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본문
사무엘상 3장 10–14절
서론
사무엘상 2장은 결코 우연한 사건의 나열이 아닙니다. 이 장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단순히 기록된 본문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대비되도록 말씀입니다. 성경은 한쪽에서는 엘리의 아들들의 타락한 행실을 보여 주고, 곧이어 사무엘의 삶을 배치합니다. 다시 엘리의 아들들의 죄를 확대해 보여 준 다음, 사무엘의 성장을 기록하며, 마지막에는 엘리 가문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으로 이 장을 마무리합니다.
이와 같은 구성은 성경 전체가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신학적 편집 원리입니다. 시편 1편이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나란히 놓고 그 끝을 비교하듯이, 잠언이 빛의 길과 어둠의 길을 대비시키듯이,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만 판단하지 않으시고 삶을 나란히 세워 그 열매로 판단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문학적 장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미워하시는지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신학적 구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선택지를 동시에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숨기지 않으십니다. 사무엘상 2장은 바로 그 사실을 매우 정직하게 보여 주는 장입니다.
본론
1.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라는 가장 무거운 진단
성경은 엘리의 아들들에 대하여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사무엘상 2:12). 이 말씀은 그들의 문제를 행동 이전에 규정합니다. 그들의 핵심 문제는 실수나 연약함이 아니라,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단순한 정보의 부족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관계와 경외, 그리고 언약적 책임을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언 1:7)이라고 말하고, 호세아 선지자는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세아 4:6)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 태도의 문제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으로서 제사의 절차와 규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 있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제사는 은혜의 통로가 아니라 사적 이익을 취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성전은 거룩을 지키는 공간이 아니라 욕망을 은폐하는 장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죄를 매우 단호하게 평가하십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크니 이는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사무엘상 2:17). 여기서 성경이 문제 삼는 핵심은 단순한 도덕적 타락이 아닙니다. 이 죄가 “심히 크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가장 거룩하게 여기시는 예배의 자리를 가볍게 여겼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을 직접 부인하는 것보다 더 무거운 죄는 하나님을 형식적으로만 대하면서 실제로는 존중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를 없앤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계속 드렸고, 성전 제도도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 속에서 하나님은 더 이상 중심이 아니었습니다. 예배는 남아 있었으나 하나님은 존중받지 못하셨고, 직분은 유지되었으나 경외함은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가장 무겁게 다루는 죄의 형태입니다.
이 말씀은 결코 고대 이스라엘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동일한 영적 원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공적인 권한을 가진 자들이,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예배와 교회의 존재 자체를 가볍게 여기고, 이를 제한하거나 폐쇄하는 법을 아무렇지 않게 발의하는 현실은, 성경의 이 평가 앞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입니다.
교회를 폐쇄하거나 예배를 위축시키는 법을 만드는 행위는 단순한 행정 조치가 아닙니다. 성경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는 여호와의 제사를 하찮게 여기는 태도이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예배의 자리를 사회적 관리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행위입니다.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며,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선택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이름을 빌린 모순이자, 경외 없는 직분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회 전체를 병들게 하고 다음 세대를 실제로 파괴하는 수많은 구조적 악, 곧 도박과 각종 중독을 부추기는 산업, 약물 의존을 확산시키는 문화, 청소년과 청년들을 음란과 퇴폐로 끌어들이는 무분별한 클럽 문화와 향락 산업에 대해서는 유독 관대하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배의 공동체에 대해서만 가장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현실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중립이 아닙니다. 이것은 가치의 선택이며, 우선순위의 고백입니다. 무엇을 보호하고 무엇을 억제할 것인지는, 그 사회가 무엇을 생명으로 여기고 무엇을 소모 가능한 대상으로 여기는지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예배를 제한하면서도 영혼을 파괴하는 구조에는 침묵하는 사회라면, 그것은 결코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도의 붕괴보다 예배의 멸시를 훨씬 더 심각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예배가 무너지면, 그 사회를 붙들고 있던 영적 중심이 함께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단지 종교 행위가 아니라, 한 공동체가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고 무엇 앞에 무릎을 꿇는지를 보여 주는 고백의 자리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으로써, 결국 제사장 직분도, 가문의 미래도, 공동체의 신뢰도 모두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가볍게 여기는 사회, 교회의 존재를 불편한 장애물로 취급하는 정책, 하나님의 거룩을 사적인 취향 정도로 격하시키는 결정들은 단기적으로는 효율처럼 보일지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공동체 전체를 영적 공백 상태로 몰아넣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한 분노의 언어가 아니라, 영적 경고의 언어입니다. 성경은 감정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히 선언합니다.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죄는 결코 가볍지 않으며, 그 결과는 반드시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입니다.
직분이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며, 신앙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존중하는지는, 결국 그분의 예배와 거룩을 실제로 어떻게 대하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이것이 성경이 엘리의 아들들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날카로운 질문입니다.
2. 가장 작은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던 한 사람
그러나 성경은 곧바로 전혀 다른 인물을 우리 앞에 세우십니다. “사무엘은 소년이었으나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사무엘상 2:18). 이 한 문장은 매우 조용하지만, 신학적으로는 대단히 강한 선언입니다. 사무엘은 제사장이 아니었고, 아직 소년이었으며, 성전의 질서를 주도할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배우는 자의 자리, 기다리는 자의 자리, 이름 없이 섬기는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의 신분이나 나이를 먼저 말하지 않고, 그의 삶의 방향을 먼저 증언합니다. 그는 여호와 앞에서 섬겼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여호와 앞에서”라는 표현은 공간적 위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삶의 기준과 방향, 그리고 궁극적인 청중이 누구인지를 말하는 신학적 표현입니다. 사무엘은 사람의 평가를 의식하지 않았고, 제사장 가문의 권위나 성전 중심의 권력을 목표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는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반대로 엘리의 아들들은 성전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제사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제사장이라는 직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 살지 않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성경은 매우 중요한 대비를 보여 줍니다. 중심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니며, 가장자리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멀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은 가장 작은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서 있었고, 엘리의 아들들은 가장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을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기준은 언제나 위치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이 대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분명해집니다. 엘리의 아들들의 죄는 멈추지 않고 확장되었습니다. 그들은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며, 거룩과 욕망의 경계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사무엘상 2:22). 거룩의 공간이 더 이상 거룩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죄를 가리는 은폐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개인의 도덕적 타락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성전이라는 장소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들지 못할 때, 그 성전은 이미 기능을 상실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거룩한 공간에 있어도 그 공간을 오염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갑니다. 그는 조용히 성장하였습니다. 성경은 그의 말이나 업적을 길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성장 과정을 짧지만 분명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사무엘상 2:26). 이 문장은 순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은총의 출처가 분명히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이시고, 그다음이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결코 이 순서를 바꾸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한 평판은 오래가지 못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은 삶은 결국 사람들 앞에서도 드러나게 됩니다.
잠언은 이 영적 원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인자와 진리를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잠언 3:3–4). 이는 단순한 처세의 지혜가 아닙니다. 삶의 중심을 하나님 앞에 두는 사람이 결국 공동체 안에서도 신뢰를 얻게 된다는 영적 질서의 선언입니다. 사무엘의 삶은 이 원리가 실제로 구현된 사례입니다. 이 표현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성장 묘사와 정확히 겹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누가복음 2:52).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삶은 결국 사람 앞에서도 드러납니다. 반대로 사람 앞에만 서 있으려는 삶은,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3. 알고도 멈추지 않았던 아버지의 책임
사무엘상 2–3장을 차분히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에 이르게 됩니다. 왜 같은 제사장 집안에서, 같은 성전이라는 공간 안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결과가 나타났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차이를 설명하는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는 엘리의 개입 실패입니다.
성경은 엘리를 악한 아버지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들들의 죄를 알고 있었고, 실제로 말로는 책망까지 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사무엘상 2:23) 엘리는 무관심한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상황을 알고 있었고, 죄의 심각성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를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이는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라… 그들을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사무엘상 3:13).
문제는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알고도 멈추게 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금하지 아니하였다”는 표현은 단순히 훈계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원문의 뉘앙스는, 권한을 가진 자로서 반드시 취해야 할 조치를 의도적으로 취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엘리는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는 아들들의 직분을 중지시킬 권한도 있었고, 성전 사역에서 분리시킬 책임도 있었으며, 공동체 앞에서 죄를 공적으로 다루어야 할 의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정적으로는 걱정하였지만, 구조적으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말은 있었지만 결단은 없었고, 책망은 있었지만 조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책임자의 실패입니다. 책임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의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경멸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사무엘상 2:30). 엘리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제사를 드렸고, 여전히 성전에 머물렀으며, 외형적으로는 신앙의 틀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의 순간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함보다 아들들의 안위를 먼저 선택하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보다 앞에 놓인 사랑이 되었고, 그 사랑은 결국 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사랑만 있고 경계가 없는 양육은 사랑이 아니라 방치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에 놓인 사랑은, 그 대상이 자녀라 할지라도 결국 우상이 됩니다(출애굽기 20:3). 엘리는 아들들을 지키고자 했지만, 하나님보다 아들들을 앞세운 선택은 결국 아들들을 지키지 못하였고, 가문 전체를 심판으로 이끌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를 비극으로 묘사하기보다, 하나님의 질서가 무너질 때 반드시 따르는 결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4. 말씀이 희귀해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흐름 위에서 사무엘상 3장 1절의 선언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이 공적으로 흘러갈 통로가 막혔다는 의미입니다. 반복된 경고가 흘려보내졌고, 알고도 방치된 책임 위에서 말씀이 머물 자리를 잃은 것입니다.
말씀이 사라지면 사람은 반드시 자기 소견을 왕으로 세웁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21:2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씀이 희귀해진 바로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조용히 한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사무엘상 3:4).
5. 하나님께서는 직분이 아니라 태도를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중심에 있던 대제사장 엘리를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 곁에서 섬기던 한 소년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정확히 분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 고백은 아브라함이 시험 앞에서,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을 때 반복된 고백입니다(창세기 22:1; 출애굽기 3:4; 이사야 6:8).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 그의 분별력이 아니라, 부르심 앞에 서는 태도였습니다. 마침내 사무엘은 이렇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웁니다.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결론
말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무엘상 3장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장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자리를 옮기신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말씀 앞에 설 준비가 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오늘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여전히 머물 자리를 찾고 계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언제나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서 있는 한 사람에게서 시작됩니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사람의 평가보다 주님 앞에 서는 삶을 선택하게 하옵소서. 작은 자리에서도 충성하게 하시고, 말씀을 들을 때 머물지 않고 순종으로 응답하게 하옵소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침묵하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질서 앞에 겸손히 서게 하옵소서. 오늘도 “말씀하옵소서”라고 고백하는 종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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