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보빙사절단과 가우처(J. F. Goucher)와의 만남

가우처 박사
▲가우처 박사

한국의 보빙(報聘)사절단 일행이 시카고를 떠나 워싱턴DC로 향해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미국의 감리교회 목사요, 볼티모어(Baltimore) 여자대학의 학장인 가우처 박사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그때 가우처 박사는 보빙사절단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과의 면담을 통하여 당시 조선의 상황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가우처 박사는 조선에서 온 보빙사절단을 초청하여 접대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조선에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그는 결심을 곧 실천에 옮겼다. 뉴욕에 있는 감리교 선교본부에 당시로선 큰 액수인 2,000달러를 기증하면서 조선에 즉각적인 선교를 시행할 것을 요청했다.

1883년 11월 6일, 가우처 박사는 뉴욕의 감리교 선교본부(宣敎本部)에 조선에 선교 사업을 시행할 것을 정식으로 제의하였다. 또 한편으로 감리교회의 기관지인 「크리스천의 대변자(Christian Advocate)」를 통하여 조선의 선교를 즉각 실행할 것을 강조하고 선교기금을 모집하였다. 당시에 아이오와(Iowa)주에 사는 슬로콤이라는 교인이 1,000달러를 헌금하였고, 캘리포니아(California)주에 사는 한 소녀가 9달러를 헌금하였다고 한다. 가우처 박사도 자신의 재산 2,000달러를 헌금하는 등 기대 이상의 선교기금을 얻자, 당시 미감리교 선교회의 서기였던 파울러(Fowler) 감독은 일본에서 선교하는 맥클레이(R. S. Maclay) 박사에게 의뢰하여 조선 선교의 준비 단계로서 한국을 시찰하고, 그 사정을 보고해 달라고 전문(電文)을 보냈다1).

러블리 레인 감리교회
▲가우처 박사가 목회했던 볼티모어의 러블리 레인 감리교회 건물 ⓒ위키미디어
1884년 6월 8일 선교본부로부터 명령을 받은 맥클레이 박사 내외는 같은 해 6월 23일에 제물포를 통하여 상륙하게 되었다2). 이처럼 가우처 박사에 의하여 시작된 조선의 선교는 빠르게 결실을 맺게 되었다. 맥클레이가 고종 황제의 윤허를 받고 돌아간 지 불과 일 년도 못 되어 청년 아펜젤러와 스크랜턴이 정식으로 조선에 들어와서 선교사역을 시작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계속>

[미주]
1) 송길섭, 『상동교회 100년사』, p. 24.
2) 김세한, 『배재 80년사』 p. 59.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