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풍경
제목
잃어버린 해를 회복하시는 하나님

본문
요엘 2장 21–27절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요엘 선지자의 자리에 함께 서 있습니다. 요엘이 활동하던 시대는 단순히 힘든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땅이 멈춘 해였고, 삶의 기반이 붕괴된 시간이었습니다. 메뚜기 떼가 지나간 뒤 곡식은 사라졌고 포도주는 끊겼으며, 예배는 흔들리고 공동체의 기쁨은 말라버렸습니다.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자연재해다.” “어쩔 수 없는 불운이다.” 그러나 요엘은 다르게 읽었습니다. 그는 이 재앙을 우연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삶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드러내는 영적 현실, 곧 ‘여호와의 날’의 경고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요엘의 예언은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는 무너진 땅 위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라도 너희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요엘이 전한 하나님은 무너뜨리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돌아오는 자에게 회복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하나님이 선포하신 말씀, 잃어버린 해를 다시 계산하시는 회복의 선언입니다.

본론

Ⅰ. 회복은 갑자기 시작되지 않는다 (요엘 2:12–14)

요엘 2장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은 12절입니다. 하나님은 재앙의 한가운데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라도 너희는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이 한 문장에는 회복의 모든 출발점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늦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는 이미 기회를 놓쳤다”고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놀라운 단어 하나를 사용하십니다.

“이제라도.” 이 말은 시간의 끝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자비의 언어입니다. 사람의 계산으로 보면 이미 실패한 이후이고,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 늦은 시점이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회개의 문을 닫지 않으십니다.

회개는 모든 것이 회복된 뒤에 하는 종교적 절차가 아닙니다. 상황이 정리된 후에 드리는 의식도 아닙니다. 회개는 더 늦기 전에 방향을 바꾸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감정을 과장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나를 붙들고 살게 했던 의존의 구조를 내려놓으라는 요청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기대어 삽니다. 문제는 그 기대가 하나님이 아니라 성공, 안정, 관계, 자기 확신에 고정되어 있을 때입니다. 금식은 단순히 음식을 끊는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인정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또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 당시 이스라엘은 위기 앞에서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는 외적 행위에는 익숙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외적인 파손보다 내적인 전환을 요구하십니다. “마음을 찢으라”는 말은 자신을 학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혐오에 빠지라는 요구도 아닙니다.

이 말은 변명을 내려놓고, 자기합리화를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숨지 않겠다는 결단입니다. 회개는 자신을 벌주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면을 벗는 용기입니다. 잘못을 나열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 없는 삶에서 하나님 있는 삶으로 인생의 중심을 옮기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요엘은 회개의 가장 중요한 근거를 분명히 밝힙니다. 회개의 이유는 우리의 눈물이나 결단이 아닙니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이심이라.” 하나님은 회개한 사람을 마지못해 받아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돌아오기를 오래전부터 기다려 오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행위가 아니라, 이미 은혜를 베풀 준비가 되어 계신 하나님께 다시 나아가는 신앙의 회복입니다.

Ⅱ.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실 때 회복이 시작된다(요엘 2:18–20)

요엘서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태도의 변화입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땅을 위하여 극진히 사랑하시어 자기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 여기서 “그때에”는 막연한 미래가 아닙니다.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 돌아온 바로 그 순간입니다. 회개는 허공에 흩어진 외침이 아니었고, 하나님께 분명히 닿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움직이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황폐해진 땅은 사람의 눈에는 버려진 자리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 땅을 ‘자기 땅’이라 부르십니다. 징계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은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언약의 관계를 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방관이 아니라 개입으로 드러납니다. 19절에서 하나님은 회복의 열매를 보여 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주리니 너희가 이로 말미암아 흡족하리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은 사치가 아니라 삶이 다시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가장 기본적인 징후입니다. 끊겼던 일상이 이어지고, 무너졌던 생활 리듬이 회복되며, 하루를 감당할 힘이 다시 생깁니다. 회복은 화려해지는 인생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은혜입니다.

20절에서 하나님은 우리 삶을 반복해서 무너뜨리던 원인 자체를 다루십니다. “내가 북쪽 군대를 너희에게서 멀리 떠나게 하리라.” 성경은 재앙이 제거된 뒤에도 “상한 냄새”, “악취”가 남는다고 말합니다. 이는 과거가 지워졌다는 뜻이 아니라,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는 선언입니다. 메뚜기는 살아 있을 때 두렵지만, 죽으면 냄새만 남습니다.

과거의 실패와 상처의 기억이 남아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그것은 더 이상 우리 삶을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는 그가 크게 행하였음이라.” 회복은 시간이 해결한 결과가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가 강해진 결과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움직이셨기 때문에 가능한 회복입니다.

Ⅲ.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요엘 2:21–22)

요엘서에서 회복의 선언은 의외의 순서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곡식의 회복을 먼저 말하지 않으십니다. 비가 다시 내릴 것이라는 약속도 먼저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회복을 선포하시며 가장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땅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욜 2:21–22) 이 말씀은 회복의 순서를 정확히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상황보다 먼저 ‘두려움’을 다루십니다.

요엘서의 메뚜기 재앙은 성경에서 처음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10장은 애굽에 임한 여덟 번째 재앙, 메뚜기 재앙을 기록합니다. “메뚜기가… 푸른 것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출 10:14–15) 이 재앙의 핵심은 분명합니다. 이미 남아 있던 것마저 모두 삼킨 재앙이었습니다.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까지 끊어버린 재앙이었습니다. 요엘서도 동일합니다. 곡식의 상실이 아니라 내일을 기대할 수 없게 된 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결단이 아니라 고통을 피하려는 반응이었고, 재앙이 거두어지자 다시 완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메뚜기는 회복이 아니라 더 깊은 어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지점에서 요엘서는 분명히 갈라섭니다. “이제라도 너희는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요엘서의 목적은 재앙의 제거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관계의 회복입니다. 바로 여기서 출애굽기의 메뚜기와 요엘서의 메뚜기는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메뚜기 재앙 이후 가장 깊이 자리 잡은 문제는 결핍이 아니라 공포였습니다. 다시 심어도 소용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다시 시작해도 또 무너질 것이라는 공포, 기대했다가 더 크게 무너질까 봐 아예 기대하지 않으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복의 출발점에서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명령은 감정 조절을 요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현실을 부정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누가 지금 역사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에 대한 선언입니다. 성경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항상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 등장합니다. 즉, 이 말씀은 “상황이 좋아질 것이다”라는 예측이 아니라 “이제 내가 일하기 시작한다”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더 주목할 점은 하나님이 이 말씀을 사람에게 먼저 하지 않으시고 땅과 들짐승에게 먼저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메뚜기 재앙 이후 무너진 것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삶을 떠받치던 창조 질서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땅은 황폐해졌고, 들짐승은 먹을 것이 없어 울부짖었으며, 그 붕괴된 환경 위에서 사람의 마음도 함께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회복을 시작하시며 그 무너진 질서 전체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의 회복 방식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상황이 바뀌면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두려움이 물러가야 회복이 시작됩니다. 두려움이 계속 지배하는 한, 아무리 곡식이 돌아와도 마음은 여전히 메말라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회복의 첫 단계에서 환경보다 마음, 결과보다 정서를 먼저 다루십니다. 이때 요구되는 기쁨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아직 아무것도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지만, 말씀을 신뢰하기로 선택하는 믿음의 기쁨입니다.

Ⅳ. 메뚜기가 삼킨 해를 갚아 주시는 하나님(요엘 2:23–25)

두려움이 제거된 자리에서 하나님은 이제 회복을 실제로 시작하십니다.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욜 2:23) 여기서 요엘은 회복의 기쁨이 상황의 변화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회복의 중심은 언제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때, 비로소 기쁨은 다시 가능해집니다.

하나님은 회복을 추상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전과 같이” 내리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풍요의 약속이 아니라, 무너졌던 삶의 리듬을 정상으로 되돌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루를 계획할 수 있고, 내일을 기다릴 수 있는 삶으로 회복시키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요엘서의 정점과 같은 말씀이 이어집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 떼가 먹은 해를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 (욜 2:25) 여기서 “갚아 주리라”는 표현은 위로의 언어가 아닙니다. 보상과 책임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은 “앞으로 잘될 것이다”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해’는 단지 달력 속 한 해가 아닙니다. 그 안에는 열매 없이 지나간 시간, 무너진 관계, 꺾여버린 의욕, 실패로 남은 기억, 수치로 남은 정체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대충 덮지 않으십니다. 눈물 흘린 시간까지 회복의 대상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요엘서의 회복은 단순한 재기(再起)가 아닙니다. 부족한 만큼만 채워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 잃어버린 만큼 되돌려 주시는 회복입니다. 이것이 요엘서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공백기를 ‘의미 없는 실패’로 남겨두지 않으십니다. 메뚜기가 삼킨 해조차, 하나님 손에 들어가면 회복의 시간이 됩니다. 회복은 시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다시 계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 선언입니다.

결론

요엘서는 회복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회복을 끝으로 두지 않으십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욜 2:28) 이 “그 후에”는 회복의 마침표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메뚜기가 삼킨 해를 회복시키신 뒤, 그 자리에서 다시 부으시고 다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공백기를 실패로 봉인하지 않으십니다. 눈물로 보낸 시간, 열매 없이 지나간 해까지도 회복의 대상으로 삼으십니다. 회복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시간을 다시 계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메뚜기가 삼킨 해 이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가운데 계시며, 그 후에 우리를 통해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최원호 목사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마무리 기도

하나님 아버지, 메뚜기가 삼킨 것처럼 허무하게 지나간 시간과 열매 없이 흘려보낸 해들 속에서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부르시는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상황이 아니라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고, 두려움보다 말씀을 붙들게 하시며, 과거의 실패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옵소서. 잃어버린 해를 회복하시는 하나님, 우리 삶 가운데 다시 거하시고 무너진 관계와 정체성을 새롭게 하시며 그 후에 우리를 다시 부어 사용하여 주옵소서. 모든 회복의 주권이 주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