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웰본 선교사는 1900년 내한하여 황해도 배천, 강원 원주와 경북 안동, 영주, 문경, 상주, 봉화, 대구 등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누비며 오지에 복음을 전한 개척 선교사다. 순회 전도 시에는 평균 1천 리 길을 여행하며 ‘길 위의 전도자’로 불렸던 웰본 선교사는 일각에서 1903년 원산 부흥운동에 앞서 배천에서 부흥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아서 웰본의 한국 선교 기록을 통해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으로 양반과 평민 등 계층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의 발자취를 함께 따라가 보려 한다. <편집자 주>

(지난 회에 이어)

감바위 사람들은 우리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우리에게 작은 집을 내주었습니다. 그 집에 사는 젊은 남자와 그의 아내는 언덕 아래 마을에 머물렀습니다. 다른 집들보다 더 새집이고 깨끗한 그 집은 산비탈에 따로 서 있었습니다. 다른 집들은 논들이 있는 저지대에 있었습니다. 우리를 위한 8×8피트짜리 안방이 있었고, 바깥에는 요리를 할 수 있는 방과 하인들이 잘 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엌 아래쪽으로는 제가 기어들어 갈 수 있을 만큼 큰 장독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물항아리였고, 어떤 것은 김치와 곡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당에 있는 곳간에는 겨울에 쓸 장작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전체적으로 한국의 대부분의 집들보다 더 가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1902년 혹은 1903년 장로교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X표시가 된 두 사람이 새디와 아서 웰본
▲1902년 혹은 1903년 장로교 선교사 연례회의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 X표시가 된 두 사람이 새디와 아서 웰본 ⓒ『아서 한국에 가다』

그날 밤 언덕 아래에 있는 큰 집에서 좋은 만남을 가졌습니다. 방들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매우 따뜻했습니다. 김 조사가 “돌을 굴려내는 것”(Rolling Away the Stone)에 대해 좋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여인들과 약간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음 날은 9시에 아침예배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김 조사가 열왕기상 18장 40절 말씀으로 엘리야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 후 저는 여성들과 모임을 가진 뒤 학습교인 문답을 하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정오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 2시에는 오후예배를 드렸습니다. 웰본 씨가 준 원고를 가지고 김 조사가 요한복음 8장 7절 말씀으로 “죄”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그 후 저는 웰본 씨가 산책을 가자고 사람을 보낼 때까지 여인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날 저녁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밤새 비가 내렸고 다음날 정오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평소처럼 오전과 오후 모임을 가졌습니다. 오전예배 후 오분리에서 온 할머니가 공부를 하러 성경책을 가지고 제 방으로 왔습니다. 그분은 잠시 동안 저와 보냈습니다. 단둘이 있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분은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구절에 표시를 해두었고 설명을 원했습니다. 이 지역 여성들은 3년 동안 여자 선교사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후 6시에 웰본 씨와 김 조사 그리고 낙희는 밤을 보내기 위해 10리 떨어진 해주곶(Haiju Point)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설교를 하고 성찬식을 집행했습니다. 그곳은 썰물 때만 갈 수 있고, 웰본 씨는 물과 갯벌을 건너기 위해 제 의자형 가마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웰본 씨가 떠나자마자 오분리 할머니가 공부를 하러 왔고, 불쌍한 차화는 어떻게 요리를 해야 할지 몰라 걱정을 했습니다. 그는 제가 나와서 조금만 알려주면 저에게 저녁을 차려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그냥 최선을 다해 보라고 했고, 잠시 후 그는 약간의 빵과 버터, 달걀과 삶은 밤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제가 저녁을 먹자마자 그 할머니가 다시 와서 다른 여인들이 저녁 모임을 위해 모일 준비가 될 때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여인들 중 몇 명은 특별 공부와 기도를 위해 늦게까지 제 방에 머물렀습니다. 여성들은 배우려는 열정이 거의 없기 때문에 오분리에서 온 여인들은 저를 매우 흥미롭게 했습니다. 평양 외곽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부를 하도록 권고를 받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이 이곳 사역을 힘들고 실망스럽게 합니다.

해주곶에 갔던 일행은 이른 아침 썰물 때 돌아왔습니다. 차화가 길에 나가 보고 있다가 제가 숯불로 오트밀을 만들고 있을 때 “목사님이 오십니다”라고 소리쳤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논을 가로질러 오고 있는 그를 차화가 본 것입니다. 우리 두 사람에게 아버지 같은 관심을 가진 이 노인은 바깥에 모인 한국인들에게 약간의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여행을 잘하는 한국인들도 웰본 씨의 걸음걸이에 대해 크게 감탄한다고 공언했습니다.

일제가 제작해 판매한 개화기 시골집 풍경 엽서. 소년들은 머리를 길게 땋았다.
▲일제가 제작해 판매한 개화기 시골집 풍경 엽서. 소년들은 머리를 길게 땋았다. ⓒ『아서 한국에 가다』
우리는 7시 30분에 아침을 먹고 아침 기도회와 짧은 모임을 가진 후 10시에 떠났습니다. 낙희를 우리가 주일을 보낼 바라개(Parakai)로 짐과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학골로 둘러 갔습니다. 점심을 먹기 전에 저는 여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온종일 밭에서 일하는 한 여인이 그녀가 어떻게 글을 배우고 있으며 찬송과 성경구절을 외우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소년이 밤에 찬송가를 읽어주면 그녀는 나무를 하러 산에 가거나 일을 하러 밭에 갈 때 그것들을 익힐 때까지 계속 반복합니다. 우리는 올봄에 지은 새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건물이 다 완성되지 않아서 아직 마루가 없습니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었던 탓에 웰본 씨와 김 조사는 심한 감기에 걸렸습니다. 우리는 그날 겨우 30리밖에 오지 않았지만 바라개에 늦게 도착했습니다. 차가운 북풍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따뜻한 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기뻤습니다. 조용하고 안락한 방 한 칸짜리 집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방의 절반은 곡식, 쌀, 기장, 콩, 호박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것은 한국인들이 얇은 벽 건너편에서 밤늦도록 이야기하는 것만큼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평소처럼 저녁예배를 드렸습니다.

다음 날 아침 저는 “틈틈이” 낙희가 빵을 굽는 것을 도왔습니다. 따뜻한 한국식 방바닥은 추운 날씨에 빵을 부풀리기에 안성맞춤이지만 우리 양철 오븐은 아주 작은 것이라서 집에서 하는 토요일 베이킹은 아니었습니다. 오전 설교 후 웰본 씨가 남자들을 위해 문답을 하는 동안 저는 정오까지 여인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오후 2시 예배에 이어 여성을 위한 문답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시험을 치르는 동안 방에 같이 있었고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다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잠시 언덕으로 산책을 갔습니다.

주일은 맑고 따뜻한 아름다운 날이었습니다. 다른 마을 세 곳에서 신자들이 와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바라개에는 아직 예배당이 없습니다. 우리는 8×10피트 크기의 방이 있는 가장 큰 집에서 모였습니다. 여인들이 그 방을 사용했고 남자들은 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았습니다. 이런 농가의 마당은 종종 한두 마리의 소가 있는 헛간이나 외양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닭장, 돼지우리가 되기도 합니다. 웰본 씨의 강단 장식은 고향에 있는 목회자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머리 위에는 종자로 쓸 쌀단과 기장단이 먼지와 거미줄에 덮인 채 매달려 있고, 옆에는 소나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웰본 씨가 야외에서 모임을 진행할 수 있을 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여인들과 아기들로 붐비는 더운 방에서 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아침예배가 끝난 후 저는 정오까지 여인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2시에는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약 60명의 남녀가 참석했습니다. 그 후 웰본 씨가 남자들과 만나는 동안 저는 여인들을 다시 만났습니다. 방문객들이 떠날 채비를 마쳤을 때 우리도 그들과 함께 조금 걸어 나갔습니다. 저녁예배 전에 잠시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길고 바쁜 하루였습니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 9시 30분에 떠났습니다. 낙희와 짐을 밤에 묵을 장소로 보냈습니다. 가는 길에 산포물(San Pou Mul)에 있는 새 교회에 잠시 들러 짧은 모임을 가졌습니다. 깔끔하고 아담한 예배당이었지만 신자가 적고 사역은 고무적이지 않았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다시 사나밭을 지나야 했고 그곳에서 늦은 점심과 작은 모임을 가졌습니다. 바쁜 수확기였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밭에 나가 일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바다 근처의 평야에 내려와 있었습니다. 해 질 녘에 우리는 넓은 습지대를 지나왔는데 논으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높은 둑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 늪은 야생 거위와 오리가 먹이를 찾는 장소였습니다. 수천 마리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나가자 그들은 구름떼같이 일어났습니다. 미국 사냥꾼들이라면 거기서 정말 즐거운 시간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 새들은 총을 자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왜 이것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120여 년 전 아서 선교사 부부가 탔던 의자형 가마는 이같이 덮개가 없는 형태였다.
▲120여 년 전 아서 선교사 부부가 탔던 의자형 가마는 이같이 덮개가 없는 형태였다.
그날 30리를 가서 동머리(Tong Murdie)에서 멈췄습니다. 저녁 모임을 가졌습니다. 서울에서 살던 두 가족이 이곳에 살고 있는데 다시 만나게 되어 기뻤습니다. 이 평야에는 집이 6채 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음 날은 그다지 바쁘지 않았습니다. 통상적인 오전과 오후 모임 외에도 여성들과 아이들과의 모임을 가졌습니다. 저녁식사 전에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웰본 씨가 논두렁에 빠져 무릎을 다쳤는데 전에 다친 바로 그 무릎이었습니다. 제가 집으로 가서 제 의자형 가마를 보낼 때까지 웰본 씨는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습니다. 상당히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저녁에 성찬식을 집행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웰본 씨가 의자형 가마를 타고 가야 했기 때문에 저는 연안(Yun An)까지 20리를 걸어갔습니다. 그곳은 성벽이 있는 큰 마을로 관찰사 소재지였고, 그곳에서 가마와 더 많은 가마꾼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연안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동머리 집회에 왔던 작은 기독교인 단체를 보기 위해 대사물(Tesamul)에 들렀습니다. 가마꾼이 두 명밖에 없어서 웰본 씨가 탄 가마는 뒤로 처졌고 차화와 제가 그들보다 앞섰습니다. 연안에서 조사가 웰본 씨를 위해 가마꾼 네 명과 제가 탈 가마를 구했습니다. 춥고 바람이 부는 날이어서 한국 가마를 타고 가는 것이 피곤했기 때문에 저는 오후 대부분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평산까지 40리를 갔습니다. 도착했을 때는 늦은 시각이었고 우리는 매우 차가운 방에 들어야 했습니다. 이곳 사역은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지난 몇 년간의 기근 때문에 몇몇 사람들이 이사를 갔고 남은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은 밀로 소주를 만들어 장날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파는 술장수가 되었습니다. 밀은 한국 음식에서 아주 작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이것은 주로 술을 만드는 데 사용됩니다.

여기 사는 여인 중 하나가 저녁 모임이 끝날 무렵 깊이 회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녀는 이제부터 주일에 예전처럼 모여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기도회를 마친 후 우리는 그들을 떠나 많은 신자들이 있는 금하리(Kum Hardie)까지 30리를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있는 작은 방 한구석에 커튼을 치고 지냈습니다.

저녁예배를 드리기 전에 후보자들을 위해 시험을 치렀고, 예배는 성찬식으로 끝났습니다. 우리를 위해 일했던 남자가 이곳에 살고 있는데 그는 나에게 아내를 소개하고 그의 작은 집을 보여주면서 무척 기뻐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예배를 드린 후 우리는 배천 사역지의 남부 지구 순방을 마치고 배천으로 돌아갔습니다. 낙희를 짐과 함께 보낸 후 우리는 개아리(Kai Ardie)를 거쳐서 갔지만 집에 있는 교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모두 밭에서 일을 하거나 장에 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배천에서 열리는 집회에 올 수 있을 만큼 가까웠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말을 남기고 왔습니다. 우리는 그날 30리밖에 이동하지 않았고 오후 2시쯤에 배천에 도착했습니다. 걸을 수 없었던 웰본 씨는 의자형 가마에서 추위를 견뎌야 했기 때문에 심한 감기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김 조사가 저녁예배를 담당했습니다. 저는 먼저 여인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습니다.

토요일은 좀 바쁜 날이었습니다. 조사들을 위한 사역을 계획하고, 찾아온 사람들을 만나고, 오후에는 가정 방문을 했습니다. 예전에 벤추라 “자원 사역자”(Willing Workers) 단체에서 보내준 씨앗을 조금 나눠준 적이 있는 김씨 부인이 잠깐 그녀의 집에 와서 꽃을 봐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늦은 시기였지만 한련31)이 흙담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주일은 조용하고 쾌적한 날이었고, 이전과 같이 다른 마을에서 몇 사람이 왔습니다. 월요일에는 다음 날 배천 북서쪽으로 2주간의 여행을 떠날 계획을 세웠습니다. 2주간에 걸친 여행이 될 것입니다. 그날 오후 김 조사와 웰본 씨는 저녁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10리 밖에 있는 찰더미(Chardimie)로 갔습니다. 그리고 10시쯤 비를 맞으며 돌아왔습니다.

다음 2주간에 대해서는 다시 전해드리겠습니다.

진심으로,

새디 누스 웰본 <계속>

[미주]
31) 한련화(旱蓮花, nasturtium). 페루, 콜롬비아, 브라질 등의 남미 원산으로 봄에 씨를 뿌려 초여름부터 가을까지 꽃을 볼 수 있는 한해살이 화초다. 연꽃잎처럼 생긴 잎을 가지고 있으며, 노랑, 오렌지, 분홍, 진홍색 등 다채로운 색상의 꽃이 피는데, 황금색의 아름다움을 기려 금련화라고도 부른다.

글=프리실라 웰본 에비
엮은이=김현수 박사
미주 추가=리진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