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선교 허락을 받기 위한 맥클레이와 김옥균의 활동

맥클레이 박사는 타고난 외교관에다가 강력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그 당시에는 외교술이 개척사업의 성공을 위해서 필수적이었다. 이 능력은 그가 한국에 도착하여 교육과 의료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공사 푸트의 인가를 받아내는 데서, 그리고 조선 국왕으로부터 선교 개시의 특권을 보장받는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선교를 위한 땅도 보장받았다. 이러한 성공은 그의 현명함과 부드러운 외교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

미 선교국의 요청에 의하여 맥클레이 박사는 부인을 동반하고 말로만 듣던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朝鮮)에 처음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제물포에 상륙한 맥클레이 박사는 1884년 6월 27일 서울에 이미 들어와 있던 미국공사 후트의 환영을 받았다. 맥클레이는 후트의 공사관에 머무르면서 그 당시 개화당의 거물이며 승정원(承政院)의 승지로서, 외아문교섭 사무(外衙門 交涉 事務)를 보고 있는 김옥균(金玉均)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조선에 온 이유를 설명하고 선교 사업에 대한 임금의 허락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맥클레이 선교사와 김옥균
▲조선에서 기독교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의 공식 허가를 받는 일을 주도한 맥클레이 선교사(좌)와 김옥균(우)
이미 맥클레이와 김옥균, 이 두 사람은 1880년에 김옥균이 수신사 사절로서 일본을 유람하였을 때에 교분(交分)이 있었던 관계로, 두 사람은 협력하여 조선의 선교사 입국에 관련한 윤허(允許)를 고종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맥클레이 박사는 김옥균의 도움으로 일본어로 된 편지 한 통을 조선의 왕에게 전달하였다. 그 편지는 그를 조선에 파견한 선교회의 바람을 표시하고, 그 선교회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일주일 후에 맥클레이 박사는 김옥균으로부터 왕이 의료 및 교육기관 설립을 허가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김옥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세한 내용은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사업을 즉시 시행할 수 있습니다.”2) 당시의 상황을 맥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6월 23일에 우리가 목적지에 안착하여, 이튿날 우리가 제물포항에 하륙하여 일본 영사(領事) 고바야를 방문하였는데 그의 주선으로 교군(轎軍)을 타고 서울로 향하였다. 그날 저녁 6시에 서울에 도착하매 미국공사 푸트 씨와 그 부인이 친절하게 환영하여 주고, 그 이튿날부터 우리를 위하여 준비해 둔 집에서 유하게 되었다. 영국(英國) 영사 애스톤(W. G. Aston) 씨와 일본 대리공사(代理公使)를 방문하였고, 또 외부(外部)와 해관(海關)에 고문(顧問)으로 있는 묄렌도르프(P. G. Von Mollendorf) 씨를 방문하였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내가 놀란 것은 나의 통역(通譯)이 개화당을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기독교(基督敎) 선교사로서 서울에 공공연히 들어온 것은 내가 처음이요 내가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목적을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다행히 김옥균(金玉均) 씨가 일본에 유람했을 때, 우리 내외와 사귀었던 일이 있는데 김 씨가 한국 정부의 외부에 대관(大官)으로 있었으므로 6월 30일에 내가 조선에서 기독교 사업을 하려는 목적을 분명히 설명한 서함을 주고 황제 폐하께 상주(上奏)하여 달라고 김 씨에게 청하였다. 7월 3일에 내가 김씨를 다시 방문한즉, 그가 말하기를 그 서함(書函)을 황제께서 신중히 살피시고 조선에서 병원과 학교사업을 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하셨다. 그날 오후에 김 씨가 내방하여 우리가 조선으로 온 것을 깊이 환영한다고 말하셨다.”3) 

김옥균은 이미 안면이 있었던 맥클레이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잘 들어주었던 것이다. 비록 김옥균 자신은 독실한 불교(佛敎) 신자였지만, 이미 발전한 일본의 문물(文物)을 경험한 그로서는 조선의 개화를 위해서 기독교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옥균은 곧 입궐하여 고종에게 이 사실을 아뢰고, 조선에서의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에 관한 윤허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맥클레이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푸트 장군이 보낸 두 통의 편지는 더 큰 자신감을 주었다.

“나는 국왕으로부터 당신이 하는 일에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서울에다 학교와 병원을 세우는 일에 묵시적인 도움이 있을 것이라는 새로운 언질을 받았습니다. 저는 여기 있으면서 당신이 확고히 일을 추진해 가는 것을 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하는 일을 위해 내가 준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놓을 것입니다. 김옥균과 또 다른 한두 사람이 암암리에 나를 도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4)

맥클레이는 이런 큰 기쁨을 안고 곧 서울을 떠나 일본에 가서 이 소식을 지체 없이 가우처 박사와 감리교회 선교부의 파울러 감독에게 보고하였다5). 이런 의미에서 맥클레이 선교사는 조선 선교의 양아버지6)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김옥균 또한 조선의 기독교 선교에 있어서 그 공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계속>

[미주]
1) 사우어(C.A.Sauer) 엮음, (자료연구회 옮김), 『은자의 나라 문에서』, p. 35.
2) Macly, 『Korea’s Permit to Christianity』, op. cit. 278-289. 의 내용을 스톡스. 『미국 감리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 1885-1930』 p. 57. 에서 재인용.
3) 양주삼 역(譯), 「감리회보」 1934. 6. 10 발행, (제 2권 6호), p. 15.
4) Maclay, 『Commencement of the Korea Methodist Episcopal Mission』, Gospel in all Land. (Nov. 1896), P. 500.
5) G.H. Jones, 『The Korea Mission of M. E. Church』, P. 22.
6) 「Annual Report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85」, p. 235.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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