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뿌리 선교
손창남, <풀뿌리 선교>(죠이북스, 2023)

2. 근·현대에 등장하는 ‘풀뿌리 선교’

‘선교’란 말이 등장하기도 전(17세기)에도 ‘풀뿌리 선교사들’의 의해 기독교 신앙은 전 세계에서 확산되었다. 15~16세기 대항해(大航海) 시대에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중남미 대륙을 점령하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들을 중남미 각국으로 파송하였다. 이들을 ‘미시오(missio)’로 불렀다. ‘보냄을 받았다’는 뜻으로, 오늘날 ‘선교사(missionary)’였던 것이다. (서평자는 파라과이에서 사역을 시작할 때,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접경지역 예수회 선교공동체 유적지, 곧 유명한 영화 ‘미션(The Mission)’의 실제 촬영 현장을 둘러보았다.)

“풀뿌리 선교는 모라비아 교도들이 행한 해외선교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18세기 말 위대한 선교 시대가 도래하기 전 모라비아 교도들은 여러 나라로 나가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모라비아 교도들이 행한 선교는 18세기 말부터 등장한 개신교 선교의 일반적인 모델과는 전혀 다릅니다”(p. 97, 1733~1760년 사이에 무려 226명의 모라비안 선교사가 남아프리카, 북미, 자메이카, 수리남 등 10여 개국으로 파송되었다. 풀뿌리 선교의 전형(典型)이다).

일본의 구마모토 밴드·삿포로 밴드·요코하마 밴드

일본의 근대화는 1868년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본 선교는 풀뿌리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명치유신 전, 16세기부터 일본에서 활동하던 네덜란드 선교사에 의해 ‘난학’蘭學)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난학이란 네덜란드서 온 학문으로 의학·과학의 기술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연구하는 학문이다.

당시 일본은 서구문명의 과학·의학·수학·기술 분야의 많은 용어를 한문식으로 정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854년 일본 앞바다에 나타난 미국 함대의 무력시위는 일본이 새로운 세력에 눈뜨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천황을 등에 업은 신흥 사무라이 세력들이 득세하는 막부들의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였다.

2.1. 구마모토 밴드(1871년): 구마모토 양학교(熊本洋學校)의 제임스 대위

1879년 도시샤 양학교의 첫 번째 졸업생들. 도시샤에서는 양학교 기독 생도들을 구마모토 밴드라고 불렀다.
▲1879년 도시샤 양학교의 첫 번째 졸업생들. 도시샤에서는 양학교 기독 생도들을 구마모토 밴드라고 불렀다. ⓒ위키미디어
일본은 1858년부터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과 차례로 불평등한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외국인 거주지에 한해 종교활동의 자유를 보장했다. 1873년 2월에는 외국인 거주지의 선교사들의 금교령이 철폐되고 기독교 종교활동이 묵인되었다.

수도 동경에서 멀리 떨어진 규슈의 구마모토 다이묘들은 막부 정권이 붕괴된 후 새로운 시대를 맞아 인재 양성에 골몰하였다. 구마모토에 양학교를 설립하면서 미국인 제임스 대위를 초청하여 교장으로 임명하였다. 독실한 제임스 대위는 상당한 영향력을 끼쳤다.

“제임스는 구마모토 양학교가 설립되고 폐교될 때까지 5년간 혼자서 생도들을 가르쳤습니다. 1873년경부터는 기독교에 흥미를 가진 생도들을 위해서 자택에서 매주 토요일 성서 연구회와 기도회를 열었습니다. 그 결과 1875년 말경부터는 신앙을 고백하는 생도가 30~40명에 이르렀고, 기도회와 성서 연구를 통하여 신앙부흥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1876년 1월에는 35명의 생도가 하나 오카산에 올라가 다이묘 중의 다이묘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기로 서약했습니다.” (p. 109, 풀뿌리 선교사의 사역, 선한 영향력이다.)

한 사람의 헌신된 평신도(풀뿌리 선교사)가 35명의 젊은 일본 생도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웠고, 이들이 일본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로 맹세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학교 내 큰 파문으로, 이들은 도시샤 양학교로 옮겨 수업을 계속하였다. 도시샤에서는 이들을 ‘구마모토 밴드’라 불렀다.

2.2. 삿포로 밴드(1876년): 북해도 농업대학교의 클라크(William S. Clark) 박사

1878년 삿포로 농학교(현재 홋카이도대학)의 삿포로 밴드 청년들.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의 감화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예수를 믿는 자의 계약’에 서명했다.
▲1878년 삿포로 농학교(현재 홋카이도대학)의 삿포로 밴드 청년들.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의 감화로 기독교 신자가 되어 ‘예수를 믿는 자의 계약’에 서명했다. ⓒ위키미디어
삿포로는 일본 열도의 북쪽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곳이다. 홋카이도(北海道)는 신식 농법을 개척할 목적으로 북해도 농업국립학교를 1876년 설립하였다. 당시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립 농과대학교 학장이었던 유명한 농업학자인 클라크 박사를 초빙하고자 하였다. 클라크는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초빙을 거절하겠다고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렇지만 일본은 농업전문가가 필요하였기에 클라크를 초청, 비록 1년간 짧은 재직 기간에 북해도 농업대학 학생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풀뿌리 선교사의 귀한 모델임이 분명하다.

“그가 미국으로 떠날 때 배웅 나온 학생들에게 ‘소년들이여, 야망을 품으라’(Boys, be ambitious!)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 말은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P. 110-111)

우리가 많이 들은 이름,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는 북해도 농업대학 2기 입학생이었다. 이미 클라크 박사가 미국으로 떠난 후였지만, 그 대학의 1기생 15명에게 많은 권유를 받았다고 그의 자서전서 밝히고 있다. 이렇게 풀뿌리 선교의 영향력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된다.

2.3. 요코하마(Yokohama Band) 밴드(1872년):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학교, 기도회 모임

1887년 요코하마 밴드(일본 그리스도 공회)의 요코하마 해안교회 15주년 기념 사진. 요코하마 밴드는 선교사들에 의해 1872년 결성된 일본 기독 공회이다.
▲1887년 요코하마 밴드(일본 그리스도 공회)의 요코하마 해안교회 15주년 기념 사진. 요코하마 밴드는 선교사들에 의해 1872년 결성된 일본 기독 공회이다. ⓒ위키미디어
요코하마는 일본의 관문이다. 개신교 선교사의 정착지요, 일본 선교의 꽃을 피웠던 도시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의 귀족 자제들은 새로운 문화를 접하기 위하여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속속 입학하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일본 근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기독 청년들이 30명이나 세례를 받았다. 이들을 ‘요코하마 밴드’라 불렀다.

요코하마 항구는 미일 통상조약(1858)을 계기로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시작하였다. 최초로 도착한 개신교 선교사는 햅번(J. C. Hepbum, 1859년)이었다. 1873년 일본 정부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자 곧바로 선교사들의 요코하마 공회(Church of Christ)가 설립되었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요코하마를 거쳐서 한국에 도착했다. 아울러서 한국 최초의 한문번역성경인 ‘이수정 번역본’(마가복음)이 1885년에 요코하마에서 출판되었다. 이수정은 1881년에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교육, 농업, 상업, 과학 등 일본 근대 기술을 배웠다. 이수정은 북장로교 조지 녹스(George Knox)와 성경공부 중에 1883년 4월에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한 후, 곧바로 한글 성경번역을 시작하였다. (<한국교회와 자립선교>, 배안호, 한국학술정보, 2008, pp. 229-35)

3. 풀뿌리 선교의 시대적 요청 네 가지: ‘풀뿌리 선교가 답이다’

풀뿌리 선교는 시대적 요청이다. 본서의 제목 그대로 ‘시의적절하고’, ‘제도권 선교의 대안’임이 분명해 보인다. 4가지 시대적 요청을 요약하면, 첫째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지난 70년간 선교적 상황이 급변하였다. 지금은 기독교 선교에 대한 전 세계적인 저항이 만만치 않다. 민족종교들이 부활하고 있다. 선교사들에 대한 비자 제한 국가가 늘어나고 있다. 둘째는 세계적인 도시화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2050년이 되면 세계 인구의 80%가 도시에 살게 될 것이다. 도시화는 모든 선교 지역을 창의적 접근 지역으로 만들고 있다.

셋째는 세계 기독교 중심이 대거 남반구로 이동, 글로벌 사우스가 되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세계적인 인구 이동이다. 정치적·경제적 이유와 유학·이민으로 고향을 떠나 타문화에 거주하는 일이 일상화되고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가 벌써 250만 명이 넘었다. 한국은 이미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선교에 대한 세계적인 저항 가운데에서 풀뿌리 선교가 답이다”, ”세계적인 도시화 상황에서 적합한 풀뿌리 선교가 답이다”, ”기독교 중심의 남진 상황에서 적합한 풀뿌리 선교가 답이다”, ”세계적인 이주 상황에서 적합한 풀뿌리 선교가 답이다”. (저자의 외침에 아멘! 아멘!)

“이런 이유로 저는 풀뿌리 선교야말로 21세기에 달라진 선교환경에 가장 적합한 선교모델이라고 확신합니다. 문제는 그동안 엘리트 선교사를 파송하는 제도권 선교에 익숙한 교회와 성도들에게 풀뿌리 선교가 낯설다는 것입니다.” (p. 202, 서평자도 이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나가는 말(결론): ‘매우 전염성 있는 그리스도인들’ → 풀뿌리 선교사가 그들이다

“풀뿌리 선교란 구원이라는 큰 고리 중에서 한 부분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을 정직하게 읽으면 우리는 깨닫게 된다.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선교사이다!’ 일상의 삶과 일터가 선교의 현장이 된다.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최근에는 직업을 위해서 전 세계로 흩어진 그리스도인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필리핀 여성이 해외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숫자가 1,000만 명으로 추산한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의 수만 2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필리핀은 미국의 지배를 받아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따갈로그어 외에 영어를 매우 잘한다. 그래서 해외 취업에 큰 장점이 있다. 임금 착취·인종차별·성적인 학대 등으로 고난이 많지만, 100만 명 이상의 그리스도인이 해외에서 취업하는 기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홍콩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여성들이 1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이런 현상들은 점점 증가일로에 있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제도권 선교가 진행되었던 지난 200년의 선교 역사 속에서도 제임스 대위, 클라크 박사 등과 같이 해외 취업을 통해 이루어진 풀뿌리 선교 사역의 열매가 많았다.” (p. 120, 풀뿌리 선교가 이제는 대세임이 분명하다.)

풀뿌리 선교의 5대 특징: ‘거듭난 모든 신자는 선교사로 당당히 살아야 한다’.

저자는 풀뿌리 선교의 5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첫째, 선교를 감당하는 사람이 선교사란 정체성을 갖지 않는다. 둘째는 타문화에서 복음을 자발적으로 전한다. 셋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복음을 전한다. 넷째는 풀뿌리 선교사는 자신의 사역적 전문성을 갖고 있다.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진정성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양동철 형제가 번역한 <바이끄 이야기>(하늘씨앗 역간, 2022)라는 책에는 바이끄가 어떻게 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를 간증하고 있다. 신실한 무슬림이었던 바이끄가 그리스도인이 되기까지 그녀를 돕는 주변의 손길이 많이 있었다. ‘풀뿌리 선교’란 구원이라는 큰 고리 중에서 한 부분을 감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손창남 선교사는 마지막으로, 풀뿌리 선교의 모델은 4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는 ‘전염성이 높은 그리스도인’이었다. 지난 3년간 팬데믹 가운데 초창기의 바이러스가 강력한 전염성을 가졌던 것처럼 말이다. 둘째는 타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이다. 사도행전 10장의 백부장 고넬료와 베드로의 경우에서 보듯이, 헬라인과 유대인 사이의 높은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어야 할 것이다. 셋째는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필요하다. 지난 2,000년의 기독교 역사는 지상명령에 헌신한 사람들의 역사였다. 마지막으로, 섬김을 위한 유능함과 기쁜 마음이다. 자기가 하는 일에 전문성이 필요하다. 일상의 삶에서 믿음으로 넉넉히 이기며, 승리한 자는 내적 기쁨을 누리는 자다. 풀뿌리 선교사는 능동적인 그리스도인이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들에 가도 샌다’ → 선교지서 산다고 다 선교사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배(비행기)를 타고 선교지에 갔다고 해서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만약 자기의 본국에서 선교사가 아니라면 배를 타고 간다고 해서 변화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p. 215, 허드슨 테일러의 명언이다. 선교지서 산다고 다 선교사 아니다.)

배안호 선교사
▲배안호 선교사
서평 후기:

서평자도 손창남 선교사처럼 ‘풀뿌리 선교사’였다. 조이선교회(JOY)에서 20대 초부터 함께 제자훈련을 받았다. 총신대 신대원에서 공부하기 전 15년간 공기업과 대기업에서 근무하며 ‘풀뿌리 선교사’로 사역하였다. 1984~1985년에 극동건설㈜ 사우디아라비아 다란 건설 현장의 자재관리 직원으로서, 극동교회(지하교회)서 ‘담임 목양’을 감당하였다. 무슬림 종주국에서 매주 금요일 예배 후, 25명의 제직 제자훈련과 매주 월요일 밤엔 성경공부를 인도하였다. 1970~1980년대 중동 각국에는 한국의 건설회사가 진출한 각 나라, 도시에서 자신의 전문성을 갖고서 ‘풀뿌리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였다. 1984년에 결성된 중동선교회(Middle East Team)에 이사로 적극 참여하기도 하였다.

배안호 영국 선교사(Peterahba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