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웰본 선교사는 1900년 내한하여 황해도 배천, 강원 원주와 경북 안동, 영주, 문경, 상주, 봉화, 대구 등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누비며 오지에 복음을 전한 개척 선교사다. 순회 전도 시에는 평균 1천 리 길을 여행하며 ‘길 위의 전도자’로 불렸던 웰본 선교사는 일각에서 1903년 원산 부흥운동에 앞서 배천에서 부흥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아서 웰본의 한국 선교 기록을 통해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으로 양반과 평민 등 계층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의 발자취를 함께 따라가 보려 한다. <편집자 주>

Ⅳ. 아서 웰본과 새디 선교사 일기

다음 글들은 아서 웰본 선교사가 결혼하기 전 새디 선교사를 방문하기 위해 남쪽 지방을 여행할 때 쓴 지방 여행 일기의 처음 부분으로, 새디 선교사의 기록과 섞여 있다.

아서 웰본과 새디 웰본
▲왼쪽부터 아서 웰본과 새디 웰본
1901년 5월

아서의 일기 5월 9일 – 오늘 10시 30분에 동소문을 통해 서울을 떠났다. 12시가 되기 전에 강을 건넜다. 10리 정도 간 다음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30리를 갔는데, 10리 정도를 제외하고는 전부 걸어서 갔다. 조용한 여정이었다.

아서의 일기 5월 10일 – 꽤 잘 잤으나 비가 조금 내려서 8시가 넘어서야 출발했다. 아침에 처음으로 말에서 떨어졌다. 험한 길에서 짐도 떨어졌으나 짐이 상한 것 외에는 부상을 입지 않았다. 30리를 가서 점심을 먹기 위해 잠시 멈췄다. 오후에는 비가 많이 올 것이라는 경고에 30리 밖에 가지 못했다. 비는 오지 않았다. 새로 지어진 방에 숙소를 정했으나 몹시 시끄러웠다. 10시, 12시 45분, 2시 45분에 시계를 보았다. 그런 다음 일어나서 다소 어려웠지만 모두를 깨울 수 있었다.

새디의 일기 5월 11일 – 비가 내린다. 여행용 회색 드레스의 단을 늘이고 있다. 집에서 우편물이 왔다. 아버지께서 로이와 미니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고 쓰셨다. 새 목사님께서 산타아나에 오셨는데, 부인이 나와 닮았다고 한다. 보이를 데리고 한참을 걸어서 거북이 언덕과 선바위(Standing Rock)까지 갔다. 몇몇 어린 소녀들이 따라왔다. 종달새 소리를 듣고 습지에서 몇 마리의 새끼를 주워 다시 바위 위에 올려놓았다. 늦게 핀 제비꽃과 앵초와 붓꽃을 꺾어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젊은 새댁을 방문했다.

아서의 일기 5월 11일 – 5시 30분에 출발했다. 40리쯤에서 우리는 밀러(Mr. Miller)19) 씨를 만났다. 그때 점심을 먹고 간혹 비를 맞기도 하면서 40리를 왔다. 그때 비가 너무 많이 내렸고, 20리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벌써 6시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일정을 멈추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온종일 걸어서 이동했다.

대한국 외부(外部)에서 1900년 11월 7일 발행한 아서 웰본의 여행 허가서. 개항기 이후 대한국을 여행하고자 하는 외국인들은 통리기무아문에서 여행 허가서인 ‘호조’(護照)를 받아야 했다.
▲대한국 외부(外部)에서 1900년 11월 7일 발행한 아서 웰본의 여행 허가서. 개항기 이후 대한국을 여행하고자 하는 외국인들은 통리기무아문에서 여행 허가서인 ‘호조’(護照)를 받아야 했다. ⓒ『아서 한국에 가다』
새디의 일기 5월 12일 – 시골 여인들이 방문을 했다. 한 여인은 책을 사기 위해 130리를 걸어서 왔다. 아담스 부인과 자녀들 그리고 보이와 함께 산책을 갔다. 많은 구경꾼이 따라와서 언덕까지 갈 수 없었다.

아서의 일기 5월 12일 – 주일을 이곳에서 머물렀다. 아침에 비가 와서 밀러 씨를 방문하려고 했던 마을로 가지 않았다. 오후에 걸어갔으나 그는 이미 남쪽으로 130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새디의 일기 5월 13일 – 아침 6시 전에 웰본 씨가 보낸 편지가 왔다. 20일쯤 되어야 올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마루에 앉아서 아담스 부인과 수선을 했다.

아서의 일기 5월 13일 – 오늘 아침 우리는 남쪽으로 여행을 계속했다. 밀러 씨에게 이번에는 만날 수 없다고 전갈을 보냈다. 6시 30분에 출발해서 12시가 조금 넘을 때까지 60리를 갔다. 나는 말을 타지 않았다. 정오부터 약 2시간 정도 멈추었다. 오후에는 약 10리를 타고 30리를 걸었다. 내가 본 것 중 가장 좋은 농경지를 통과했다. 골짜기는 길이가 약 25~30리, 폭은 3~4리 정도였으며, 아주 비옥한 땅으로 농작물이 실해 보였다. 집들이 좀 더 좋았고, 사람들은 다른 곳과 거의 비슷했다. 오늘 아침 언덕에서 금(gold)이 있는 징후를 보았다. 오후 내내 작은 시내를 따라가다 밤에는 제법 넓은 강을 건너 강기슭에서 머물렀다.

아서의 일기 5월 14일 – 아침 6시 30분에 출발했다. 우리가 간 길은 작은 계곡으로 나 있었는데, 그 길은 계속 좁아져서 나중에는 산비탈로 겨우 지나갈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작은 협곡을 넘어 우리는 다른 골짜기에 다다랐다.(너무 피곤해서 글을 쓸 수가 없다.)

장로교 소년학교
▲장로교 소년학교. 교육은 장로교 선교의 핵심 가치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선교 활동의 첫 번째 목록에 포함되었다. ⓒ『아서 한국에 가다』
Ⅴ. 아서 웰본 선교사 편지

아서 웰본이 대구 방문 후 뉴욕 해외선교부의 엘린우드 박사(Dr. Ellinwood)에게 보낸 편지 일부

서울, 1901년 6월 15일20)

친애하는 엘린우드 박사님,

이곳에 온 후로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고 특별히 보고드릴 일도 없어서 그동안 편지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브라운 박사님(Dr. Brown)의 방문은 해외선교부 비서께서 우리의 소식을 가끔 듣고 싶어 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그분의 방문은 저희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상호 관심사에 대해 많은 질문을 논의함으로써 저희는 선교부와 더 가까운 관계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도착한 이래로 언어와 사역, 이곳 사람들과 이 나라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정말로 바쁘게 지냈습니다. 한 선배 선교사님과 지방여행을 세 차례 다녀왔고, 한 번은 혼자서 다녀왔는데 모두 합치면 뉴욕에서 시카고까지의 거리보다 더 먼 거리라고 들었습니다. 백인을 본 적이 없거나 기독교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여러 마을에도 다녀왔습니다. 그 여행은 저로 하여금 한국어를 할 수 있는 때를 간절히 사모하게 했습니다.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소책자를 팔고 누군가를 시켜 늘 모여드는 무리에게 선택된 성경구절을 읽어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방 여행을 아주 잘 견뎌내고 있습니다.

혼자 여행하는 동안 31일 만에 가장 험난한 길을 700마일 정도 걸었습니다.(기록의 끝)

장로교 공의회
▲장로교 공의회(The Presbyterian Council) 73, 한국의 모든 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는 회원들로 구성된 1901년 장로회 회의에서 찍은 사진이다. 뒤쪽의 건물은 서울 파고다 공원 근처에 있는 구 YMCA 건물이다. ⓒ『아서 한국에 가다』
Ⅵ. 아서 웰본 선교사 연례보고서

1901년 6월 30일

저의 첫해는 10월 말에 시작되었습니다. 11월과 12월은 언어 공부를 하며 서울 사역과 사역자들을 알아가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1월 첫째 주에 저는 무어(Mr. Moore) 씨와 함께 언어선생을 데리고 배천(북서쪽으로 80마일)으로 갔습니다. 신학반에 참여하고, 일부 시골 사역을 돌아보고, 순회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열흘 동안 말씀을 공부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열심과 진지함을 보고 매 회기마다 성령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매우 기뻤습니다. 시골 사역을 보는 것은 고무적이고 자극적이었습니다.

사역과 관련된 선교사의 문제점들이 제시되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날씨가 추워지고 길이 험했지만 시골 여행은 예상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국 여관의 숙박 시설은 서양인들이 호화롭다고 부르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서울로 돌아온 후 언어 공부는 훨씬 더 쉽고 즐겁게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2월 언더우드 박사님과 함께 11일간의 여행을 했는데, 입교 후보자 시험이 주된 특징이었습니다. 네 개의 마을을 방문하여 140명을 문답했는데, 그중 일부는 60세 이상이었습니다. 영감을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3월 중순쯤 무어 씨는 저에게 처음과 거의 같은 거리와 기간의 여행을 한 번 더 가자고 했습니다. 그 여행은 대체로 새로운 지역을 순회하는 것이었습니다. 방문한 많은 마을은 선교사가 들어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기까지 닥칠 수 있는 몇 가지 심각한 어려움이 지적되었습니다. 두 개의 소그룹이 조직되었습니다. 따라서 영구적인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배우고 싶어하는 것 같았고 가는 곳마다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미래 사역에 대한 전망은 참으로 매우 밝아 보였고, 이 사람들에게 제가 그들의 언어로 놀라운 생명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때를 그리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저는 작은 사고를 당했고, 그 사고로 인해 무릎을 다쳐 한 달 넘게 방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어공부는 가능한 한 계속되었습니다.

5월 초에는 혼자서 남쪽과 동쪽으로 여행을 떠나 대구 내륙 지부에 있는 형제들을 방문했고, 그들의 사역과 성벽 밖에 사택을 지을 새 부지를 둘러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동해안으로 건너갔다가 그곳에서 해안 길을 따라 북쪽으로 서울이 있는 위도까지 올라간 뒤 서쪽으로 가로질러 집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한 달 만에 걸어서 약 2천 리를 여행했습니다. 저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산천을 보았고, 더러 소책자를 팔면서 많은 사람에게 처음으로 백인을 보게 해주었으며, 내륙여행을 할 때 어떻게 지낼 수 있는지에 대한 상당한 경험을 했습니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는 불우아동의 집(Home for Destitute Children)을 각각 2주 동안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은 이들 중 한 명으로서 섬겼습니다. 감독이 병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6주간의 휴가를 냈기 때문입니다. 저는 2주가 아닌 4주 동안 그곳에 있으면서 비록 언어공부는 많이 하지 못했지만, 한국 아동들을 배우고 그들 가운데서 행해지는 보호시설 사역에 대해 배웠습니다.

정규 언어공부를 벗어나 많은 시간을 보낸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모든 것이 유익했다고 믿습니다.

정중히 제출하며,
아서 웰본 <계속>

[미주]
19) 언더우드 박사의 비서. 그는 언더우드 박사가 만든 한국어 신문 ‘그리스도신문’에 실을 소식을 모으기 위해 출장 중이었다.
20)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 “선교 편지와 보고서 1833~1911”, 마이크로필름,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Graphic Microfilm Corp., 1953~1965, Reel #280, Vol. 231(Part 1), #68

글=프리실라 웰본 에비
엮은이=김현수 박사
미주 추가=리진만 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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