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께서 친히 가시리라
본문
출애굽기 33장 12-16절
서론
“임재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임재가 임하면 모든 것이 회복된다” 이제 이 본문 안에서 우리는 세 가지 핵심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왜 모세는 “임재 없이는 갈 수 없다”고 고백했는가, 왜 하나님은 회막에서 모세와 얼굴을 맞대고 말씀하셨는가, 왜 임재가 백성 전체를 ‘구별된 공동체’로 만들었는가입니다.
본론
Ⅰ. 임재가 떠나는 순간부터 모든 위기가 시작된다.
출애굽기 33장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순간을 기록합니다. 금송아지 사건은 단순한 우상숭배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정면으로 깨뜨린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위기는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않겠다.” (33:3) 이 한 문장이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뒤흔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생명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그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의 땅을 얻어도 임재가 없으면 그것은 광야와 같고, 적을 이겨도 임재가 없으면 승리는 공허하고, 축복을 받아도 임재가 없으면 그것은 짐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의 모든 여정에서 경험한 핵심은 하나였습니다.
우리 삶에 대입하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스라엘의 생명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그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이스라엘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삶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영적 원리입니다.
1) 목표를 이루어도 임재가 없으면 만족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해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그것은 광야와 같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동일합니다. 원하는 직장을 얻어도, 많은 소유를 가져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아도, 임재가 없으면 마음은 여전히 목마르고 불안합니다. 사람은 ‘성취’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임재’로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싸움에서 이겨도 임재가 없으면 승리는 공허합니다.
이스라엘은 종종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임재가 사라지면 모든 승리가 무너졌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싸움을 치르고, 문제를 해결하고, 어려움을 극복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성공해도 내 삶에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으면 마음은 비어 있고 승리는 무겁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재 없는 승리는 승리가 아니라는 진리입니다.
3) 아무리 큰 축복을 받아도 임재가 없으면 축복은 짐이 됩니다.
축복은 본래 기쁨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임재 없이 받는 축복은 부담이 되고, 축복 때문에 마음이 교만해지거나 불안이 오기도 합니다. 자녀가 커 가면서도, 집이나 재산이 늘어나면서도, 직분이 커지면서도, 임재가 없으면 축복은 관리해야 할 짐이 됩니다. 그러나 임재가 있으면 모든 축복이 평안과 기쁨의 통로가 됩니다.
4) 임재는 모든 것을 ‘성공’이 아니라 ‘은혜’로 바꾸는 힘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모든 여정에서 하나님의 임재로 설명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같습니다. 은혜가 임하면 광야 같은 직장이 은혜의 현장이 되고, 가정의 문제도 기도와 회복의 자리로 바뀌며, 실패조차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학교가 됩니다. 임재가 없으면 괜찮은 환경도 광야가 되고, 임재가 있으면 광야도 약속의 땅이 됩니다.
5)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핵심은 ‘무엇을 이루는가’가 아니라 ‘누가 함께하는가’입니다.
우리는 자주 목표·성과·결과를 신앙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작은 일도 큰 은혜가 되고,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큰 일도 무너집니다. 인생의 가치는 땅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동행의 깊이로 결정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다는 것입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도, 만나가 내린 것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인도한 것도, 시내산에서 말씀을 받은 것도 모두 임재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겠다.”
이스라엘은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약속은 약속이 아니며, 임재 없는 사명은 사명이 아니며, 하나님 없는 승리는 승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본문이 시작됩니다. 모세는 이 치명적인 위기 앞에서 지도자나 전략가가 아니라 예배자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임재 회복을 위한 가장 깊은 중보의 기도를 드립니다.
Ⅱ. 임재란 무엇인가? — 회막(7–11절)에 나타난 임재의 신학
본문 7–11절은 단순한 배경 설명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임재 신학을 압축한 장면입니다.
1) 임재는 “하나님의 가까움”이다 — 회막을 진 밖에 세우다 (7절)
모세는 회막을 진 밖에 세웁니다. 왜 진 밖입니까? 백성의 죄가 하나님과의 거리를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언약적·관계적 성격을 지닌 임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죄로 멀어진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모세가 회막을 세우자, 하나님은 그곳으로 임하셨습니다. 임재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죄 가운데 있는 백성을 하나님이 다시 회복하시는 은혜의 표현입니다. 회막은 “거리”를 상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아오심은 “은혜”를 상징했습니다.
2) 임재는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사건이다 — 구름기둥의 하강 (9절)
“여호와께서 구름기둥 가운데 내려오시고…” 여기서 중요한 동사는 “하강하다(야라드)”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내려오실 때는 두 가지 경우입니다. 심판의 순간과 은혜와 구원의 순간입니다. 출애굽기 33장은 은혜로 내려오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임재는 인간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절제된 영성 훈련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발적 은혜의 행위입니다.
3) 임재는 하나님이 얼굴을 드러내시는 친밀함이다 (11절)
“여호와께서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니…” 출애굽기 전체에서 가장 친밀한 구절입니다. 모세는 지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명 명령을 들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구와 대화하듯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대면하다(פָּנִים אֶל־פָּנִים)’는 하나님의 존재가 모세에게 막힘없이 드러나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는 구약에서 가장 강력한 임재의 형태입니다. 임재란 하나님이 단지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Ⅲ. 모세는 사명보다 하나님 자신을 원했다 (12–13절)
이제 본문은 모세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온 고백으로 넘어갑니다. 12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아룁니다. “주께서 나에게 이 백성을 인도하라 하셨사오나…” 이 말은 단순한 보고가 아닙니다. 지도자의 부담, 영적 책임,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이 담긴 영혼의 신음입니다. 모세는 지금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주님, 이 백성을 인도하라고 하셨는데…” “그러나 나와 함께 할 자를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시지 않았습니다…” 즉, 모세는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께, 사명보다 하나님 자신이 필요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사명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감당할 수 있다.
모세는 “사명이 무겁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 속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명의 무게는 사명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임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무겁습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 사역자의 마음을 그대로 대변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면 사명은 짐이 됩니다. 임재가 희미하면 백성은 감당할 수 없는 부담이 됩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으면 광야는 고통의 장소가 됩니다.
사명(예배, 찬양, 헌신, 봉사 등)은 원래 기쁨이어야 하는데, 임재가 사라지면 어느 순간 의무가 되고, 의무는 부담이 되고, 부담은 지침이 되고, 지침은 결국 사명의 길을 흔들어버립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사명은 짐이 아니라 특권이 됩니다. 백성은 부담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양이 됩니다. 광야는 공포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이 됩니다. 고난은 시련이 아니라 임재의 학교가 됩니다. 임재가 사명의 무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임재가 사명의 의미를 바꾸는 것입니다.
2) 모세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구했다.
13절에서 모세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나로 주를 알게 하소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가 방법을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리더들은 이렇게 묻기 쉽습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을 잘 다룰 수 있습니까?” “앞으로 어떤 전략이 필요합니까?” “어떤 시스템을 갖추면 성공합니까?” 그러나 모세는 단 한 가지를 구합니다. “하나님, 주님을 알게 하소서. 방법보다 하나님 자신을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길을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을 주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모세의 기도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사명보다 하나님 자신을 원합니다.” 이것이 진짜 영성입니다. 이것이 진짜 사명자의 중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오늘 우리에게도 사명이 있습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각자에게 맡겨진 광야의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때로는 그 사명이 너무 무거울까요? 사명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임재가 희미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임재 앞으로 나아갈 때, 모세처럼 “주님,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주님을 먼저 알게 하소서”라고 고백할 때, 그 순간 무거웠던 사명은 은혜가 되고, 부담되던 관계는 사랑이 되고, 두려웠던 미래는 인도의 길로 바뀌며, 막막한 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이 됩니다.
Ⅳ.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임재이다 (14–15절).
모세가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 자신’을 구했을 때, 하나님은 그 기도에 즉각적으로, 그리고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14절) 이 한 절에는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은혜가 응축되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명의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모든 시대의 성도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약속입니다.
1) “내가 친히 가리라” — 하나님의 얼굴이 함께하는 동행의 약속
14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여기서 ‘친히’(파나이 פָּנַי)는 단순히 ‘내가 직접’이라는 뜻을 넘어서 ‘나의 얼굴, 나의 존재, 나의 현현’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은 모세에게 단순히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도와줄게.” “내가 너를 지켜줄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여행의 동반자가 아니라, 너의 ‘존재의 동행자’다. 나는 어디든 너와 함께 가겠다.”
천사는 길을 준비할 수 있지만 하나님 자신만이 길을 ‘바꿀’ 수 있습니다. 천사는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지만 하나님만이 사막에 강을 내고(사 43:19) 광야에 길을 여시는 분입니다. 임재가 임하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광야는 길이 되고, 반석은 샘이 되고, 불가능은 약속의 땅으로 바뀝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변합니다. 지침은 힘으로 변화합니다. 모세가 원하는 것은 ‘길’이 아니라 길이 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길을 알려주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내가 친히 가리라”, 즉 “길의 주인이 너와 함께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 존재의 쉼, 영혼의 회복, 관계의 회복
하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쉼(누아흐 נוּחַ)’은 단순한 휴식이 아닙니다. 이 쉼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관계 안에서 누리는 존재적 평안, 하나님께 다시 돌아왔다는 영혼의 안식, 사명의 중심이 하나님으로 재정렬되는 내적 쉼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이 많아서 지친다.” “사람 때문에 지친다.” “사명이 너무 무거워서 지친다.” 그러나 성경은 훨씬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사람의 영혼이 지치는 이유는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임재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명은 의무가 되고, 관계는 부담이 되고, 예배는 형식이 되고, 현실은 두려움이 되고, 광야는 공포가 됩니다. 그러나 임재가 회복되는 순간, 사명은 특권이 되고, 관계는 사랑이 되고, 예배는 기쁨이 되고, 현실은 은혜가 되고, 광야는 성전이 됩니다. 임재가 쉼을 만들어냅니다. 임재가 영혼을 회복시킵니다. 임재가 우리의 존재를 쉬게 합니다.
3) 모세의 위대한 고백 — “임재 없이는 한 걸음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모세는 즉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보내지 마옵소서.” (15절) 이 한 문장은 모세 영성의 정수이며, 예배자의 고백이며, 우리가 드려야 할 가장 본질적인 기도입니다. 모세는 성공보다 임재를, 안정보다 임재를, 목적지보다 임재를, 사명 성취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재 없이는 축복도 축복이 아니고, 임재 없이는 사명도 사명이 아니고, 임재 없이는 약속의 땅도 광야와 같은 것입니다. 모세는 약속의 땅 자체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누가 함께하는지가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 임재 없이 가야 한다면 약속의 땅도, 성공도, 미래도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영성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의 기준입니다. 이것이 사명자의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한다면 오늘 우리도 모세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성공만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 동행을 주십시오.” “하나님,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가 아니라 “하나님, 임재 속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하나님, 약속의 땅에 보내주십시오”가 아니라 “하나님, 임재로 길을 열어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오늘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이 약속이 우리 가정, 사역, 교회, 인생 전체에 날마다 경험되기를 축복합니다.
Ⅴ. 임재는 하나님 백성을 구별하는 유일한 표지이다 (16절).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이자 가장 결정적인 고백을 드립니다. “주의 얼굴이 우리와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나와 주의 백성을 구별할 수 없나이다.” (16절) 이 말씀은 출애굽기뿐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성경 전체의 핵심 선언입니다. 모세는 지금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 하나님 백성을 구별하는 것은 능력도, 제도도, 성취도 아니다 — 오직 임재이다.
이스라엘을 ‘선민(選民)’으로 만든 것은 출애굽의 경험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특별하게 구별한 것은 그들이 받은 율법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숫자나 강함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7장 7–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사랑하시고…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많아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 즉,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과 함께했다는 사실 하나로 결정되었습니다. 군사력이 아니라 임재, 조직이 아니라 임재, 숫자가 아니라 임재, 전략이 아니라 임재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별하는 표지는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의 얼굴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2) 임재는 하나님의 백성을 세상 한가운데 ‘다른 존재’로 만든다.
세상은 성공으로 사람을 구별합니다. 학력, 직업, 재산, 성취, 영향력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는 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가?” “그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얼굴이 머무는가?” 출애굽기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었습니다. 환경은 다른 민족들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도 텐트를 치고, 음식을 먹고, 이동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이유로 완전히 다른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한가운데에 하나님의 구름이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별’(히브리어 팔라 פלא)입니다. 이 단어는 ‘놀라운, 기이한, 특별히 구별된’이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모세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존재가 됩니다.”
3) 오늘 우리의 교회도 임재로 구별된다.
이 진리는 오늘날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임재입니다. 아무리 크고 아름다운 예배당이라도 하나님의 임재가 없으면 회의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설교를 설교 되게 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임재입니다. 말씀이 임재 안에서 선포될 때 한 단어가 영혼을 깨뜨리고, 한 문장이 사람의 삶을 뒤집어 버립니다. 예배를 예배 되게 하는 것은 순서가 아니라 임재입니다. 찬양의 코드나 리듬이 아니라 그 속에 임재가 흐를 때 사람의 심령은 녹아지고 회복됩니다.
오늘의 교회가 잃어버릴 수 없는 첫 번째 요소는 전략이 아니라 임재입니다. 임재가 떠나면 교회는 조직이 되고, 예배는 행사로 바뀌고, 사명은 프로그램이 되고, 공동체는 모임으로 격하됩니다. 그러나 임재가 임하면 작은 교회도 능력 있는 교회가 되고, 연약한 성도도 강한 용사가 되며, 광야 같은 현실도 약속의 땅의 시작이 됩니다.
4) 하나님은 임재를 갈망하는 사람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내 앞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 너를 알리라.” 예배자가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네 기도를 내가 들었다.” “네 눈물을 내가 보았다.” “네 마음을 내가 안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사람을 먼저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유명한 사람도 먼저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임재를 구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의 마음이 하늘 문을 열며, 그의 기도가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며, 그의 갈망이 하나님의 발걸음을 붙잡습니다. 그래서 임재를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새겨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붙잡는 사람입니다.
결론
Ⅵ. 임재의 절정은 “영광을 보여 달라”는 갈망이다 (18–19절).
모세의 기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임재를 구한 모세는 이제 더 큰 갈망, 영혼의 가장 깊은 목마름을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1)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 임재를 넘어 ‘하나님 자신’을 구하는 기도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아뢵니다.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8절) 이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임재의 약속’에 대한 가장 높은 응답입니다. 모세는 말합니다. “하나님, 약속의 땅보다, 성공보다, 동행보다 더 원합니다. 나는 하나님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즉, 모세는 임재의 열매가 아니라 임재의 본체,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 자체를 갈망했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예배자, 진짜 사명자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2) 하나님은 모세의 갈망을 기뻐하시고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에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19절) 여기에는 세 가지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1)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겠다”— 하나님의 선하심 전체가 모세를 감쌀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선하심·신실함 전체가 쏟아지는 사건입니다.
(2) “내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하나님의 임재가 모세의 정체성을 새롭게 한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이며, 임재의 선언입니다. 즉,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누구인지 너는 듣고, 보고, 경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3)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노력의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 모세는 지금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그를 사로잡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갈망을 기뻐하셔서 임재의 깊이를 열어 주십니다.
3) 결론적으로, 임재의 끝은 ‘영광 갈망’이다. 
출애굽기 33장은 단순히 지도자의 기도나 백성의 회복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장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마지막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임재에 만족하지 말고 영광을 갈망하라.” 이제 모세는 사명의 성공이 아니라, 이스라엘 회복이 아니라, 약속의 땅 진입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원합니다. 이것이 예배자의 최종 목표입니다.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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