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1880년대 조선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들
19세기는 서세동점(西勢東漸)1)의 시기로, 조선은 개항해야 하는 불가피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주적으로 개항하지 못하면서 강대국들의 침략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조선의 대외정책은 사대교린(事大交隣)2)의 관계와 국제질서를 표방한 전통적인 쇄국정책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경에는 중국을 통하여 이미 서양문화에 접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1831년 영국 상선이 충청도 해안에서 무역을 요청한 이후, 1845년에는 영국 군함이 다도해를 측량하고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후 프랑스, 러시아, 독일 등 여러 나라의 이양선(異樣船)이 출몰하여, 당시 국내적인 불안에 겹쳐 또 하나의 위협이 되었다.
1875년에는 민비 정권의 허점을 이용한 일본이 운양호 사건을 일으키고,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으로 제물포 조약이 맺어져 청이 조선의 종주국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결국 청의 알선으로 구미열강(歐美列强)과 차례로 수교를 맺게 된 것이다4).
이로 인해 조선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이 전쟁에서 일본이 일방적인 승리를 하면서 청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세계관에 일대 전환이 오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1876년 이래 쌓아온 일본의 이권(利權)이 확대되어 급기야는 일본이 독점하게 되었다. 이에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열강은 일본의 급속한 세력 확장에 놀라 간섭하게 되었다.
1902년에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일(英日)동맹이 맺어졌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미국과 비밀협약에 의하여 조선강점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1905년 7월에 얻어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에는 영일동맹을 개정하여 일본의 조선보호권을 영국이 인정하였다.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의 정치, 군사, 경제 등의 특수이익을 인정하게 되면서 조선에 대한 최후의 침략자로 일본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7). <계속>
[미주]
1) 서세동점. 서양이 동양을 지배한다는 뜻으로, 밀려드는 외세와 열강을 이르는 말
2) 사대교린. 큰 나라는 받들어 섬기고, 이웃 나라와는 화평하게 사귄다는 외교 정책
3)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대원군은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시키려다가 실패한 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여 1866년 9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하여 수천 명의 교도를 처형했다. 이에 프랑스는 자국(自國) 선교사의 처벌 등을 문제 삼아 7척의 군함으로 조선을 침략함으로써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침공을 받은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와 화친한 중국이 겪는 폐단을 지적하면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굳세게 싸울 것과 그들의 문호개방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강조했다.
병인양요에서 표출되었던 쇄국양이 정책은 1868년 오페르트의 남연군 분묘 도굴사건(南延君墳墓盜掘事件)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 미국의 침략을 물리친 후 한층 더 강화되어 그 내용을 비석에 새겼는데 이것이 척화비이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화강암으로 된 이 비석은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추지 않은 통비(通碑)로서, 서울의 종로사거리·강화·경주·부산진·동래군·함양군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 세워졌다. 비석의 높이는 서로 차이가 있으나(부산 180㎝, 서울 135㎝, 함양 120㎝), 넓이(40~45㎝)와 두께(25㎝)는 대체로 비슷하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어 갔을 때 일본공사의 요구에 의하여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 서울특별시 경복궁, 부산광역시 용두산 공원, 경상남도 함양군, 충청남도 홍성군 등에 남아 있다.
4) 조선은 1882년 미국과의 통상조약이 체결되고, 1884년 영국, 러시아, 1896년에는 프랑스와 통상조약이 맺어졌다.
5)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청군의 도움으로 진압한 민씨 정권은 예조참판 서상우(徐相雨)를 특차전권대신으로 일본에 보내 일본 측이 정변에 관여한 사실을 문책하는 한편, 망명한 김옥균(金玉均)의 소환을 요구했다. 이에 일본은 청을 압도하고 새로운 침략의 발판을 구축하기 위해 공사관이 불타고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조선 정부에 묻고, 조선 정부의 사죄와 공사관 소각에 대한 배상금 지불,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을 요구하는 교섭을 강경하게 진행했다.
일본은 갑신정변 직후 일본으로 피신했던 주한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를 조선에 파견해, 조선 측 회담 대표인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와 접촉했으나 타결책을 찾지 못하자 외무경 이노우에[井上聲]가 육군 2개 대대, 군함 7척을 이끌고 인천에 도착했다. 1885년 1월 2일 일본 전권대사 이노우에는 부대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와 좌의정 김홍집(金弘集)과 협상해 1885년 1월 9일 김홍집과 이노우에 사이에 전문 5조의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 내용은 ① 조선국은 국서를 보내 일본국에 사의를 표명할 것 ② 이번에 해를 입은 일본인의 유족과 부상자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또 상인의 재물이 훼손되고 약탈된 것을 변상하기 위해 조선국은 11만 원을 지불할 것 ③ 이소바야시[磯林] 대위를 죽인 범인을 조사·체포하여 엄중하게 처벌할 것 ④ 일본공사관은 새로운 장소에 옮겨 지어야 하므로 조선국은 마땅히 그 집터를 제공해 공사관 및 영사관으로 사용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할 것이며, 그 건축에 있어서는 조선국이 다시 2만 원을 지불하여 공사비에 충당할 것 ⑤ 일본 호위병의 병영은 공사관의 부지로 선정하고, 제물포조약 제5조에 따라 시행할 것 등이었다.
이때 조선은 김옥균의 소환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인도상의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한성조약으로 갑신정변에 대한 모든 책임은 조선에게 돌아왔고 일본은 이를 구실로 삼아 조선에 대한 침략을 한층 더 강화시켜 갔다. 이 조약에 따라 조선 정부는 12월 13일 이소바야시 대위 살해범으로 김대흥(金大興)· 원한갑(元漢甲)을 처형하고, 20일 서상우를 전권대신, 묄렌도르프를 부대신에 임명하여 국서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함으로써 갑신정변의 뒤처리를 둘러싼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는 표면상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일본 공사관 호위라는 핑계로 그가 데리고 온 병력 중 1개 대대를 조선에 주둔시킴으로써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날이 갈수록 강화되었다.
6) 중국 톈진에서 청나라와 여러 외국 간에 맺은 17개의 조약(1842)을 통칭하는 용어. 각 조약 사이에 내용상의 공통점은 없다. 아편전쟁 이후인 1840년대에 서양 열강들과 맺은 조약은 난징[南京]·광저우[廣州]·마카오 등지에서 조인되었다. 그 뒤 애로호 전쟁 때인 1858년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무력에 의한 위협에 굴복하여 처음으로 톈진에서 4개 조약을 맺었다. 이것은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의 4개국과 맺은 일방적 최혜국 조약으로서 이후에 계속된 불평등조약의 근간이 되었다. 그 후 1864년까지 독일·포르투갈·덴마크·네덜란드·스페인과 5개 통상조약을 맺었다.
1870년에는 이홍장(李鴻章)이 직례총독(直隷總督)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이 되어 외정(外政) 운영에 있어 사실상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면서 자신의 임지인 톈진에서 8개의 조약을 맺었다. 이중 청과 일본 사이에 맺어진 톈진 조약은 1884년 조선의 갑신정변이 청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간 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2개 대대의 병력을 조선에 파견했다. 그리고 양국 간의 무력충돌의 위험이 커졌다는 명분으로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전권대사로 톈진에 보내 이홍장과 담판을 지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확보하려고 했다. 그 결과 1885년 4월 전문 3개 조의 톈진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주요 내용을 보면 ① 청일 양군은 4개월 이내에 조선에서 철병할 것, ② 조선 국왕에게 권해 조선의 자위군을 양성하도록 하되, 훈련교관은 청일 양 당사국 이외의 나라에서 초빙하도록 할 것, ③ 조선에서 이후 변란이나 중요사건이 발생하여 청일 두 나라 또는 어느 한 나라가 파병할 때는 먼저 문서로 연락하고, 사태가 진정되면 다시 철병할 것 등이다. 이 조약의 체결로 일본은 갑신정변 실패 후의 열세 상황을 만회하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7) 김민영, 『한국 초대교회사』, (서울, 쿰란출판사, 1898), p.14-15.
김낙환 박사(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독교대한감리회 교육국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