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의 마지노선인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을 사수한 직후 1950년 9월 수암산 518 고지의 미군 제1기병 사단 병사
▲6.25전쟁의 마지노선인 낙동강 전선의 다부동을 사수한 직후 1950년 9월 수암산 518 고지의 미군 제1기병 사단 병사 ⓒ위키미디어
전기한 바와 같이 북한군의 남침은 남북한의 심각한 군사력 차이를 보여 줍니다. 북한은 일본이 항복하면서 남기고 간 일본제 무기도 사용했지만 소련이 제공한 군수물자로 남한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무상원조를 하던 스탈린은 판매로 바꾸었고, 김일성은 금과 은, 철광석, 모자나이트, 쌀을 군수 물자 대금으로 지불하였습니다.

세계대전으로 확전을 원치 않았던 소련은 최신 전차나 최신 전투기는 제공하지 않고 2차 대전 때 사용하던 중고 무기와 화력이 그렇게 강하지 않은 평사포 및 곡사포를 제공했습니다. 전차도 최신 전차인 T-54나 IS-3은 제공되지 않고 화력이나 대전차전 능력이 두 전차보다 약한 T-34가 제공되었습니다. 전투기 같은 경우 제트 전투기도 아니고 소련에서는 이미 퇴역해 예비부품도 부족한 프로펠러 전투기가 제공됐습니다. 이에 반하여 남한군에는 전투기는커녕 변변치 않은 전차도 없었고,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선포함으로 한반도 방어 라인에서 철수한 미국은 이승만 박사의 군사 지원 요청을 외면했습니다. 그나마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는 공격용이 아닌 방어용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북한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격하였고 서울은 3일 만에 점령당하였으며, 불과 전쟁 1년 만에 남쪽과 북쪽을 오르내리는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이 되었습니다. 남한군이 할 수 있는 것은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한 지연전으로, 수도를 포기하고 한강 철교를 폭파함으로 수도권에 있는 병력을 남하시켜 북한군의 진격 속도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나마 주효하여서 김일성이 예측한 만큼 10km씩 남진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에 조금 시간을 벌게 된 우리 군은 있는 병력을 재편성하였고, 더글러스 맥아더 UN군 사령관은 임시 수도 부산에 미8군사령부를, 일본에 UN군 사령부를 설치하였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방어 라인에서 벗어나 있었는데 왜 이토록 신속하게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 군 개입이 이루어졌는지를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쪽의 이승만 정부 수립 이후 미군을 철수시킨 미국은 애치슨 라인으로 방어선을 한반도 밖으로 밀어냈지만, 실제적인 김일성의 침공을 보고 기존의 정책을 바꾸게 됩니다. 이로 인해 미국 주도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이 이루어졌으며, 이때에 북한의 침공을 명백한 파괴 행위로 규정하고 유엔군의 참전을 결정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진행되기에 앞서 미국은 6월 27일에 트루먼 성명을 발표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따르는 유엔군 합동 사령부를 7월 7일에 설치하게 됩니다. 김일성이 남한 전체 점령을 목표로 한 ‘50일 전쟁’의 속전속결이 이루기도 전, 한국전쟁 발발 13일 만에 신속하고도 단호한 조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 변화에는 북한의 무력 침략이 국제 평화 질서를 무너뜨리며, 한반도 정세를 방치할 경우 동북아 정세 변화가 일어나고, 이는 소련의 팽창으로 이어질 것이 불 보듯 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개입은 우리 민족이 주님 앞에 기도한 응답이기도 하며, 악의 세력의 남하와 적화통일을 무산시킨 성도들의 간구라고 저는 믿습니다. UN군 참전이라고는 하지만 미국의 절대적인 지원과 전쟁 물자 공급, 그리고 육해공군을 통한 연합작전 수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남은 낙동강으로부터 인천 상륙 작전이라는 절묘한 노림수를 통해 양동작전이 가능했다고 봅니다. 한국전쟁 3년 1개월 가운데 가장 치열한 전투는 처음 1년으로, 1951년 6월 23일 소련이 휴전을 제휴할 당시 실질적인 전투 강도는 약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초기의 매우 빠르고 강력했던 북한군에 비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한 UN군의 본격적인 군사 작전이 투여되기 전까지는 남한군 단독으로 방어를 해야 했습니다. 절대적 열세에 있는 남한군은 호남 방어를 할 여력이 되지 않아 포기하였고, 7월 27일에는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는 물론 전라도까지 북한군에게 점령당하고 마지막 방어선인 낙동강 유역으로 후퇴합니다. 이때 북한군은 남한의 90%의 땅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처럼 낙동강 지역만을 남겨 놓고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있을 때 이승만 박사는 부산에 있는 목회자들에게 금식을 통한 구국 결단으로, 민족 구원을 위한 기도를 요청하였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는 소련군 대표의 유엔 안정보장위원회 불참으로, 유엔이 한국전 참전을 결의함으로 전세가 뒤집히게 됩니다. 이어서 인천 상륙 작전은 오히려 북진할 수 있게 하면서 위기에 처한 김일성이 모택동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하고, 결국 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점차 국제 대리전 양상을 띠게 됩니다. <계속>

김종필 목사
미국 파토스 재단 대표
필리핀 한 알의 밀알교회 개척 및 위임 목사
미국 보스턴 소재 임마누엘 가스펠 센터 바이탈리티 소장 역임
미국 시티 임팩트 라운드테이블(City Impact Roundtable) 집행위원 역임
필리핀 그레인 오브 휘트(Grain of Wheat) 대학·대학원 설립자 및 초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