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웰본 선교사는 1900년 내한하여 황해도 배천, 강원 원주와 경북 안동, 영주, 문경, 상주, 봉화, 대구 등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누비며 오지에 복음을 전한 개척 선교사다. 순회 전도 시에는 평균 1천 리 길을 여행하며 ‘길 위의 전도자’로 불렸던 웰본 선교사는 일각에서 1903년 원산 부흥운동에 앞서 배천에서 부흥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아서 웰본의 한국 선교 기록을 통해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으로 양반과 평민 등 계층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의 발자취를 함께 따라가 보려 한다. <편집자 주>

아서 웰본과 새디 웰본 선교사 부부와 자녀들
▲아서 웰본과 새디 웰본 선교사 부부와 자녀들
Ⅺ. 뉴욕 해외선교부의 엘린우드 박사가 서울의 아서 웰본에게 보낸 편지

1902년 10월 22일29)

친애하는 웰본 씨,

당신이 웰본 부인과 함께 북부 관할 구역을 다녀온 여행에 대한 9월 3일 자 편지를 잘 받아보았습니다. 나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이 여행의 모든 세부 사항을 읽었지만 항목별로 다 답신할 수는 없습니다. 강원 사역과 관련해서 상태가 나쁘다고 하는 부분이 당신의 노고의 일부를 그림자에 가리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곳의 관리가 잘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캐나다 형제들과 남감리교 형제들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소식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는 공의회가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남감리교 형제들이 공의회에 참석한다면 좀 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도시 교회의 상황이 조금 나아져서 기쁩니다. 모든 공동체에 있어야 할 것은 성령의 세례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베푸시는 진정한 세례, 무감각한 자들을 깨우치고 서로를 향한 형제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진정한 부흥입니다.

말씀하신 휴게가옥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공감합니다. 때때로 선교부에 제출되는 건축 요구사항의 큰 범주에서 이러한 작은 항목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얻지 못합니다. 아니 당연히 받아야 할 예산을 받지 못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요청들이 충분히 강하게 제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집약적이고도 매우 유용한,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휴게가옥보다 선교부를 더 강하게 장악해야 하는 구조적 성격의 일은 없습니다.

그러한 목적의 특별 기금에 관한 일반적인 견해에 대해 빈튼 박사가 과연 옳은지 의심스럽습니다. 한두 번 이런 것이 제안되었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선교부는 그러한 조건을 만들지 않습니다. 선교부 회의에서 들은 바와 같이 이런 종류의 많은 어려움들이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프랭크 엘린우드

조선시대 강가의 어촌의 모습
▲조선시대 강가의 어촌의 모습 ⓒ『아서 한국에 가다』
Ⅻ. 미국에 있는 웰본가 친구들과 후원자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1902년 10월 배천 여행 이후 작성된 편지

우리의 배천 여행

배천은 서울에서 230리 떨어져 있고 그곳에 가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사흘 동안 가마를 타고 육로로 갈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갈 때 저는 타고 웰본 씨는 걸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해주까지 증기선을 타고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방법을 경험해 보았는데, 먼저 기차로 제물포까지 30마일을 가야 합니다. 그리고 배가 떠날 준비가 될 때까지 그곳에서 기다렸다가 한국인, 일본인, 때로는 중국인들과 함께 타고 갑니다. 만약 날씨가 나쁘면 좁은 선실에서 매우 불쾌하게 가야 합니다. 송도에서 내린 다음 거기서 또 가마꾼과 말을 기다립니다. 배천은 거기서부터 육로로 70리입니다. 그밖에 집에서 출발하여 강에서 한국 화물선이나 쌀을 나르는 배를 타고 배천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곳까지 조류를 타고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날씨가 좋을 때만 가능하고 장마철이나 춥고 얼음이 어는 겨울에는 불가능합니다.

처음에는 육로로 갈 계획이었으나 가마꾼들이 너무 비싼 임금을 요구하는 바람에 강에서 배를 타고 가기로 했습니다. 조사를 강나루로 보내 2~3일 정도 쓸 수 있는 배편을 알아보았는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웰본 씨는 우리 짐이 모두 강가에서 대비하고 있으면 배를 더 잘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고, 그래서 우리는 10월 16일 정오에 출발했습니다. 웰본 씨와 그의 조사는 남대문에서 전차를 탔습니다. 저는 가마를 탔고, 짐꾼들이 제 뒤를 따랐습니다. 전날 밤에 폭우가 내렸기 때문에 맑은 날씨였으나 춥고 바람이 불었습니다. 뱃값을 흥정하는 데 두 시간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웰본 씨가 제 가마꾼들과 짐꾼들에게 말했습니다. “자, 갑시다. 10리 아래 있는 부두에 가면 반드시 좋은 배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자 뱃사공들이 모두 관심을 보였습니다. 담뱃대는 옆으로 치워졌고, 그들은 요구했던 액수보다 절반 정도 싼 가격에 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국인들과 거래하는 일은 매우 피곤합니다.

그렇게 고생스럽게 얻은 배는 자랑할 것이 못 되었습니다. 제가 가마에서 기다리는 동안 뱃사람들은 배를 준비했습니다. 바가지로 물을 퍼내고, 기둥을 가로놓고, 멍석을 깔았습니다. 이 멍석은 적어도 배의 흙투성이 바닥보다는 축축하지 않고 차갑지 않았습니다. 우리 짐상자들과 돛대 사이에 겨우 간이침대를 놓을 공간이 있었는데, 거적을 그 주위에 매달고 위에도 덮어서 바람과 강 안개를 막았습니다. 선실 중앙 돛대 아래에서는 똑바로 앉을 수 있지만 그곳을 벗어나면 지붕이 머리 위로 떨어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낙희가 숯불을 피웠고 우리는 어두워지기 전에 저녁을 준비했습니다.

조수가 바뀌고 보름달이 뜨자 우리는 출발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그 무엇도 뱃사공들을 재촉할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여행에 쓸 쌀을 사러 갔고, 다음 사람은 석탄을 사러 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찾으러 낙희를 보냈고, 나중에는 그들 모두를 데려오도록 조사를 보내야 했습니다. 뱃사공이 조사에게 물었습니다. “저 대인은 이 배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증기선으로 생각하나 보지요? 우리가 바람과 조수를 기다려야 한다는 걸 모르나요?” “그렇소”라고 조사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두 시간 전에 조수가 들어오기를 기다린다고 했고, 그다음에는 바람이 강하다고 했소. 그리고 지금은 조수가 빠져나가고 있고, 바람도 가라앉았소. 달빛도 이리 맑은데 무엇이 더 필요한 거요? 목사님의 일은 시급하단 말이요.”

“알겠소. 이 담배를 다 피우는 대로 출발하겠소.” 9시가 되어 우리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을 때 마지막 담배 연기가 한 입 빨아들여졌고 우리의 작은 배가 강 가운데로 밀려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는 밤새도록 뱃사공들이 지나가는 배를 향해 서로 인사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디서 오는 길이요?”, “어디로 가는 길이요?”, “무엇을 싣고 있소?”

웰본 선교사가 내륙으로 가기 위해 탄 배는 이와 비슷한 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웰본 선교사가 내륙으로 가기 위해 탄 배는 이와 비슷한 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침에 지붕의 거적을 들치고 바깥을 내다보았을 때 저는 이 배가 가는 길에 있는 많은 섬들 중 하나의 둑에 묶여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밥을 지어 먹고 싶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배를 묶어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한 사람이 요리를 하고 다른 사람은 배를 관리하면 좋겠는데, 그것은 한국의 관습이 아닙니다. 가능한 한 적게 일하고 되도록이면 많이 쉬는 것이 주요 목적입니다.

날씨가 좋았고 우리가 다시 떠날 무렵에는 바람을 쐴 수 있을 만큼 쾌적했습니다. 우리는 돛대 옆에 앉을 자리를 마련했고, 웰본 씨는 조사와 함께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저도 조금 배우기는 했으나 저의 관심은 대부분 주위의 풍경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강은 양쪽으로 본토와 섬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 섬들에는 오래된 성곽과 그림 같은 돌문, 그리고 여기저기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강에는 기이한 배들이 있는데 모두 우리 배 못지않게 볼품이 없습니다. 웰본 씨는 제가 상자에 포장한 것을 제외하면 배 안에 쇳조각이라곤 못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나무판은 열장이음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우리가 못이나 철제 스파이크를 사용하는 곳에는 나무 핀이 대신 사용됩니다. 정말로 신기한 것은 돛입니다. 거적을 여러 조각 이어서 새끼줄로 가벼운 기둥에 묶어 놓았습니다. 돛을 올리는 것은 항해에서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우리는 송도항을 지나 그 부근에 있는 바다를 조금 통과한 후 강의 다른 지류로 올라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끝없이 이어진 갯벌을 지나갔는데, 그곳에 갇히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해야 했습니다. 조류는 다시 우리에게 유리하게 바뀌었고 이제 만조였습니다. 우리는 배천 근처로 우리를 데려다 줄 좁은 해협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두 뱃사공 모두 길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강 건너편에서 수로를 본 적이 있는 웰본 씨는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선장처럼 돛대 옆에 서서 배의 주인처럼 모든 것을 조사했습니다. 수로 입구를 찾아 그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정말 신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방향을 바꾸자 강한 조수가 우리를 밀어 넣어 주었고, 나머지 오후 시간은 배가 바위와 갯벌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인들이 모두 장대를 손에 들고 일하면서 보냈습니다.

정오에 폭풍우가 몰아쳤으나 모든 것이 다시 맑아졌고, 해 질 녘에 배에서 내리자 달이 언덕 위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짐이 해변으로 옮겨지고 그것을 마을로 운반해 줄 짐꾼들을 구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사를 보내서 우리가 온다는 것을 알리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짐을 처리하도록 낙희를 남겨 놓고 웰본 씨와 저는 걸어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잘 닦인 10리(3마일) 길이었고, 운동이 필요했습니다. 마을에 다가가자 김 조사가 서둘러 우리를 만나러 왔고 아이들이 길가에 늘어서서 “목사님과 사모님이 오셨다”고 외쳤습니다30). 조사가 우리보다 그리 일찍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방은 한동안 불을 지피지 않아서 춥고 습했습니다. 연기를 마시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고, 눈과 목은 곧 지난 2월과 3월에 그곳에서 보낸 날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교인들이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왔고, 그들 가운데 있는 옛 친구들을 만나서 즐거웠습니다. 8시가 되어서야 모든 것이 얼마만큼 정리되어 저녁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날은 마을에 장이 서는 날이었고 모두 너무 바빴기 때문에 저녁까지 모임을 갖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조사들과 긴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의 사역에 대한 보고를 들었으며, 여행 계획을 세웠습니다.

토요일 아침에는 제가 여인들과 공부를 하는 동안 웰본 씨는 세례와 학습을 받을 후보자들을 심사했습니다. 저녁 모임은 성찬식을 위한 준비였습니다. 여러 명의 여인들이 저를 보기 위해 한 명씩 찾아왔는데, 그것은 제가 그들과 만날 때 선호하는 방법입니다. 지난봄에 제가 글을 배우라고 권했던 젊은 여성이 공부를 잘 시작한 것을 보고 저는 무척 기뻤습니다. 이제 그녀는 스스로 찬송가를 찾아 읽으며, 성경공부 시간에 신약성경에서 구절을 찾아 따라 읽을 수 있습니다. 지난봄에 그녀는 남편이 그녀를 가르치려고 시도했지만 절망하여 머리가 너무 나쁘다며 포기했다고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비웃으며 누군가에게 한글 자모를 써 달라고 해서 그 종이를 물그릇에 담아 그 물을 마시라고 조언했답니다. 그것만이 그녀 안에 배운 것을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선언했답니다. 그녀는 제가 본 여인들 중 가장 매력적이고 예쁜 사람 중 하나입니다. 나이는 24살이고, 여섯 살 된 딸이 하나 있습니다. 문성이는 사랑스럽고 행복하고 착한 소녀입니다. 교회 예배 시간에 제 옆에 앉는 것을 좋아하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계속>

[미주]
29)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선교 편지와 보고서 1833~1911”, 마이크로필름,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Graphic Microfilm Corp., 1953~1965, Reel #283, Vol. 242, #49.
30) 한국 장로교회 첫 목사 안수는 독노회에서 1907년 9월 17일 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거행되었다. 당시 조선인들에게는 선교사라는 호칭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목사라는 호칭은 선교사를 의미했다.

글=프리실라 웰본 에비
엮은이=김현수 박사
미주 추가=리진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