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방전쟁은 공산주의 이상과 허구를 통한 ‘공산 독재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기초한 ‘천부 인권과 자유 수호 사상’과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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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국민방위군 사건이다. 중공의 대공세로 위기에 몰린 이승만은 ‘이 전쟁은 우리의 자유 독립을 위한 최후의 결전이다. 국민 총력전으로 반드시 승리하자’며 국회에서 1951년 1월 30일 법을 통과시키고 17~40세까지 50만 명을 징발하기로 하고, 3개월 예산으로 209억을 책정한다. 이때 반공청년들은 ‘나는 화랑도이다. 전쟁의 승리는 우리에게 있다. 국민과 민족을 위하여 이 한 몸 바치겠다’며 혈서를 쓰고 자원입대했다. 이때 이미 남한의 청년을 인민군이 전선에 투입시켰다.
그래서 국민방위군들을 속히 징집했다. 강압적으로 징집하고, 피하면 빨갱이로 몰고, 교육, 훈련, 숙소 없이 징집하니 장정들은 굶주리고 냄새가 진동했다. 씨름선수 출신인 사령관 김윤근은 별 셋을 달았지만, 간부나 장교 훈련을 받지 못한 반공청년단 출신이었다. 그는 방위군 운영비 중 3분의 1은 국회의원에게, 3분의 1은 군 지휘관에게 상납하고, 3분의 1은 유흥비로 썼다.
국민방위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추위에 굶고 병들어서 7만 명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고, 6만 명은 중환자가 되어 재기불능에 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입었다. 국민은 너무나 큰 충격과 실망으로 지도층과 이승만 정권을 불신하게 된다. 이는 전시에 직위를 이용한 독식 사건이었다. 정부는 김윤근 외 간부 5명을 즉시 사형 집행을 해서 국민을 진정시키려고 했다.
둘째,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다. 1950년 10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빨치산과 인민군이 퇴로가 끊겨서 지리산, 오대산, 태백산으로 숨어 후방교란과 보급 투쟁을 했다. 약 2만 명의 빨치산은 산간마을 사람들과 물과 고기 관계였다. 이들은 전선이 남한에 유리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4 후퇴를 하니, 밤중에 마을로 내려가서 사상 교육을 하고 식량을 강탈했다. 위험을 느낀 정부는 제11사단을 창설하고 9연대, 13연대, 20연대를 투입해서 빨치산 퇴치 작전인 후방전쟁을 시작, 빨치산 5천여 명을 사살하고 4천여 명을 생포했다.
최덕신 11사단장은 중공군 출신이다. 그는 9연대장과 사단 지휘관들에게 견벽청야라는 중공군의 작전을 명령했다. 이 작전은 먼저 전략 지점을 확보하고 적과 내통한 자와 집을 다 없애라는 잔인한 명령이었다. 3대대 지역인 신월지서가 빨치산의 습격을 받았다. 최 사단장이 명령한다. “견벽청야.”
다음날 신월국민학교에 와룡, 제현, 중유리 주민 1천여 명을 모이게 하고 경찰, 군인, 공무원 가족은 돌려보내고, 15세 이하 359명, 16~60세 300명, 61세 이상 60명 등 719명을 박산골에서 사살했다. 이 사건 후 밤에는 인공기를 달고 낮에는 태극기를 달던 산골 주민들이 정부와 한국군이 우리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빨치산에 적극 가담했다. 방위군 사건과 거창사건으로 부산의 피난 정부는 국민의 신임을 잃고 곤경에 빠졌다.
셋째, 부산 정치파동이다. 야당 의원들은 우남에게 정면으로 도전해 내각제를 주장하며 개헌을 요구한다. 서민호 의원이 현역 대위 서창선과 다투다가 사살했지만, 국회는 정당방위라고 석방 결의안을 가결시켰다. 서민호가 석방되자 백골단, 민족자결단 등이 국회 해산을 강하게 주장했다.
5월 25일 정부는 전라도, 경남에 빨치산 잔당 소탕 명목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서민호 의원을 체포하고 40명의 야당 국회의원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로 연행했다. 야당의 정치자금이 공산당에서 나온다는 것을 조사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개헌에 앞장선 서민호 의원을 살인자로서 오전에 심의하고, 오후에 언도하여 처형을 지시했다. 이 사태에 대해서 일부 대학생들과 이시영, 김성수, 조병옥 등 재야 60여 명이 부산 남포동 국제 구락부에서 반독재 규탄선언대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괴한들의 습격으로 대회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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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