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적인 선교’ 본받고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세상을 복음으로 변혁시켜야
지난번에 우리는 요한이 가르치는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이는 평소에 우리가 놓치기 쉬운 선교의 본질을 분명하게 가르치는 말씀이라 대단히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번에도 계속해서 요한이 가르치는 선교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먼저 요한은 ‘성육신적인 선교’에 대해 말씀하고 있음을 본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는데 말씀 자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이 바로 ‘성육신적인 선교’인 것이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되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병든 자, 고아와 과부와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누구에게든지 함께 하신 것이 바로 성육신적인 선교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선교사역도 예수님의 성육신적인 선교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들의 삶과 인격 속에 같이 들어가서 선교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이론적으로는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실제 선교 현장에 나와서 볼 때 참으로 쉬운 일이 결코 아니다. 선교의 대상들과 함께 거하는 일, 그들 속에 들어가는 일, 이런 말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나라와 종족과 언어와 문화와 습관과 종교까지 다 다른데 어찌 그들과 같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잠시 동안은 함께 거하면서 흉내는 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흉내만 낸다고 해서 되는 일인가? 최선은 다해야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성육신적 선교가 거의 불가능하다.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하실 수 있는 분이었다. 그러니 참 선교를 하려면 우리는 더욱 겸손해야 할 것이고, 더욱이 선교지와 그 대상을 더 알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다음에 요한의 가르침은 세상으로 보내심 받은 선교라는 점이다. 요한복음에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 것을 본다. 우리가 잘 아는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는데, 여기서 ‘세상’이라는 단어는 마치 양날의 검과 같은 말이라 할 수 있겠다.
그 하나의 날개는 세상은 영적 무지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에 대한 노골적인 적의를 나타내는 영역을 가리킨다(요 7:7, 8:23, 12:31, 15:18~19). 그리고 또 다른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는 모든 영역을 가리킨다(요 3:16~17, 10:36, 12:47). 먼저 이 후자의 세상이란 우리의 선교대상인 선교지(Mission field)를 가리키고, 또 전자의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거역하고 반역하는 지뢰밭(Mine field)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두 날개의 관점(2M)에서 선교를 보면, 우리의 사역에는 항상 긴장과 갈등이 있기 마련인 것이다.
또 한편 우리는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세상을 복음으로 변혁시켜야 할 자들인 것이다(요 17:16, 18).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혹은 세상과도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적극적으로 전해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의 구주’라고 표현했던 것이다(요 4:42). 또한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의 십자가 패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로마어, 이 세 글자로 기록했는데 이것은 일부러 예수님이 ‘세상의 구주’이심을 명백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요 19:20).
결국엔 요한이 ‘세상’에 대해 많이 언급한 것은 마태나 마가나 누가가 지적한 모든 민족이나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는 말씀과 마찬가지로 온 세상에 대한 선교의 명령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제까지 우리는 우리의 신앙 선배로부터 ‘세상’은 무조건 악한 존재, 피해야 할 존재로만 여겨 와서 세상과의 분리된 사고, 즉 이분법적인 사고와 신앙만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선교적인 사고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물론 죄악과는 분리해야지만, 선교적 관점에서는 오히려 죄악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다음엔 요한이 가르치는 선교를 4가지 은유를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본다.
첫째는 추수하는 일에 비유하고 있다. 요한복음 4장 35절에서,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냐... 너희는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고 했고 이 말씀 이후에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요 4:39).
둘째는 열매 맺는 일에 비유하고 있다. 요한복음 15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가 있다. 그리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서 열매란 성령의 열매를 말하며 또한 전도와 선교의 열매를 말한다.
셋째는 양치기의 비유이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을 먹이라’ 혹은 ‘양을 치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하신다(요 21:15~17). 이 양치기 사역은 우선은 그리스도인들을 양육케 하고 성숙케 하는 일과 관련을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울타리 밖에 있는 ‘다른 양’들을 울타리 안으로 인도하는 것, 곧 선교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16절에서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말씀한다. 이같이 양치기 사역은 단순히 양육과 성장의 차원만이 아니라, 세상에 흩어진 잃은 양들을 찾아 예수님의 양 떼가 있는 한 울타리 안으로 데려오라는 선교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넷째는 ‘큰 일’에 대한 비유가 있다. 요한은 사역자들이 추구해야 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에 대해 그것을 ‘큰 일’이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12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고 말씀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신 ‘큰 일’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이에 대해 많은 해석이 있으나 우리는 방금 읽은 12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겠다. 12절의 끝을 보니까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신다’는 이 말씀은 그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을 통해 구원 사역이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큰 일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약속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또한 장차 올 교회에 맡겨주신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일을 ‘큰 일’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은 ‘큰 일’은 성령의 능력으로만 일어나는 거듭남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이며, 이는 또한 기도의 응답으로만 이루어지는 선교의 큰 구원 역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큰 일’을 위해 오늘날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불러주셨다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쪼록 이 선교의 큰 일을 위해 한국교회와 우리 모두가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축복한다.
[말씀묵상기도]
1. 오늘 말씀을 통해 보여준 ‘성육신적 선교’와 ‘세상’을 향한 선교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하시고 그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2. 요한복음에서 요한이 가르치는 네 가지 비유의 말씀을 통한 예수님의 선교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지혜를 주시고 그것을 실천하는 능력을 주옵소서.
김영휘 목사/선교사
서울남교회 은퇴목사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운영위원
GMS 명예(순회)선교사
GMS 이주민선교협의회 자문위원
청년인턴선교 지도위원
시니어선교한국 파송 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