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제목
하나님이 재물을 자루에 넣어주신 이유는?

본문
창세기 43장 16–34절

서론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즉각적인 기쁨과 안도감으로 받아들여진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불안해하고, 선하심을 의심하며, 축복을 심판처럼 받아들이는 인간의 모습을 반복해서 전합니다. 은혜는 변함이 없으나,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는 늘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2장과 43장에 등장하는 요셉의 형제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기근 속에서 곡식을 얻었고, 생존의 위기를 넘겼으며, 자신들이 지불한 돈이 다시 자루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인간의 계산으로 보면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며, 위기가 아니라 구제에 가까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의 반응은 감사가 아니라 두려움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고”(창 42:28)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형제들의 상황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상태를 보여 줍니다. 성경은 죄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조차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함을 분명히 증언합니다. 잠언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잠 28:1)고 말합니다. 외부의 위협이 없는데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이미 정죄 아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은혜를 받았으나 안심하지 못합니다. 자루 속의 은은 그들을 살리는 도구였으나,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내면은 여전히 과거의 죄와 침묵에 묶여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리되지 않은 죄는 상황이 호전되어도 마음을 자유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은혜는 기쁨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의 전조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왜 형제들의 자루에 재물을 다시 넣게 하셨는지를 묻도록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오해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은혜를 베푸셨는지, 왜 그 은혜가 즉각적인 안도 대신 두려움을 먼저 불러왔는지를 성경은 차분히 기록합니다. 이 질문 앞에 서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본론 Ⅰ

은혜를 심판으로 오해하게 된 이유(창세기 42장 25–28절)

요셉은 형제들에게 곡식을 넉넉히 주도록 명령했을 뿐 아니라, 각 사람의 돈을 다시 자루에 넣게 했습니다(창 42:25). 이 행동은 우발적인 친절이나 순간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조치가 아닙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행정적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회복의 과정 안에서 형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곡식을 채워 주는 일과 돈을 다시 넣는 일은 분리된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의도를 가진 행동입니다.

그러나 형제들은 이 은혜를 은혜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자루 속에서 은을 발견한 순간, 그들의 마음에는 안도나 감사보다 두려움이 먼저 자리합니다. 그들은 기쁨의 말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어찌하여 이런 일을 우리에게 행하셨는고”(창 42:28)라고 말합니다. 이 반응은 요셉에 대한 오해라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반응입니다. 형제들은 은혜를 받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놓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의 과거가 아직 하나님 앞에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판 사건은 순간적인 실수나 우발적인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형제들은 요셉을 보자마자 죽이기를 공모했고, 그 계획을 함께 논의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은 스무 개에 팔아넘기기로 합의했습니다(창 37:18–28). 이 사건은 개인의 범죄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동의한 집단적 죄였습니다.

더 나아가 형제들은 그 죄를 숨기기 위해 염소의 피를 묻힌 옷을 아버지에게 가져가 요셉의 죽음을 가장했습니다(창 37:31–33). 이 거짓은 단순한 말 한마디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슬픔에 잠겨 애통할 때도 형제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그 슬픔 곁에서 침묵을 선택했습니다. 그날 이후 형제들은 아버지의 고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백하지 않는 삶을 살아갑니다.

성경은 이 20년의 시간을 회개의 시간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덮은 채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익힌 시간으로 남겨 둡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가정을 이루었고, 생업을 이어 갔으며, 공동체 안에서 아무 문제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고백 되지 않은 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죄는 잊히는 것이 아니라, 억눌린 채 남아 있다가 하나님께서 환경을 움직이실 때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되지 않은 죄가 사람의 내면을 어떻게 소모시키는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토설하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함으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시 32:3). 죄를 숨긴 채 살아가는 삶은 평안해 보일 수 있으나, 내면에서는 지속적인 소모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근이라는 환경을 사용하시자, 형제들의 기억 속에 묻혀 있던 죄는 정확한 지점에서 다시 떠오릅니다. 그들은 애굽의 총리 앞에서 스스로 말합니다. “우리가 아우에게 죄를 지었도다”(창 42:21).

이 고백은 요셉의 추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총리는 과거를 묻지 않았고, 죄를 언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상황을 만지시자, 고백 되지 않았던 죄가 스스로 입을 엽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기 전에 먼저 양심을 깨우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형제들을 즉시 심판하지 않으시고, 먼저 기억을 흔들어 회개의 문 앞에 세우십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루 속의 은은 형제들을 고발하기 위한 증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체포의 명분도 아니었고, 함정을 파기 위한 장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은혜는 심판처럼 받아들여집니다. 형제들은 은혜를 보고도 “살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성경은 중요한 영적 원리를 말합니다. 은혜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가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조차 신뢰하지 못합니다. 죄책이 남아 있는 마음은 축복을 받아도 안심하지 못하고, 호의를 받아도 의심부터 앞세웁니다. 그래서 은혜는 기쁨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의 예고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제들이 은혜를 심판으로 오해하게 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자루에 재물을 넣게 하신 목적은 고발이 아니라 회복이었으나, 회개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마음은 그 은혜를 바르게 해석하지 못합니다.

본론 Ⅱ

하나님께서 은혜의 의미를 말씀으로 밝히심 (창세기 43장 18–23절)

곡식이 떨어지자 형제들은 다시 애굽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게 됩니다(창 43:1–2). 이는 우연한 상황의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 안에 있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외면한 채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은혜만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형제들이 다시 애굽으로 내려가도록 하신 것은 그들을 곤궁하게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회개의 자리로 다시 부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덮는 방식으로 관계를 회복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다시 마주하게 하시는 방식으로 다루십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종종 인간의 기대와 다르게 작동합니다. 사람은 문제만 사라지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문제를 통해 마음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형제들이 다시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곡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벌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이며, 관계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될 때, 그들의 두려움은 더욱 구체화됩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루 속의 은을 떠올리며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끌려가는도다”(창 43:18)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는 억울함보다 불안이 담겨 있습니다. 이미 곡식을 사 왔고, 돈도 다시 가져왔으며,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전혀 평안하지 않습니다.

이 두려움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애굽의 총리는 아직 형제들을 정죄하지 않았고, 어떠한 고발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양심은 잠잠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는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때에는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다”(요일 3:20)고 말합니다. 사람은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나, 양심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지 않은 죄는, 환경이 조금만 흔들려도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형제들의 말 속에는 공통된 전제가 있습니다. 은혜는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들은 돈이 다시 들어간 것을 축복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함정일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불신해서라기보다, 자신들의 과거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위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심판의 신호처럼 받아들여집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집 맡은 자의 입을 통해 사건의 의미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재물을 자루에 넣어주셨느니라”(창 43:23)라는 말씀이 선포됩니다. 이 한 문장은 형제들의 모든 오해를 바로잡는 말씀입니다. 이 일은 실수가 아니며, 관리자의 착오도 아니고, 총리의 함정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일이었음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나님께서 직접 음성을 들려주신 것이 아니라, 집 맡은 자의 입을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가장 평범한 통로를 통해 가장 중요한 해석을 전하십니다. 형제들은 두려움 속에서 상황을 해석하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상황을 다시 정의하십니다. 은혜는 설명되지 않으면 오해가 되지만, 말씀이 더해질 때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이 말씀은 형제들의 마음을 단번에 바꾸기보다, 해석의 방향을 바로잡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먼저 경험하게 하신 후, 말씀으로 그 의미를 가르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의 생각과 길보다 높기 때문입니다(사 55:8). 사람은 먼저 이해한 뒤에 받아들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먼저 경험하게 하시고 나중에 이해하게 하십니다.

인간의 해석이 앞설 때 은혜는 혼란이 됩니다. 형제들은 자루 속의 은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해석했고, 그 해석은 곧 두려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그 상황을 해석할 때, 은혜는 비로소 제자리를 찾습니다. 말씀이 해석할 때 은혜는 안식이 되고, 상황은 더 이상 사람을 위협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의 두려움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그 두려움 한가운데에 말씀을 보내십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의미를 말씀으로 밝히시는 이유는, 회개한 자가 더 이상 은혜를 오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은혜는 설명될 때 온전해지고, 말씀 안에서 해석될 때 비로소 평안을 낳습니다.

본론 Ⅲ

재물은 심판의 증거가 아니라 회복의 자리로 인도함 (창세기 43장 24, 34절)

형제들은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면서 마음속으로 하나의 결론을 이미 내려놓았을 것입니다. 체포, 심문, 처벌이라는 단어들이 그들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는 언제나 최악의 결말을 먼저 떠올리게 합니다. 상황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음에도, 마음은 이미 판결을 내려버립니다. 이것이 죄책이 남아 있는 인간의 심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장면은 형제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 준비된 것은 쇠사슬이 아니라 물이었고, 심문이 아니라 환대였습니다. 성경은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그 사람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고 물을 주어 발을 씻게 하고 나귀에게 먹이를 주더라”(창 43:24). 이 한 절은 형제들이 품고 있던 모든 두려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장면입니다.

발을 씻길 물이 준비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발을 씻긴다는 것은 죄인을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손님을 맞이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깊은 환대의 표현이었습니다. 심문을 받을 사람에게는 결박이 준비되지만, 손님에게는 물이 준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을 죄수의 자리로 끌어오지 않으시고, 관계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나귀에게 먹이를 주었다는 기록 또한 우연이 아닙니다. 나귀는 이동과 생존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짐승에게 먹이를 준다는 것은 머무를 시간이 허락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잠시 조사받고 쫓겨날 사람들이 아니라, 머물며 쉼을 얻을 손님으로 대우받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들의 마음에 남아 있던 ‘급히 도망쳐야 한다’는 두려움을 하나씩 지워 가십니다.

성경에서 발을 씻기는 장면은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도 반복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을 기록합니다(요 13:4–5). 그 자리는 제자들의 실패와 배반이 이미 예고된 밤이었고, 인간적으로 보면 정죄와 경고가 선포되어야 할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책망보다 물을 준비하셨고, 심문보다 섬김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관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방식이 언제나 동일함을 보여 줍니다.

요셉의 집에서도 같은 방식이 반복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죄를 꺼내어 즉시 다루기보다, 먼저 관계의 자리를 회복하십니다. 이는 죄를 가볍게 여기신다는 뜻이 아니라, 회개한 자를 정죄의 자리에 묶어 두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보다 관계를 먼저 회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식탁이 차려집니다. 성경은 “그들이 요셉 앞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더라”(창 43:34)라고 기록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식사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식탁은 관계 회복의 가장 분명한 표지입니다. 원수는 식탁에 앉지 않으며, 심문받는 자는 초대되지 않습니다. 식탁은 받아들여졌다는 선언이며, 다시 함께할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신다”(시 23:5)고 고백합니다. 이는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관계를 다시 시작하셨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상을 차리신 자리는 여전히 인생의 전쟁터 한가운데일 수 있으나, 그 자리에는 더 이상 정죄가 머물지 않습니다.

이 식탁 앞에서 형제들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습니다. 스스로를 고발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자리에 앉아 먹고 마십니다. 이는 회개의 끝이 눈물이나 자책으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회개의 끝은 반드시 회복의 자리로 이어집니다.

이제 자루 속의 은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것은 심판의 증거가 아니었으며, 고발을 위한 물증도 아니었습니다. 자루 속의 은은 이 식탁으로 나아가게 하는 과정이었고, 회개한 자를 다시 관계의 자리로 앉히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통해 마음을 흔드셨고, 말씀을 통해 의미를 바로잡으셨으며, 마침내 식탁을 통해 관계를 완성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재물을 자루에 넣어주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묻어 두기 위해 은혜를 주시지 않으시고, 회개한 자를 다시 가족의 자리로 부르시기 위해 은혜를 사용하십니다. 은혜는 심판의 신호가 아니라, 회복을 향한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자를 죄책감 속에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고백한 자를 문밖에 세워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자리를 차리십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예상한 것은 심판이었으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은 식탁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 자루 속에도 이해되지 않는 은혜가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기쁘기보다 불안하고, 감사보다 의심이 앞서는 은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다”(시 103:8).

하나님께서 재물을 자루에 넣어주신 이유는 우리를 두렵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회복의 자리로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준비하시는 분이 아니라, 회개한 자를 다시 관계의 식탁으로 초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은혜 앞에서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도망이 아니라 회개로 응답하는 신앙의 길을 걷게 되기를 바랍니다.

최원호 목사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인생 자루 속에 이해되지 않는 은혜를 담아 주시고도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죄가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은혜를 오해하지 않게 하시고, 상황이 아니라 말씀으로 해석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회개한 자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식탁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 앞에 다시 서게 하시며, 우리의 삶이 관계의 자리로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