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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인민위원장은 이승엽이었다. 당 간부가 부족했다. 그는 6.25전의 남로당을 복구하고 재건한다. ➀북에서 파견된 간부 ②형무소에 있던 빨치산과 사상범 ③월북자를 당의 간부로 임명하고 보도연맹은 1949년 이후 사상전향자로 한다.
또한 북은 남을 식민지 취급한다. 황해도 인민위원회가 경기도를 담당하고, 평양은 서울을 담당하고, 남에 있던 남로당은 인정하지 않는다.
북은 서울 점령 즉시 ➀토지개혁을 실시하고 ②현물세(수확의 25% 세금) ③전시 동원령으로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의용군을 징집한다. 이들은 자아비판과 반동척결 등의 숙청으로 90일간 150만 명의 서울 시민이 50만으로 줄어서 숨죽이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다.
90일 만에 서울의 주인이 다시 바뀌었다. 강제의용군, 남북자 가족, 빨치산에게 보복의 역풍이 분다. 당시 공산군에게 부역을 당했다가 심하게 보복한다. 공산당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당한다. 전주, 대전, 충주에서 5천구 이상의 시체가 골짜기에서 나왔다.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이들의 손을 뒤로 묶고 이마를 쏴서 죽였다. 공산주의의 잔인함은 동족과 부모 형제를 가리지 않는다. 동족끼리 학살은 철천지원수 증오로 변한다. 도망자나 잔류자나 부역자는 이중의 고통을 겪었다.
1950년 10월 1일 38선은 이제 다시 원점이 되었다. 인천에 상륙한 지 15일 만에 전 전선이 38선으로 회복되었다. 38선 돌파는 미 8군단장 워커의 권한 밖이다. 맥아더는 기다리라고 하면서 다른 지시가 없다. 수도사단 3사단이 양양 38선에 도착했고 1사단이 개성에 도착했다.
국군 3사단장이 워커에게 요청한다. 전술적으로 기사문리까지 가야 병력 장병을 보호할 수 있다. 워커가 즉시 응답한다. 이건 정치가 아닌 전술이다. 이승만은 38선을 넘어서 두만강까지 가서 통일을 이루자고 다그친다.
드디어 맥아더가 38선이라는 단어는 쓰지 말라, 인민군이 항복할 때까지 전진하라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의 주력부대 알몬드의 10군단을 원산으로 보내 동부전선을 공격한다. 서부에는 워커의 8군단이 무섭게 진격한다.
이승만은 백선엽 국군 1사단장에게 특명을 내렸다. 미군보다 먼저 평양을 접수하라. 1사단의 백선엽과 8군의 미군이 경쟁적으로 진격을 한다. 미군은 트럭으로, 국군 1사단은 지름길을 도보로 진격한다. 하루 25km를 진격하느라 발이 피투성이가 되지만 ‘평양’ 하면 힘이 부쩍 솟았다.
10월 19일 국군 1사단이 제일 먼저 평양을 탈환했다. 미군 연락 장교 본 화이져 중위가 “사단장님 고향에 왔시오”라고 울먹이며 말한다. 그는 선교사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나 자라고 공부했다.
10월 20일 신 맥아더라인이 구축되었다. 압록강에 전선을 구축하는 것이다. 신 맥아더라인은 통일 작전이다. 이승만의 간절한 소원을 맥아더는 반드시 이루어주고 싶은 것이다. 이 무렵 김일성은 강계 부근에서 소련으로부터 받은 고급승용차까지 버리고 산악지역에 숨어 있다.
10월 24일 미 해병사단 5, 7연대가 하갈우리 장진호 북쪽까지 진격했다. 서부 초산에 국군 6사단, 동부 해산진에 미군 7사단이 도착했다. 더 이상 전진할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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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