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당시 후방에서 벌어진 민간인들의 잔인한 생존 전쟁
미국과 각국의 전쟁물자와 구호품으로 하루하루 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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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된 사상과 절박한 현실이 시민들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숨어있던 공산주의자가 활개 치며 나타나고 경찰, 군인, 공무원 가족은 숨고 도망갔다. 경찰서와 지서들마다 쇠사슬과 노끈으로 두 손을 꽁꽁 묶고 허리를 굴비 엮듯이 묶어서 공개재판과 처형을 기다리게 했다. 소위 인민재판이다. 동족이고 가족이지만, 사상이 다르고, 군인, 경찰, 반동이라고 14만 명이 처형되었다. 민족 내부에 깊은 증오감이 생기고 원수를 만들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인민군은 후퇴하면서 자기 가족을 밀고할까 봐 또 처형한다. 어제의 주인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 또다시 세상이 바뀌었다. 국군이 들어오니 공산주의자와 부역자를 처형한다. 원한과 증오가 범벅이 된 후방의 잔인한 전쟁이었다.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내주고 후퇴했다. 150만 시민 중 80만 명이 서울을 탈출한다. 전쟁터를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직접 체험하고 사상과 억지를 강요당한 시민들이 오직 살기 위해 갈 곳도 없이 정든 집을 버리고 무작정 떠난 것이다. 얼어붙은 한강 위로 솥단지와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정처 없이, 말없이 떠나갔다.
호주의 참전군인 노만 필의 증언이다. “겨울의 민간인, 피난민 모습은 너무나 비참하고 불쌍했다. 군인은 자기를 보호하는 무기가 있고 훈련을 받았지만, 한국인은 적군에게 너무나 시달린다. 부모 잃은 아이, 노모를 지게에 짊어진 가장과 산더미 같은 보따리를 머리에 인 부녀자가 정처 없이 길에서 헤맨다. 겨울의 눈 속에 맨발로 피난 가는 아이들이 잊히지가 않는다.
서울역발–대구역. 서울역에서 마지막 열차가 출발한다. 열차 안은 콩나물시루처럼 사람들로 가득하고 기차 지붕 위에까지 사람들로 가득하다.
엄청난 겨울바람 추위 속에서도 지붕 위에서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사람도 있다. 피난민들은 낯선 땅에서 춥고 허기진 고통의 시간들을 견뎌야 한다. 거리에 아사자를 막기 위한 우유 배급소가 생겼다. 죽음을 면할 한 끼의 먹을 것과 추위를 피할 잠자리가 최상의 낙원이다.”
시인 모윤숙은 “너무 배가 고파서 풀을 뜯어 먹으니 또 토하고 만다. 정신이 몽롱하고 반시체가 되어 있으니 애국심이니, 수치심이니 증오니 하는 감정이 다 사라지고 오직 밥 한 그릇이 소원이다”라고 했다.
평양은 생활고와 함께 공습의 이중고를 겪었다. 미군의 공습으로 평양시가 거의 폐허가 되었다. 남한과 다름없는 비참한 후방전쟁이다. 평양과 근방 도시에 인민군 병사, 트럭 1대만 보여도 폭격기 2~3대가 즉시 날아와서 포격했다. 공장, 시장, 행정시설, 등 모든 것이 지하로 숨었다. 이기기 위한 전쟁은 전선의 전쟁터뿐만 아니라 후방의 모든 것이 동원되었다. 여자는 물론 어린이까지 군수공장과 일터에 밤낮없이 강제로 동원됐다.
북한은 전쟁물자와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원래 남한보다 인구가 적고 젊은이는 모두 전쟁터로 나가고 공산주의가 싫은 월남자가 많았다. 식량은 제일 먼저 전선으로 보급되어도 턱없이 부족하니 중공에서 보충했다. 중공에서 넘어온 보급품은 기차나 트럭을 이용해 전선으로 이동한다. 미군 폭격기가 보급품을 강타하고 지나가면 즉시 다리, 철길, 도로, 복구대가 투입됐다. 인해전술은 후방에서도 계속됐다. 무너진 다리 복구에 밤낮없이 모든 인력을 동원했다.
중공의 보급지원 전쟁은 전투만큼이나 치열했다. 굶으면서 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엔의 공습은 북한의 보급품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전쟁 상황에 따라서 남북을 오르내리던 피난민의 행렬은 부산에 많이 정착했다. 47만 명의 도시가 순식간에 120만 명이 넘는 인구로 팽창했다. 골짜기마다 난민촌이 세워지고 공동화장실과 우물터는 긴 줄이 끊이질 않았다. 미군은 부산을 보급기지로 삼고 일단 15억 불(33조 원)의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전체 지원 규모는 50억 불(약 7조 원)이었다. 현재 가치로는 737조 원을 한국전쟁에 지원한 셈이다.
생존을 위한 후방전쟁에서는 지금까지 자신이 누구였든 무얼 했든, 신분과 위치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오직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한 일거리가 있어야 했다. 남한 경제는 이미 물가가 50~60배 올라서 정상적인 시장경제체제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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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