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분단은 우리가 원했던 것도 아니며, 또한 우리의 독립운동으로 독립을 쟁취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전부 민주 진영이었다면 한반도의 분할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의 함락과 베를린 입성을 이룬 국가는 소련이었기에, 연합군의 한 축으로서 갖는 승전국 소련의 입김은 결코 간과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심요 지역 및 서간도와 동간도, 그리고 북간도를 포함한 만주, 상해를 포함한 중국, 연해주를 포함한 소련 지역, 일본, 하와이를 비롯한 미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망명 정부 및 항일 운동을 하던 단체들은 매우 많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패전 후 고국으로 들어온 이들로 말미암아 일본 압제가 끝난 남한 지역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북한 지역도 소련을 등에 업고 들어 온 김일성이 갑산파와 함께 혜성처럼 나타나 김성주가 아닌 김일성 장군 행세를 하며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남한에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서 안정화되면서 남로당을 더이상 이끌 수 없는 처지가 되자, 박헌영은 밀입북하여 남로당과 북로당이 하나(조선 로동당)가 되어 남침을 감행하게 됩니다. 박헌영은 남침만이 통일의 해법임을 설파하고 박헌영과 김일성은 스탈린을 통해 2차 세계대전 이후 남게 된 군수물자를 공수받게 되었습니다. 스탈린은 똑똑하고 자기의식이 강한 박헌영보다는 어떤 이념이나 사상 없이 소련을 맹종하는 김일성을 통해 위성국가처럼 조정하기에 용이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한편, 하지 중장을 통한 미군정이 이승만 정부의 정부 수립과 더불어 신속한 정부 이양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 미국은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라인(Acheson Line, 미 국무부 장관 Dean Gooderham Acheson의 이름을 딴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선포합니다. 애치슨 라인은 대륙이나 반도가 포함되지 않는 섬으로 미국의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구상인데, 북태평양 알류산 열도부터 일본 열도와 오키나와, 그리고 타이완과 필리핀까지 연결하는 도서 국가 연결 라인(Island Line)으로, 그 외의 지역에서 일어나는 분쟁에는 미국이 개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하게 되고 남한에는 단 한 대의 전차도 남지 않게 됩니다. 미군이 철수한 소식을 접한 김일성과 박헌영은 이 기회를 절호의 남침 기회로 봅니다.
한국전쟁은 북한에서는 조국 해방 전쟁이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북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을 돕는다고 하여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고 부르지만, 김일성이 1950년 6월 25일에 남침하였기에 우리에게는 6.25 전쟁이라는 용어가 매우 익숙합니다.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은 암호명 ‘폭풍 224’ 이름으로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으로 한국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간 치열한 교전으로 치러졌습니다.
행정안전부의 국가기록원의 통계에 따르면, 6.25 전쟁으로 인한 한국군 전사자는 13만 7,899명이고, 유엔군 전사자는 3만 7,902명이며 도합 17만 5,801이 전사했습니다. 부상자는 한국군과 유엔군 포함하여 모두 55만 4,202명이며, 실종 또는 포로된 자는 모두 4만 2,605명입니다. 이에 반하여 북한군의 통계치는 한국전란 4년 치와 군사 정전의 편람과 미군 자료가 다릅니다. 따라서 저는 미군 자료의 통계를 사용하겠습니다. 미군 자료에 따르면, 북한군 인명 사망은 52만 2,000명, 실종과 포로는 1만 2,000만 명이며, 비전투 인명 손실도 17만 7,000명에 달합니다. 중공군도 97만 2,600명이 참전하여, 사망자 14만 8,600명, 부상자 79만 8,400명, 실종 3,900명, 포로 2만 1,700명입니다. 1951년 3월까지 발생한 피난민의 수는 651만 4,581명입니다. 6.25 전쟁 기간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사망자 22만 4,663명, 학살 12만 8,936명, 부상 22만 9,635명, 납치된 자 8만 4,532명, 그리고 행방불명된 사람만 해도 30만 3,212명입니다.(참조: https://www.archives.go.kr/theme/next/625/damageStatistic.do)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전쟁은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 1개월간 교전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왜 김일성이 6월 25일에 남침을 감행하게 되었는지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김일성은 일제로부터 광복하게 된 8월 15일에 남북 적화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6월 25일에 남침을 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를 일자로 계산하면 단 2개월 만에 남한 전체를 점령하겠다는 것입니다. 38선에서 매일 10km씩 남진하면 모두 50일이 필요합니다. 500km이면 부산까지 점령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계산하기 위해 8월 15일로부터 거슬러 역으로 50일을 계산하면 6월 25일이 됩니다. <계속>
김종필 목사
미국 파토스 재단 대표
필리핀 한 알의 밀알교회 개척 및 위임 목사
미국 보스턴 소재 임마누엘 가스펠 센터 바이탈리티 소장 역임
미국 시티 임팩트 라운드테이블(City Impact Roundtable) 집행위원 역임
필리핀 그레인 오브 휘트(Grain of Wheat) 대학·대학원 설립자 및 초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