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웰본 선교사는 1900년 내한하여 황해도 배천, 강원 원주와 경북 안동, 영주, 문경, 상주, 봉화, 대구 등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누비며 오지에 복음을 전한 개척 선교사다. 순회 전도 시에는 평균 1천 리 길을 여행하며 ‘길 위의 전도자’로 불렸던 웰본 선교사는 일각에서 1903년 원산 부흥운동에 앞서 배천에서 부흥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별히 이번 호 자료에서는 아서 선교사를 파송한 북장로교 뉴욕 해외선교부의 엘린우드 박사에게 보낸 편지와 파송을 받은 아서 웰본과 그의 부인 새디 웰본이 선교부에 보낸 사역 보고 내용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교사에게 꼭 필요한 현지 언어 습득에 관한 선교사의 각오와 초기 선교 시에 접한 현지 문화 충돌 현상에 대해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해외선교부에 보고하는 초기 선교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계속해서 우리는 아서 웰본의 한국 선교 기록을 통해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으로 양반과 평민 등 계층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의 발자취를 함께 따라가 보려 한다. <편집자 주>

아서 웰본 선교사
▲아서 웰본 선교사(1866~1928)가 34세 때인 1900년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졸업을 위해 찍은 사진
Ⅶ. 아서 웰본 선교사 편지

뉴욕 해외선교부의 엘린우드 박사에게 보낸 편지

제물포, 1902년 2월 28일21)

친애하는 엘린우드 박사님,

저희 부부는 지방 구역인 배천22)에 가는 중입니다. 폭풍우 때문에 증기선이 지연되고 있어서 기다리는 시간의 일부를 박사님께 편지를 쓰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박사님의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저는 언어를 습득하는 문제에 있어서 박사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만약 제가 이 언어를 익히지 못한다면 저는 일생 사역에 큰 지장을 받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비록 실력이 매우 천천히 늘고 있지만 저는 아직 낙심하지 않습니다. 작년에 비해 올해는 공부를 하기에 더 나은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물론 무어 씨가 미국으로 돌아간 이후로 현재 특히 더 많은 방해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저는 언어 능력이 부족한 부분을 끈기 있게 보완하고 싶습니다.

박사님께서는 지부의 편지를 통해 무어 씨와 제가 맡았던 서울 중심부의 교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들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지부의 전도위원회는 12월 초에 우리 교회의 상태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교회 관리인을 포함한 몇몇 회원들의 성품은 한국인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로 인해 문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해고하고 교회 건물을 책임지는 데 더 합당한 사람을 세울 것을 권고받았습니다. 한국에서 관리인에 해당하는 ‘사찰’(caretaker)이란 말은 호텔이나 어떤 건물의 관리인과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이 직책에 가장 적합한 사람을 두는 것이 현명해 보였습니다. 사찰은 교회당의 관리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 이유로 어느 정도 본보기로서 존경받고 있습니다.

아서와 새디의 삶에서 중요했던 도시들
▲아서와 새디의 삶에서 중요했던 도시들. 새디 선교사의 유품으로, 새디 선교사를 후원한 청년기독면려회가 1909년 제작한 것이다. 지도 속 빨간색으로 표시한 숫자는 손녀 웰본 에비가 표기한 것이다. ⓒ『아서 한국에 가다』
지방 구역에서는 이 사찰이 거의 언제나 그룹의 지도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시골에서 오는 사람들은 이번에 제기된 우리 교회 관리인이었던 이 사람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 씨입니다. 그의 직업은 궁전에서 기생들을 위해 음악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 일은 이교도 한국인조차도 매우 천한 일로 여기는데 어떻게 그가 교회에서 그런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들은 의아해합니다.

새로운 사찰을 임명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번 회의를 열었는데 늘 이 요인에 휘말려서 당회가 중단되어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 새 관리인이 선출되자 이전 관리인이 나가기를 거부했습니다. 교회 측은 이 씨가 주일 저녁예배 후 회의를 소집하여 에비슨 박사가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고 무어 씨가 교회 건물을 소유하려고 했다는 편지를 작성했을 때 이 문제를 법정에 상소할 참이었습니다. 이제 법적 판결이 아니고서는 건물을 소유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에 우리는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난 일요일에는 병원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꽤 많은 외부인들이 참석했습니다. 이번 주 동안에 이전 건물보다 더 많이, 아니면 적어도 같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방을 넓힐 예정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늘 그 교회 건물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의구심이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마음이 편해졌다고 확신합니다. 이제 모두가 더 성실히 임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노력에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난 두 달 동안 이 문제가 저의 시간과 생각을 상당히 많이 차지했기 때문에 이 일이 해결되어서 기쁩니다.

시골 사역이 많이 등한시되고 있다고 느끼지만 우리의 현재 상황으로 볼 때 달리 도울 방도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기근 지역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제가 인근 그룹들을 방문하는 동안 웰본 부인은 시골 중심에 남아서 여인들을 가르칠 것입니다.

우리 지부에서 한국어를 아는 분이 파견되지 못해 아쉽지만 우리는 일꾼이 매우 부족하고, 완전히 갖추어진 복음사역자는 한 명뿐이며, 그분조차도 아내의 병으로 인해 당분간 잃어버릴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께서 우리의 노력을 축복해 주실 것을 믿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사역에 임하면서,

아서 웰본

서울 남산과 진고개 사이(남대문 인근 인성붓재,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2가와 예관동 사이)에 위치한 아서와 새디의 집
▲서울 남산과 진고개 사이(남대문 인근 인성붓재,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2가와 예관동 사이)에 위치한 아서와 새디의 집 ⓒ『아서 한국에 가다』
Ⅷ. 선교 본부와의 편지 교신

8-1. 뉴욕 해외선교부의 엘린우드 박사가 아서 웰본과 새디 웰본에게 보낸 편지

1902년 4월 25일23)

친애하는 웰본 부부께,

두 분이 보낸 훌륭한 편지를 잘 받았고 그 편지들에 대해 공동으로 답하고자 합니다. 저는 웰본 부인의 여행에 대한 설명은 물론이거니와 사실 두 편지 모두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서울 교회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였습니다. 제 짐작으로는 무어 씨의 부재가 교회가 제시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감소시키고 인격을 저하시키는 데 부분적으로 일조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적 성품을 가진 사람이 그러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그의 통제하에 둘 수 있는지 설명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그 불평분자들이 그들의 변절을 실컷 즐기도록 내버려 두든지 아니면 더 나은 마음으로 돌아와 평화를 이루는 법을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 큰 관심을 요하는 것은 지방 사역임을 확신하며, 이제 봄이 다가오고 겨울의 혹독함이 끝났으므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지방 단체들을 방문하는 데 서로가 보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역은 전진하지 못하고 후퇴하게 될 것입니다. 무어 씨의 경우처럼 언어를 터득하여 일할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현장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는 인간의 조건하에서만 이 사역을 할 수 있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두 분과 주위에 계신 분들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프랭크 엘린우드

2013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선교기념관 2층에서 열린 양화진 선교사 추모예배에서 에비 여사(맨 오른쪽) 부부와 셔우드 홀 선교사 외손자 클리포드 킹(오른쪽에서 세 번째), 에스더재단 김현수 박사(오른쪽에서 네 번째)
▲2013년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선교기념관 2층에서 열린 양화진 선교사 추모예배에서 에비 여사(맨 오른쪽) 부부와 셔우드 홀 선교사 외손자 클리포드 킹(오른쪽에서 세 번째), 에스더재단 김현수 박사(오른쪽에서 네 번째) ⓒ에스더재단
8-2. 아서 웰본이 뉴욕 해외선교부의 엘린우드 박사에게 보낸 편지

서울, 1902년 4월 29일24)

친애하는 엘린우드 박사님,

제가 지난번 편지를 쓰고 있을 때 저희는 배천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여행은 계속되는 궂은 날씨로 인해 지체되었습니다. 2주 정도 예상했던 일정이었으나 일부는 날씨 때문에, 부분적으로는 사역의 크기 때문에 4주가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지역의 그룹들을 거의 다 방문했습니다. 아주 작은 두 그룹은 좋은 날씨라도 사흘이 걸리는 곳이어서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이 웰본 부인은 배천에 머무르면서 여성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번 여행의 주된 목적은 아니었지만 저는 세 마을에서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번 여행길에서 저는 보고된 기근과 관련하여 현장을 찾아가 사람들의 상태를 살펴보고 그들을 격려해야 했습니다. 저는 엄밀히 말해서 기근이라고 할만한 상황을 찾지 못했습니다. 즉, 아무도 식량 부족으로 굶주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음식은 매우 형편없었지만 사람들의 정신은 여전히 좋아 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갔기 때문에 우리의 사역이 그다지 확장되지는 않았지만 저는 복음이 그들의 마음을 더 강하게 붙잡고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긴박한 고통을 목격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기근 구호기금을 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밀러 씨와 에비슨 박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약간의 기금을 병원 전도사와 함께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금화 50불만 나눠주고 지난주에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다음 주에 다른 지역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그곳에는 현재 조직된 그룹이 3개뿐입니다. 약 2주 정도 머무를 예정입니다.

우리는 현재 병원에 있는 새로운 집회 장소에서 매일 밤 연합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제로 시작한 지 1주가 되었고, 적어도 1주 이상 더 계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날씨가 좋지 않아서 참석자는 적지만 분위기는 좋습니다. 기도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가운데 선이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도시 사역에 대해 많은 격려를 받고 있습니다.

저의 아내가 저와 함께 감사와 인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일에 동역하는,

아서 웰본 <계속>

[미주]
21)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선교 편지와 보고서 1833~1911”, 마이크로필름,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Graphic Microfilm Corp., 1953~1965, Reel #280, Vol. 232, #23.
22) 배천(白川), 조선 초기에는 백주(白州)로 불렸다. 배천의 ‘배’자는 백주의 ‘백’자를 옮겨 쓰면서 ‘ㄱ’이 빠진 것으로 전해진다. 오늘날 황해남도의 동남쪽 끝에서 예성강의 하류에 접해 있는 군으로, 아서 선교사가 서울 선교부에서 배천으로 순행을 다녀오려면 거의 한 달이 걸렸다.
23)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선교 편지와 보고서 1833~1911”, 마이크로필름,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Graphic Microfilm Corp., 1953~1965, Reel #224, Vol. 33, #146.
24)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선교 편지와 보고서 1833~1911”, 마이크로필름,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Graphic Microfilm Corp., 1953~1965, Reel #280, Vol. 232, #37.

글=프리실라 웰본 에비
엮은이=김현수 박사
미주 추가=리진만 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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