년사』, p. 27.
2) 위의 책, p. 28.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