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보니게 족속 여인, 비록 신분상 구분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은혜에는 차이가 없다는 믿음 보여

복음이란 어느 특정한 민족에게만 제한되지 않고
‘만민’, 곧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까지 공유돼야 하는 것

성경을 선교적 시각으로 보기
성경: 마가복음 7장 24~30절 제목: ‘부스러기 믿음과 선교’

이번엔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선교’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에 대해 함께 고찰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부스러기 믿음과 선교’라는 제목으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한다. 마가복음 전체를 겉으로 얼핏 보기에는 예수님이 이방인들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보인다.

이방인에 대한 본문 말씀을 보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인 한 여인이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주시기를 간청하고 있다. 여기서 수로보니게라는 말은 ‘수로’ 지방의 ‘보니게’라는 뜻으로 지금의 시리아에 속한 ‘뵈니게’ 혹은 ‘푀니키아’ 지방을 가리키고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마가는 아프리카에 있는 ‘리비아’의 ‘보니게’ 지방과 혼돈을 피하기 위해 ‘수로’(시리아)에 있는 ‘보니게’라고 불렀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지 이 여인은 분명하게 말해서 이방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의 간청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을 하셨나? 27절을 보면 참 기막힌 답변을 하신 것을 본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고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은유적인 표현을 빌려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시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인 유대인을 가리켰고, ‘개’는 당시 유대인으로부터 개처럼 취급받았던 이방인을 가리킨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하여 경멸했고, 무시했다. 이것은 이방인의 입장으로 보면 얼마나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표현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인격적인 모독과 배타적인 편견에 대해 당사자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반응은 어떤 것인가? 그녀의 대답은 너무도 상상을 초월한 의외적이었다. 28절에서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라고 그녀 또한 은유적으로 대답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비록 유대인들의 오만함과 우월감과 배타적 편견이 있을지라도, 그리고 실제로 신분상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런 이유들 때문에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녀는 비록 신분상의 구분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은혜를 입는 데 있어선 결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는 믿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 당시 예수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으신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녀에게 하신 주님의 반응으로서는 오히려 그 이방 여인이 주님보다 더 선교적인 태도였다는 아이러니이다. 특별히 이 여인이 말한 대로 ‘부스러기 믿음’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인간적으로는 비록 이방인이므로 유대인보다 나중이라 할지라도, 그래서 비유컨대 마치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와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속 역사와 은총에는 전혀 차별이 없다고 고백하는 그녀의 견고한 믿음!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도 가져야 할 고귀한 믿음이다. 할렐루야!

그러자 예수님은 이 여인의 반응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셨나? 여인의 답변에 대해 부인하지 않으시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고 하셨다. 그녀의 믿음에 대해 예수님은 암묵적으로 지지하셨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으로부터 인격적인 모멸감과 훼손된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의치 아니하고 주님의 은총을 간구했던 그 여인의 요청을 결국 들어주셨다. 이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는 예수님이 겉으로는 이방인에 대해 별로 관심과 사랑이 없는 듯해 보이셨지만, 사실은 내면적으로 볼 때는 그렇지 않음을 실증시켜 준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으므로 이방인들과는 상종치 아니하였고 오히려 경멸했던 것이다. 그들은 오만과 편견에 빠져 자신의 특권을 곡해하며 이방인들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복음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있을 수 없음을 수로보니게 여인의 사건 속에서 밝히 보여주셨던 것이다. 그렇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는 남녀노소, 나라와 민족과 종족과 문화의 차이가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본문이 시작되는 24절을 보면, 예수님은 두로 지방에서 그 이방 여인을 만났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이후 예수님의 행로를 추적해 보면, 두로 지방에서 나오신 후 시돈을 지나 데가볼리를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렀다고 31절에 표현하고 있다. 이상의 경로를 보아 예수님의 행로는 모두가 다 이방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통과하신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추측하건대 이 같은 경로를 지나시면서 예수님이 그냥 지나치실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 경로를 따라 지나시면서 얼마나 많은 이방인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직접 목도하고 치유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많은 이방인이 치유받았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방인에 대한 관심과 선교는 분명히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마가복음 마지막 장인 16장 15절에서도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당부하신 것을 본다. 여기서 ‘만민’이라는 단어는 온 인류를 의미한 것이다. 이처럼 복음이란 어느 특정한 민족에게만 제한되지 아니하고 모든 나라와 민족에게까지 함께 공유되어야 할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더구나 이 내용이 특히 예수님이 부활하신 직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명령하셨다는 사실이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 역시 이방인에 대한 선교를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마가는 이 복음서를 기록한 동기가 고난 당하신 메시야와 종 되신 주님을 표현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 복음서를 기록한 배경과 시기가 로마의 박해와 순교가 극심했던 때였고,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믿음의 시련을 통한 신앙의 무장을 할 필요를 느끼시고, 그들에게 힘을 주고 믿음의 토대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이 복음서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 된 오늘의 교회 공동체도 역시 주님께 충성스러운 종이 되어, 어떤 어려운 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선교 사역에 보다 더 매진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가복음에는 그분의 종이 되신 ‘부지런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표현상으로 ‘곧’, ‘바로’, ‘또’라는 접속 단어가 계속 이어져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전부 41회 사용). 그만큼 마가복음서는 ‘행동의 복음서’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난 당하신 주님과 같이, 그리고 종 되신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스럽게 부지런히 일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함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김영휘 목사
▲김영휘 목사
[말씀묵상기도]

1. 마가복음에 예수님의 선교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어떤 내용인지를 알게 하시고, 특별히 이방인에 대한 그분의 관심과 사랑을 본받게 하소서.

2. 마가복음에서 종 되신 예수님을 표현한 것처럼 우리도 종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충성스럽게 일하는 종이 되게 하소서.

김영휘 목사/선교사
서울남교회 은퇴목사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운영위원
GMS 명예선교사
청년인턴선교사 지도위원
시니어선교한국 파송 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