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6.25 남침 후 종전 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도 북한에는 여전히 다양한 파벌들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박헌영 남로당파, 김두봉, 최창익 연안파, 박금출의 갑산파와 만주파(김일성 포함)와 위의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1953년 종전 이후 즉시 남침 적화 실패의 원인을 박헌영에게 돌려,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김무정을 비롯해 박헌영과 남로당파를 제거합니다. 사실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 이념에 가장 정통한 정적이 제거된 셈입니다.
가장 중요한 정적인 박헌영을 제거한 김일성은 1956년 조선로동당 3차 대회에서 개인숭배를 꾀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1인 숭배를 반대하는 매우 큰 세력과의 대접전이 벌어지는데, 이를 8월 종파 사건이라고 합니다. 연안파 최창익, 윤공흠, 서휘 및 소련파 박창옥을 숙청한 것입니다. 최용건이 김일성 1인 숭배를 위한 앞잡이가 되어, 소수이지만 만주 빨치산파를 똘똘 뭉쳐 결집시킨 다음 이미 와해 상태에 있는 남로당파, 그리고 중심 세력이 없는 소련파와 연안파를 제거하기 위한 구실을 만듭니다.
이것의 발단은 1956년 8월 30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 8월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최용건을 중심으로 지지파들은 서휘와 윤공흠이 책임자로 있던 직업동맹과 상업성을 비판하였습니다. 이어서 윤공흠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비판하는 핵심을 벗어나, 김일성의 간부정책 비판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사실 전원회의는 김일성 세력이 장악했기에 윤공흠은 이들에 의해 억지로 단상에서 끌려 내려오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회의장의 살벌한 분위기를 체험한 윤공흠과 서휘 등 연안파 인사들은 회의장을 빠져나와 자동차를 타고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신의주시로 향합니다.
또 다른 반대파였던 최창익은 “당의 노선에는 문제가 없으나 개인숭배의 움직임에는 문제가 있다”고 발언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 후였습니다. 소련파인 박창옥은 “자신은 어떤 그룹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고 발언했지만, 주석단과 회의장에서의 항의가 들끓어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서휘와 윤공흠, 리필규는 출당 조처되고, 최창익과 박창옥의 당직은 박탈되었습니다. 동시에 최창익과 박창욱은 내각 부수상직 등의 정부 직위도 박탈되었습니다. 박헌영 남로당 제거에 이어 연안파와 소련파 제거는 김일성 일인 지배체제를 공고히 한 것입니다.
김일성은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를 제거했지만 가장 만만찮은 큰 세력이 있었는데, 이는 갑산파입니다. 지금은 양강도에 소속되지만, 과거 함경도였던 갑산군에 근거를 둔 계파입니다. 김일성의 만주파와 초기에는 같은 노선을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최대의 정적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념상 세습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김일성 이후 후계 구도를 꿈꾸는 김정일에게 있어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박금철을 미화하여 영화화한 것을 빌미로 김일성은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개최하여 갑산파를 대거 들어내고 당내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합니다. 이는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수년에 걸쳐 대대적인 숙청으로 진행됩니다. 박금철과 리효순 등 갑산파 핵심 인물들은 출당되고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는 등 고초를 겪다가 사망합니다. <계속>
김종필 목사
미국 파토스 재단 대표
필리핀 한 알의 밀알교회 개척 및 위임 목사
미국 보스턴 소재 임마누엘 가스펠 센터 바이탈리티 소장 역임
미국 시티 임팩트 라운드테이블(City Impact Roundtable) 집행위원 역임
필리핀 그레인 오브 휘트(Grain of Wheat) 대학·대학원 설립자 및 초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