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웰본 선교사는 1900년 내한하여 황해도 배천, 강원 원주와 경북 안동, 영주, 문경, 상주, 봉화, 대구 등 우리나라 구석구석을 누비며 오지에 복음을 전한 개척 선교사다. 순회 전도 시에는 평균 1천 리 길을 여행하며 ‘길 위의 전도자’로 불렸던 웰본 선교사는 일각에서 1903년 원산 부흥운동에 앞서 배천에서 부흥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아서 웰본의 한국 선교 기록을 통해 누구보다도 뜨거운 열정으로 양반과 평민 등 계층을 초월하여 복음을 전파했던 선교사의 발자취를 함께 따라가 보려 한다. <편집자 주>

아서 웰본(왼쪽)과 새디 웰본
▲아서 웰본(왼쪽)과 새디 웰본

Ⅻ. 미국에 있는 웰본가 친구들과 후원자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1902년 10월 배천 여행 이후 작성된 편지

(지난 회에 이어)

지난봄에 제가 관심을 갖게 된 여인이 또 한 명 있습니다. 그녀는 보통 한국 여성들보다 더 크고 곧은 몸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한국인의 눈에는 아름답지 않지만 저는 그녀의 소박한 믿음과 현재의 진지한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녀에게는 두 살배기 딸이 있는데 매우 통통하고 건강해 보이며 보조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아기가 따뜻한 바닥에서 제 치마에 닿을 때까지 굴러와서 다시 엄마에게로 굴러가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즐거웠는지요. 어느 주일에 그 아기는 이가 나고 있어서 아플 텐데도 제 머리핀 하나를 가지고 놀면서 예배 시간 절반이 지나도록 조용했습니다.

“아기 이름이 뭐예요?” 어머니에게 묻자 그녀는 “이름이 없어요. 그냥 아가라고 부르거나 돼지 혹은 장대라고 불러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예, 그것은 이교도들이 자식들에게 지어준 이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악령이 아이들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도요.” 그러자 그녀가 부탁했습니다. “이 아이에게 예쁜 기독교 이름을 지어주세요. 이 아이가 마지막이에요. 저는 10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모두 이 아이만 할 때 죽었어요.” “그렇다면 이 아이는 소중해요. 보배라고 불러요. 저는 이 이름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을 몇 명 알고 있어요.” 그 어머니는 매우 기뻐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아기의 지름이 지어졌습니다.

의자형 가마를 타고 이동하는 새디 선교사(1902년)
▲의자형 가마를 타고 이동하는 새디 선교사(1902년) ⓒ『아서 한국에 가다』

하지만 지난여름의 장마는 어린 보배에게 너무 힘들었습니다. 김 씨가 며칠간 공부하러 서울에 왔을 때 배천 지역 사람들은 별로 아프지도 않고 다 잘 지내고 있으며 단지 한 사람이 죽었다고 전해주었습니다. “박 목수의 아기, 딸아이였어요”라고 그가 덧붙였습니다. 그의 말은 별다른 감정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는 슬퍼하고 있으며 자신도 자녀들을 모두 땅에 묻었기 때문에 그들을 동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박 씨 부인이 모임에 올 때 어린 보배를 안거나 업지 않은 모습은 어쩐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위로의 말을 건네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어요.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천국으로 데려가셨고, 그 아이는 이제 하나님의 소중한 보석 중 하나가 되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박 씨 부인도 제가 처음 그곳을 방문한 이후에 글을 조금 배웠습니다. 그녀가 말했습니다. “지금은 어린애도 없고 시간도 더 많은데 45살이라 눈이 침침해요.” 연기와 약한 조명이 눈을 약화시키고, 한국 여성들은 바느질을 하느라 눈을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10월 19일 주일은 배천에서 보냈습니다. 20~30리 떨어진 인근 마을에서 여러 명의 신자들이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아침에는 찬송가 수업과 주일학교가 있었습니다. 황금률을 완벽하게 아는 사람은 문성이뿐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수줍어하면서 사뿐히 일어나 소수의 성도들 앞에서 그것을 암송했습니다.

120여 년 전 대야를 파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
▲120여 년 전 대야를 파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 ⓒ『아서 한국에 가다』

2시에는 설교와 성찬식이 있었습니다. 웰본 씨가 영어나 한국어로 성찬식을 진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데 새로운 언어로 시작한다는 것이 묘하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엄숙한 모임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빵과 포도주를 준비하고 성찬 식탁을 차리는 일을 저의 임무로 삼았습니다. 여러분이 그 식탁을 보고 싶어 할지 모르겠습니다. 식탁으로는 모든 한국 가정에서 늘 볼 수 있는 평범한 밥상을 사용했는데, 높이 1피트, 너비 1.5피트입니다. 그 위에 디너 냅킨을 깔고 빵 접시, 작은 도자기 포도주잔과 보통 물잔을 놓고 다시 큰 냅킨으로 덮습니다. 우리 관할 구역에는 아직 안수받은 장로가 없기 때문에 성찬식을 집행하는 일은 모두 담당 목사에게 맡겨집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세례교인임에도 불구하고 성찬식에 참예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약간의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선교사 부부가 함께 순방할 때 얼마나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우리가 발견한 여러 가지 중 하나일 뿐입니다. 여성들이 세례문답이나 학습문답을 받으러 들어올 때마다 저는 웰본 씨와 김 조사, 전 조사와 함께 방에 앉아 있습니다. 그러면 심사위원들 앞에 있는 것을 어려워하는 여인을 보는데 종종 저에게 “질문해 주세요”라고 부탁을 합니다.

월요일 아침 우리는 2주 동안의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가마꾼과 짐을 나를 소를 준비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11시가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꼬마들이 멀리까지 제 가마를 따라왔습니다. 그 아이들은 그렇게 달리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얼마나 멀리 가는지도 모른 채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아이들에게 집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안 그러면 어머니들이 걱정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돌아섰습니다. “여행 잘 마치고 평안히 돌아오세요!”

120여 년 전 서울에서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양반의 저택 혹은 행궁으로 보인다.
▲120여 년 전 서울에서 20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양반의 저택 혹은 행궁으로 보인다. ⓒ『아서 한국에 가다』

우리는 길가에 있는 밤나무 아래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곳이었으며 구경꾼들에게 방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저를 수행하는 차화가 아랫집에서 배를 몇 개 사 왔습니다. 백발노인인 그 집 주인은 농부였는데 물 대접에 쿠키를 넣어서 돌려주자 무척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10리를 더 가서 사나밭(Sanapat)에 있는 기독교인의 집에 들렀습니다. 우리와 동행하는 한국인들은 이 작은 마을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잠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집에는 방이 하나뿐이었고, 그 집 여인들은 그들이 상류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남자들과 같은 방에 앉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래쪽 부엌에서 여인들과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들 중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무지했고 가르침보다 구경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 길에서 잠시 벗어났기 때문에 미리 낙희를 짐과 함께 그날 밤 묵기로 한 장소로 보냈습니다. 넘어야 할 언덕이 너무 많아서 저는 꽤 많이 걸었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무척 피곤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해가 지고 난 뒤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낙희가 다음 날 아침에 방문할 동네보다 20리나 더 멀리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실망을 상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낙희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실수를 한 것입니다. 내 가마 뒤에 항상 묶여 있는 등불이 켜지고 우리는 길을 떠났습니다. 우리가 오분리(Ouppunnie)에 도착했을 때는 늦은 시각이었지만 낙희가 우리를 위해 교회 사랑방을 준비해 놓고 저녁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방 한쪽 구석에는 구울 준비가 된 흙으로 빚은 물항아리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오분리의 흙은 찰지지는 않지만 좋은 옹기를 만듭니다.

우리는 그날 60리를 이동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결혼식을 집행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편지는 이미 한 번에 읽기에는 너무 긴 것 같아서 지금 보내고 나머지는 두 번째 편지에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지방 사역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 올해 여러분 모두를 축복하시기를 바라며,

진심으로,

새디 누스 웰본

2013년 양화진 선교사 추모예배 후 웰본 에비(맨 왼쪽)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웰본 선교사와 가족 묘지에 헌화하고 있다.
▲2013년 양화진 선교사 추모예배 후 웰본 에비(맨 왼쪽)가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웰본 선교사와 가족 묘지에 헌화하고 있다. ⓒ에스더재단
배천 여행(계속)

오분리의 날씨는 결혼식을 올리기에 이상적일 만큼 아름답고 맑은 날씨였습니다. 우리는 아침예배를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른 마을에서 왔기 때문에 출석 인원이 많았습니다. 예배 후 마을의 여인들은 신부를 준비시키기 위해 내려갔고 저는 바깥에서 손님들과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당에 천막이 세워졌고 그 아래에는 돗자리가 깔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기다리는 동안 여성들은 공부할 기회를 잘 활용했습니다.

오래 기다린 끝에 마침내 “신랑이 온다”는 외침이 들리자 모든 남자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내려갔습니다. 신랑은 1년 전에 웰본 씨가 이 근처를 방문했을 때 그를 위해 등에 짐을 지고 다닌 가난한 농부 소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의 생애 최고의 날이었습니다. 그는 새 옷을 잘 갖추어 입고 작은 회색 당나귀를 타고 왔습니다. 남자 성도들과 소년들 일행이 그와 함께 왔고, 그들은 인사를 하면서 모두 기독교 예식을 집행하기 위해 목사님이 그 자리에 있어서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조사가 웰본 씨에게 와서, 한국식 결혼식에 (우리가 집행한 것이 아니었음) 참석했던 서울에서 온 어떤 사람이 신랑이 신부에게 키스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고 그들에게 말했다면서, 만약 그것이 기독교 예식의 일부라면 그것을 생략해 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웰본 씨가 그 부분은 쉽게 생략할 수 있다고 안심시키자 그들은 모든 순서에 매우 만족해했습니다.

신랑이 혼례복(빌린 관복)을 입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준비가 끝났고, 그는 친구들의 호위를 받으며 천막 아래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로 나왔습니다. 여인들이 신부를 데리고 나왔고, 신부는 신랑 옆에 섰습니다. 그녀는 붉은색으로 물들인 평범한 무명 치마를 빳빳하게 풀을 먹여서 입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감아서 허리춤에 묶었을 치맛자락을 풀어내려 치마 전체가 바닥에 몇 인치 정도 넓게 퍼지게 했습니다. 양가 모두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근사한 결혼잔치는 없었습니다. 가마가 기다리고 있다가 어린 신부를 태우고 새집으로 데려갔습니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가마를 따라갔습니다. 여행 일정의 다음 목적지가 그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감바위(Kam Bowie)까지는 평야를 가로질러 40리 거리였습니다. 우리와 동행한 남성들 일행도 내 가마를 들어주었고, 우리는 짐을 진 황소와 함께 오는 사람들보다 조금 앞서 도착했습니다. 웰본 씨와 다른 사람들은 짐이 미끄러져 내리는 바람에 그것을 다시 묶느라 지체되었습니다. <계속>

글=프리실라 웰본 에비
엮은이=김현수 박사
미주 추가=리진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