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기도
제목
말씀 안에 거할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

본문
레위기 26장 3–13절

서론

레위기는 많은 성도들에게 가장 읽기 어렵고, 동시에 가장 멀게 느껴지는 성경책 중 하나입니다. 출애굽기와 민수기 사이에 끼어 있는 책이라는 인식, 제사와 정결 규례가 반복된다는 이유로 “지금 시대의 신앙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성경 통독을 하다가 레위기에서 멈춘다는 고백을 적지 않게 듣습니다. 그러나 레위기를 그렇게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 책이 던지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놓치게 됩니다.

레위기는 제사 규칙을 정리한 종교 매뉴얼이 아닙니다. 이 책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는 책이며, 그 하나님이 구원하신 백성과 어떤 방식으로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시는지를 가장 깊이 있게 드러내는 책입니다. 레위기가 던지는 질문은 단 하나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 많은 백성과 어떻게 함께 거하실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광야를 걷던 이스라엘에게만 던져진 질문이 아닙니다.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오늘의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오늘의 성도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고백하지만, 그 구원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출애굽이라는 분명한 구원의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었고, 홍해를 건너며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은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출발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그들을 애굽에서 꺼내기 위해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거하시기 위해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나를 위하여 성소를 짓되 내가 그들 중에 거할지니라.” 구원은 탈출로 끝나지 않고, 동행으로 완성됩니다. 레위기는 바로 이 동행의 삶이 어떤 구조와 질서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본론

I. 율법의 본질 | 억압이 아니라 동행을 가능하게 하는 질서

레위기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먼저 정리해야 할 것은 율법에 대한 오해입니다. 많은 사람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멀어지시는 기준’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자연스럽게 부담이 되고, 신앙은 긴장 속에서 유지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을 그런 방식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삶의 질서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은 하나님을 얻기 위해 올라가야 할 사다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먼저 업으셨고, 먼저 구원하셨으며, 그다음에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핵심은 규칙 자체에 있지 않고, 관계에 있으며, 형식에 있지 않고 거룩한 동행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너희가 내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하리라”는 말씀도 조건부 거래가 아닙니다. 지키면 복을 주겠다는 계산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거하실 수 있는 삶의 구조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언약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규칙을 잘 지키는 백성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도록 삶을 정돈하는 백성을 찾으십니다.

II. 순종의 의미 | ‘행한다’는 말이 요구하는 삶의 방향

본문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표현은 “행하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을 완벽한 순종이나 흠 없는 삶으로 이해하면, 우리는 곧 좌절하거나 율법주의로 기울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완전무결함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신명기에서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라”(신 28:1)고 말씀하시지만, 이 ‘행함’은 실수 없는 삶을 요구하는 언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삶의 방향을 정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성경에서 “행한다”는 말은 넘어지지 않는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넘어질 수 있지만, 다시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결코 흠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명한 실패와 죄를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가리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 13:22)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실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 앞에 다시 서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레위기의 규례는 흠 없는 삶을 요구하는 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 내어주는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겔 36:26)라고 약속하시며, 순종이 인간의 완벽함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해짐을 밝히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레위기를 율법주의의 책이 아니라, 은혜의 책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III. 축복 이전에 다루시는 문제 | 우상이 만드는 삶의 구조

레위기 26장은 인상적인 축복 선언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우상 문제를 다루십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레 26:1)는 말씀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은 ‘자기를 위하여’라는 표현입니다. 우상은 다른 신을 섬기는 종교 행위 이전에, 하나님을 대신해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안정 장치입니다. 그래서 우상은 단순한 신앙 오류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드러내는 지표입니다.

성경은 반복해서 인간의 마음이 본질적으로 의존 대상을 찾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그들의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시 115:4)고 말하며, 우상이 인간의 손과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사람은 불안을 견디지 못할 때 반드시 무언가를 붙잡게 됩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으며, 정보나 권력, 관계, 경험, 성공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 자체가 죄라기보다, 하나님보다 앞서 의지하게 되는 순간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마 6:24)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점에서 우상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 인간은 반드시 다른 의존 대상을 만들어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상태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무릇 물을 저수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판 것”(렘 2:13)이라고 말입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날 때, 인간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대체 시스템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상이 형성되는 과정을 “만들지 말라, 세우지 말라, 경배하지 말라”는 세 단계의 명령으로 보여주십니다. 이는 우상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우상은 먼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바울은 이를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골 3:5)고 정의하며, 외적인 형상 이전에 마음의 방향이 이미 우상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마음에서 시작된 의존은 곧 선택이 되고, 그 선택이 반복되면서 결국 삶의 구조가 됩니다.

처음에는 불안을 견디기 위한 임시방편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 안정 시스템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축복을 주시기 전에 반드시 통로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축복은 아무 구조 위에나 흐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고 말씀하시며, 축복의 흐름이 하나님과의 관계 위에만 놓일 수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우상은 축복의 통로를 막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은 그 통로를 다시 엽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다루시는 것은 축복을 미루기 위함이 아니라, 참된 축복이 흐를 수 있도록 삶의 구조를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IV. 말씀 안에 거할 때 나타나는 다섯 가지 축복

1. 삶의 리듬이 회복되는 축복 (레위기 26:4–5): 하나님은 가장 먼저 “때를 따라 비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비의 양이나 속도가 아니라 ‘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속도 경쟁이나 폭발적인 성공이 아니라, 삶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역사입니다. 때를 따라 비가 내릴 때 땅은 억지로 열매를 맺지 않고, 본래 주어진 기능을 회복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삶에서는 소진이 아니라 지속이 가능해지고, 수확과 파종 사이에 끊어짐 없는 흐름이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된 삶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전도자는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전 3:1)고 말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제나 ‘적절한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시편 기자 역시 “땅이 그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시 67:6)라고 고백하는데, 이는 과잉이 아닌 정상성 자체가 복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시편 65편은 하나님이 땅을 돌보아 윤택하게 하시고, 그 길에 기름이 떨어진다고 노래함으로써(시 65:9–11),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삶이 과로가 아니라 리듬 속에 놓인 삶임을 분명히 합니다.

2. 불안이 제거되는 축복 (레위기 26:6): 삶의 리듬이 회복된 이후 하나님은 마음의 상태를 다루십니다. “내가 그 땅에 평안을 주겠다”는 말씀은 문제가 전혀 없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은 두려움이 삶의 주인이 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늘 경계하며 살아가던 삶에서 벗어나 마음이 내려앉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불안은 환경의 문제라기보다, 하나님이 삶의 중심에서 멀어질 때 나타나는 영적 신호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중심이 되실 때, 평안은 자연스럽게 회복됩니다.

시편 기자는 이 평안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 이는 외부 환경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확신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또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라는 말씀은, 불안에 사로잡혀 애쓰는 삶과 하나님께 맡긴 삶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사 41:10)고 선포하며, 평안의 근거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3. 싸워야 할 때 주어지는 승리의 축복 (레위기 26:7–8): 레위기 26장 7–8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너희 대적을 쫓으리니”라고 말씀하시며, 싸움 자체를 피하게 하겠다고 하시지 않고, 싸움의 결과를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도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이 싸움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쟁이나 감정적 충돌에 머물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고 밝힙니다. 즉, 눈앞에 드러나는 갈등의 얼굴은 사람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것은 두려움과 거짓, 분열과 절망을 조장하는 영적 권세입니다.

이 때문에 영적 전쟁은 특정한 위기 상황에서만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매일의 선택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싸움입니다. 예를 들어, 억울한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분노에 반응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께 맡길 것인지의 선택, 불안한 현실 앞에서 눈에 보이는 안전장치를 붙잡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것인지의 선택,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 상대를 무너뜨리는 말에 동조할 것인지, 아니면 진리와 화평의 편에 설 것인지의 선택이 모두 영적 전쟁의 현장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싸움은 칼과 방패를 드는 싸움이 아니라, 마음을 지키고 방향을 선택하는 싸움입니다.

레위기 본문이 말하는 “다섯이 백을 쫓고 백이 만을 쫓는다”는 표현은 군사적 전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계산의 논리가 무너지는 순간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나는 이유는, 전쟁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는 다윗의 고백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자신의 물매 실력이나 용기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삼상 17:47)고 선언하며, 싸움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했습니다. 다윗의 담대함은 자기 확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누가 싸우시는지를 알고 있었던 신앙의 확신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모든 싸움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싸워야 할 싸움과 피해야 할 싸움을 분별하게 하십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고 권면한 것처럼, 성도의 싸움은 감정적 충돌이나 자존심 경쟁이 아니라, 믿음과 진리를 지키는 싸움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싸움은 믿음으로 맞서야 하고, 어떤 싸움은 지혜롭게 물러나야 하며, 어떤 싸움은 침묵과 인내로 통과해야 합니다. 이 분별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주어지는 능력입니다.

4. 생명이 확장되는 축복 (레위기 26:9–10): 하나님은 결과만 보지 않으시고 과정을 돌보십니다. 번성은 생명이 끊기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고, 창대함은 그 생명의 영향력이 넓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을 소모시키며 키우는 방식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생명이 흘러가게 하는 방식입니다. 묵은 곡식이 남아 있고 새 곡식이 더해지는 삶은 하나님의 공급이 끊어진 적 없는 인생을 상징합니다.

이 축복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창 12:2)고 말씀하시며, 번성과 확장을 언약의 핵심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시편은 이 생명의 확장을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시 92:12)라고 노래합니다. 바울 역시 “겉사람은 낡아지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후 4:16)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이 외적 소모가 아니라 내적 갱신과 확장임을 분명히 합니다.

5. 하나님의 임재가 삶의 중심이 되는 축복 (레위기 26:11–13):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모든 축복의 목적을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희 중에 거하리라”는 이 말씀은 축복의 결론이 아니라, 모든 축복의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고 떠나시는 분이 아니라, 복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의 멍에를 꺾으시고, 끌려다니던 인생을 자유 가운데 서 있는 인생으로 회복시키십니다.

이 약속은 출애굽의 목적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들이 나를 위하여 성소를 짓되 내가 그들 중에 거할지니라”(출 25:8)는 말씀은, 구원의 최종 목적이 임재임을 보여줍니다. 신약에서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 15:4)고 초청하십니다. 그러므로 종의 멍에가 꺾이고 자유롭게 걷게 되는 삶은,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는 말씀 속에서 완성됩니다.

결론

하나님이 처음부터 원하셨던 삶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에 계실 때 비는 축복이 되고, 평안은 힘이 되며, 승리는 교만이 되지 않고, 확장은 소진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말씀 안에 거할 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의 삶은 과연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자리로 정돈되어 있는가를 말입니다

최원호 목사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싸워야 할 때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을 선택하게 하시고,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 힘이 아니라 주님의 주권을 의지하게 하시며, 날마다 진리의 편에 서는 담대함을 주소서. 모든 전쟁이 주께 속해 있음을 믿고 오늘도 말씀 안에 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