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 판문점 정전회담 모습
▲1951년 판문점 정전회담 모습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제3차 세계대전을 염려하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는 한국전쟁이 속히 끝나기를 바라면서 1951년 9월 17일 오타와에서 북대서양(12개국) 기구회의를 했다. 주요의제는 첫째 ‘서방의 군사력 증강을 위해서 이탈리아에 군사를 재무장한다’, 둘째 ‘그리스와 터키를 나토에 가입시킨다’는 것이었다. 유럽이 자체적으로 안보협력을 강화하자는 의도였다.

한국전쟁이 깊어지자, 미국은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는다. 패전 후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일본은 하늘이 준 기회라며(천우신조) 일본이 서방세계에 편입되기를 희망한다. 이즈음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미국은 핵전쟁을 대비하는 반공 훈련을 실시한다.

1951년 10월 20일 미국은 유엔을 통해서 휴전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제안한다. 판문점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면 개성은 북이 된다. 개성만 얻으면 중부, 동부를 양보할 각오를 하던 북한이 냉큼 판문점 회담에 동의한다.

우남은 이형근 장군에게 간곡히 지시한다. 개성은 반드시 탈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개성은 옛 고려의 성도이며 쌀과 인삼의 명산지이다. 개성은 정치적으로, 심리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승리의 상징 지역이다. 그러나 유엔은 협상의 전진을 위해서 개성을 포기하고 중부, 동부전선을 장악한다.

국군1사단과 한국해병대는 개성 코앞인 백천까지 점령하고 방어하고 있었다. 남북협상 대표로 북측은 남일이 협상을 주도하고 중공이 내면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한국은 유엔 대표부가 주도하고 백선엽 장군이 옵서버로 참석했다. 국군이 전투 지휘권을 유엔사령부에 이양하였기에 협상을 주도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1951년 7월 10일 북이 제안한 회담 장소는 개성 인삼 장인 한옥 요정이었다. 평화협상이니만큼, 지프차에 백기를 달고 오라고 해서 중공의 지원으로 북이 회담을 주도했다. 한국은 휴전회담을 반대하다가 나중에 겨우 참석해서 유엔과 북의 협상을 구경만 했다. 휴전 협상이 매일, 매시간 이어지고 있지만 전선에서는 연일 치열한 전투가 계속됐다. 땅을 뺏어야 우리 땅이 되고, 땅을 뺏어야 협상을 유리하게 주도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군과 유엔은 물량전이었다. 크고 작은 고지에 공중과 지상에서 무차별로, 무제한으로 폭격을 하고 나면 숨겨진 참호 속에서 중공군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오곤 했다. 조그마한 산 하나를 뺏기 위해서 한국군, 유엔군, 북한군, 중공군 수십만 명이 사라져갔다. 유엔군은 장비가 막강하고 중대, 분대, 각개전투 훈련이 잘되어 있었다. 한국군은 장비도 부족하고 전술, 전투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다. 저녁에 고지로 투입되는 보충병이 100명이면, 다음 날 아침에 80~90명이 시체가 되는 고지전이 휴전회담 내내 계속되었다. 한국군은 협상에서는 구경꾼이고 전투에서는 최전선의 무한 소모품이 되고 있었다. 오! 주여.

이렇게 겨울이 지나가면서 본격적인 고지전투가 벌어졌다. 한국군도 이제 체계가 잡혀서 장비를 다루고 전투에서 이길 줄 아는 전략을 구사하게 되었다. 중부 전선의 백마고지 전투는 한국군이 12번 밀고 밀리면서 7번의 고지를 탈환하면서 피로 지켜냈다.

동부 전선의 도솔산 전투는 미 해병이 포기한 24개 고지를 한국 해병대가 뜨거운 피로 모두 되찾았다. 중앙청의 태극기를 게양하며 서울 수복을 알리던 박정모 해병 소위는 도솔산에서 중대장으로서 마지막 고지를 탈환한다. 90%의 전우를 잃고 통곡하며 비문을 쓰고 추도사를 읽다가 실신했다. 문산이 뚫리면 서울에 포탄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우남은 서울만큼은 우리 해병대가 지켜주기를 바랐고, 무적 해병은 장단 전투의 지루하고 잔인한 싸움을 이겨내고 문산과 수도 서울을 지켜냈다.

휴전협상의 또 다른 문제는 포로 문제이다. 당시 양측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포로의 수는 중공군이 2만 명이었다. 유엔군이 북진할 때 중공군이 많이 항복했고 대게 장개석 군대였다. 북한군이 15만 명으로, 인천 상륙작전 이후 잡혔고 50% 이상이 강제 징집한 반공이었다. 유엔군은 이들을 7개 지역에 분산 수용했다가 거제도에 17만 명을 수용했다. 미군과 유엔군 포로는 약 2만 5천 명이 압록강 부근에 수용되었으며, 국군 포로는 약 7만 명이지만 인민군으로 전선에 보내고 4만 명을 수용했다고 한다.

사실 포로 교환 문제는 국제법에 따라서 제네바 규정대로 하면 된다. 너무 간단하다. 하지만 중공군도, 북한군도, 친공이 아닌 사람들은 공산 세계로 귀환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들은 이미 공산주의의 허구성과 이간질과 폭력을 경험했고, 귀환하면 반동으로 죽을 것을 알았다. 1951년 1월 4일 후퇴 이전까지 조용하고 질서 있게 순종하던 친공들이 거칠고 무섭게 변했다. 이들은 ①우리는 다시 북으로 간다 ②이 전쟁은 우리가 이긴다 ③투쟁 실적을 보고하라 ④사상 무장과 군사훈련으로 수용소를 장악하라 ⑤수용소에서 친공이 반공을 죽이라고 하여, 반공의 피로 인공기를 그려서 달아 놨다. 수용소 측은 즉시 친공과 반공을 분리해서 수용한다. 친공 숙소에 유엔 헌병이 들어가지 못했다.

1952년 5월 2일 돗드 수용소 소장이 친공에 납치되었다. 포로를 학대하고 부당하게 대우한 것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라고 강요받고, 1952년 5월 10일에서야 시인하고 풀려났다.

유엔은 친공을 포로가 아닌 시한폭탄이라고 보고 제네바 협정을 재고한다. 포로수용소의 친공은 ①법규를 무시하고 대항한다 ②사상 무장과 군사훈련까지 시킨다. ③적이었다가 아니라, 지금 적이다 ④각종 무기로 반공을 죽이고 폭동을 일으킨다 ⑤헌병이 진압하다 맞아 죽었다 ⑥판문점에 남일에게 무전으로 수시로 보고한다는 이유였다.

이범희 목사
▲이범희 목사
휴전회담에서 남일이 유엔 측에 거제수용소 상황을 항의한다. 유엔 측이 기겁했다. 유엔 총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이 떠나고 클라크 장군이 후임이 되었다. 그는 포로 협상과 군사분계선의 협상이 아닌 전선의 승리를 통한 휴전을 전력으로 삼는다. 협상 테이블에서 쓸데없는 입씨름만 하고 있을 때, 고지에서는 앳된 젊은 청년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갔다. 고지를 넘으면 또다시 고지가 기다렸다.

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