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한국전쟁 이후 종전 협상이 체결되고 분단이 재개된 지 어언 70년이 지났습니다. 70년의 긴 세월 동안 이제는 문화도, 언어도, 사상도, 심지어는 삶의 방식도 이질화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 긴 시간 동안 남한에서 놀라운 성령님의 역사와 복음화가 이루어져 세계선교의 한 주축을 감당하였으며, 문화적으로는 인류사 가운데 한류를 낳았고, 군사적으로 세계 6위를, 그리고 IT를 비롯한 반도체 메모리, 조선산업, 디스플레이, 전자 산업에서는 세계 1위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자동차, 석유화학, 철강, 해외 건축 및 방산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우뚝 선 국가로 남한은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길고 긴 김일성 우상 숭배화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이에 우리는 북한의 실체를 좀 더 알고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복음 통일을 위한 방안 마련에 진력해야 합니다.
남북한을 바라보는 관점
70년의 분단 앞에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너무나 큰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남조선(남한)과 남조선 사람들을 미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미국의 충견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으며, 남한에서는 북한을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되고 공산화되고 또한 주체사상화된 나라요, 주민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남한 이승만 초대 정부는 종전 협정 이후 전쟁의 폐허 뒤에 일어나기 위한 복구화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을 통해서는 산업화, 근대화를 겪었습니다. 그리고 80년대 이후 민주화를 이루었고 이제는 세계 경제 10대국으로 선진국에 진입하여 세계에서도 인정하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북한은 실제 순위를 매길 수 있는 수치가 불가능하지만, 세계 216개국 가운데 138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국내 총생산도 책정할 수 없어서 IMF와 세계은행(World Bank)도 북한을 순위에 포함시키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UN이 2020년 기준으로 낸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15,84,700억 달러, 그러니까 157억 달러가 조금 넘는 최빈국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UN 발표대로라면 남한과 북한은 114배의 국내 총생산 차이가 납니다. 이는 지금 남북한 차이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북한에 존재하는 경제력, 군사력, 인구, 자원뿐 아니라 70여 년의 분단 가운데 형성된 국가 체제와 역사 차이는 상당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남북한을 어떻게 보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를 고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23년 현재 북한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한반도가 분단되던 시점에서 소련 점령 하의 북한이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70년 이상 그대로 존속해 온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남한도 민주주의 체제를 도입하였지만, 근대화와 산업화를 겪으면서 아시아에서도 보기 드문 민주주의 성공 사례 국가이면서도 선진국형 수출 주도형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북한도 지난 70년 동안 끊임없이 변모하였고, 지금 이 시점에서 ‘북한을 어떤 국가로 보느냐?’에 따라 남북문제와 복음 통일에 대한 접근법이 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
남북한 접근법: 특이한 분단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하여 알려면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78년 동안 북한에서 일어난 일들을 볼 때 북한을 제대로 바라보는 공정한 시각이 형성될 것입니다.
•해방 후 북한 정권 수립 시기
•한국전쟁 당시
•종전협상 당시
•김일성 독재 체제 수립
•주체 사상
•김일성주의 우상숭배 종교 국가
•김정일 체제
•김정은 체제
우리는 해방 후 당연히 통일 국가로 출범할 줄 알았지만 실제로는 매우 특이한 분단을 겪게 되었고 이는 지금처럼 70여 년을 넘게 분단국가로 살아오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독립이 국제적으로 처음 공식 거론된 것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가 항복한 직후인 1943년 11월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열린 카이로 회담에서입니다. 놀라운 것은 아직 일본 군국주의가 대동아공영권의 기치를 들고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인도차이나 일부 국가와 필리핀을 점령하고, 버마까지 침략하던 전성기(?)에 논의됐다는 점입니다. 회담 참석자로는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중국의 장개석 총통으로서, 이들이 전반적인 전후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 중에 조선의 독립이 거론되었고 그들은 조선의 독립에 대하여 동의하였습니다.
그들의 합의는 “우리 미·영·중(당시 장개석 국민당 중화민국) 3국은 조선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해서 적절한 경과를 거쳐서(in due course)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합의에서 언급한 ‘적절한 경과를 거쳐서’는 신탁(信託)통치로 해석되었고 해방이 되더라도 바로 독립되는 것이 아니고 신탁통치라는 과정을 거친 후에 독립시킨다는 의미였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장개석 국민당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와 매우 친밀하였고, 국민당과 함께 한 항일운동과 항일 독립운동 등이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승만, 김구, 안창호와 같은 민족지도자들의 노력들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합니다. 특히 국민당의 장개석은 회담 참석에 앞서 김구 주석을 만나 한국인의 간절한 의지와 요구사항을 듣고 이 회의에서 말한 것이며, 미국에서 미국 정부를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적극 설득한 이승만의 영향도 매우 크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놀랍게도 조선의 독립이 재차 확인된 것은 일본의 항복 선인이 있기 전인 1945년 2월 미·영·소 3개국 정상이 모인 흑해 크림(크름)반도 얄타 회담입니다. 여기에서 3국 정상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회담의 내용은 카이로 회담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데, 한국(당시에는 조선, Korea)을 비롯한 약소국들의 독립을 재확인하며, 그들 국가의 민주세력을 대표하는 인사들로 구성된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빠른 시일 내에 자유선거를 통해 합법적인 정부를 수립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을 4개 지역으로 나누어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이 분할 점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 지역은 서독이 되었고, 소련 점령 지역은 동독이 되면서 독일은 분단국가가 됩니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 중 하나는 국제연맹의 후속으로 국제연합, 즉 UN 창설을 합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 패망 1개월 전 포츠담 회담에서 전승국 지도자들이 모여서 일본의 무조건적 항복과 한국의 독립을 최종 확인하기에 이릅니다. 드디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지만, 남북은 분할되고 북쪽은 소련군의 주둔으로, 남쪽은 미군의 주둔으로 분할됩니다. 갑작스러운 일본의 패망과 중국, 소련,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흩어져서 행해졌던 독립운동은 제각기여서 통일된 국론을 이루기 쉽지 않았습니다.
해방 이후 각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정부 수립에는 이념과 지도자들에 따라 좌우 대립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남쪽에서는 김구, 이승만, 여운형, 김규식, 박용만뿐 아니라 공산주의자인 박헌영까지 남한 정부 수립에 관여하면서 해방 후 정국은 혼돈과 혼미 가운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시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의 항복과 해방 이후의 한반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해방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선포(주석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1945년 북위 38도선 경계로 미군은 남쪽 소련군은 북쪽에 주둔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 미영소 외상회의 4개 항 합의
•민주주의 기반 임시정부 수립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
•미국과 소련, 영국, 중국은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최대 5년간의 신탁통치를 실시
•2주일 이내에 미·소 사령부의 대표회의를 개최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 US-Soviet Joint Commission)
•1946년 4월 18일 미소공동위원회에 협력하면 과거 반탁운동을 불문에 부치고 협의 대상으로 참여시키겠다는 공동성명 5호 발표
•1946년 7월 좌우합작 운동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 선언
•1947년 5월 21일 2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7년 7월 1일 평양 회의 개최
•1947년 7월 19일 여운형 암살
•1947년 8월 28일 미국, 한국 문제를 미·소·영·중 4개국 회담에 맡기자고 제안
•1947년 9월 17일 한국 문제 유엔 상정
•1947년 9월 26일 소련, 미·소 양군의 동시 철군 제안
•1947년 10월 18일 미국, 미소공동위원회의 휴회 제안
•1947년 10월 21일 소련의 대표단 철수로 미소공동위원회 해산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 총선거 결의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 남한 단독 선거안 가결
•1948년 남북한 자체 정부 수립
•1949년 남북한 간 공식적인 인적 교류 금지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민족 간에 적대감 고조 <계속>
김종필 목사
미국 파토스 재단 대표
필리핀 한 알의 밀알교회 개척 및 위임 목사
미국 보스턴 소재 임마누엘 가스펠 센터 바이탈리티 소장 역임
미국 시티 임팩트 라운드테이블(City Impact Roundtable) 집행위원 역임
필리핀 그레인 오브 휘트(Grain of Wheat) 대학·대학원 설립자 및 초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