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인도교(우측)가 폭파된 후 한강철교(좌측)가 폭파되고 있다.
▲한강인도교(우측)가 폭파된 후 한강철교(좌측)가 폭파되고 있다. ⓒ위키미디어
김일성은 북한을 단기간에 소비에트 식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비밀리에 2년여 동안 전쟁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드디어 1950년 6월 25일 새벽, 암호명 ‘폭풍’이 3.8선 전역에 하달되었다. 이들은 침략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31일까지 부산을 점령하고, 8월 15일 광복절 행사를 서울에서 한다고 계획을 세웠다.

왜 김일성은 잔인한 전쟁을 택했을까? 첫째, 모택동이 중국을 공산화하고 1950년 가을에 대만 정복을 계획하고 있었다. 둘째, 스탈린이 러시아에 소련 소비에트를 정착시켰다. 셋째, 월맹이 공산 통일전쟁을 한다고 했다. 넷째 박헌영과의 주도권 싸움에서 이겼지만, 남한에서 빨치산의 게릴라전 실패로 무력통일을 선택했다는 설이다.

1950년 봄 내내 국군유격대와 정보국의 수집된 3.8선 지역의 인민군의 움직임은 반드시 전면전이 준비되고 있다는 정보였다. 전쟁 징후를 포착한 국방부는 1950년 6월 10일 전군 비상 경계령을 내렸다. 그리고 전후방 지휘관의 임무를 교대하는 인사이동을 실시하였다.

전방에 새로 부임한 지휘관들은 전투, 전술, 지형, 사병 특징 등 지휘 능력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다. 정보국의 끊임없는 전쟁 징후 보고에 1950년 6월 18일 미 군사고문단장 덜레스 일행이 3.8선을 시찰하고 국회에 다음의 내용으로 보고했다. ➀전쟁징후는 있지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②적에게 T-34 탱크가 있지만, 한국은 70%가 산이고 다리가 좁아서 쓸모가 없다. ③남한 정부와 단체가 자꾸 북진통일을 외치니 탱크, 비행기 등의 무기를 지원할 수 없다. 또한 차량 연료와 실탄 등은 3일간의 방어용만 지급한다. ④1949년 이후 3.8선은 항상 충돌이 있었다. 이승만 정부의 과장된 보고이다.

이렇게 해서 국군은 6월 24일 토요일 3.8선 경비대의 3분의 1이 농번기 휴가에 들어갔고, 외출과 외박으로 병력이 거의 2분의 1 상태가 되었다.

1950년 6월 24일 오후 6시, 용산 장교 구락부 개관식으로 국방 요원과 미 군사고문, 전후방 지휘관 및 각급 장교가 초청되어 밤늦게까지 파티가 계속되었다. 인민군은 6월 23일부터 3.8선에 대기하고 있다가 25일 새벽 4시에 공격 명령을 받았다.

이들은 포와 기관총으로 아군 막사와 시설물을 정확히 조준 사격했다. 이들의 공격에 국군의 진지와 지휘소, 통신소, 유류고 등이 백발백중 맞았고, 국군은 저지선에 가기도 전에 맞아 죽었다. 적은 탱크, 포병, 기관총을 현대적으로 무장한 훈련된 전투병들이었다. 반대로, 아군은 포탄, 실탄은 없고 총은 3.8식 일제 구식 총이었다.

한국 정부는 즉시 미국과 유엔에 지원을 요청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주말 휴가를 갔다가 애치슨 국무장관한테서 보고를 받았다. 트루먼은 6월 25일 오후 2시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를 소집시키고 워싱턴으로 급히 왔다.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인도, 소련인데, 소련 대사가 불참했다. 주미 장면 대사가 한국의 위급사항을 설명하고 간절히 도움을 요청했다. 미주리 변방에서 워싱턴의 주인이 된 트루먼은 반드시 공산주의를 꺾는다고 일갈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은 즉시 전쟁을 중지하라고 경고하고, 유엔은 즉시로 한국을 돕기로 결의했다. 장면 대사는 미국이 먼저 무기 원조와 군사를 파병해달라고 간청한다.

인민군은 유엔의 경고를 무시하고 무섭게 공격해 왔다. 이미 포천이 무너졌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의정부 전선으로 직접 가서 전투를 독려하지만 적의 전차를 부술 대전차포 포탄이나 지뢰가 없었다. 장병들이 무장해야 할 장비나 소총 탄약도 부족했다.

정부는 지휘권을 상실하고 갈팡질팡한다. 임시 국무회의와 국회가 소집되어 모두 서울 사수를 결의했다. 피난민이 서울로 구름처럼 들어오고 소문은 이미 적이 미아리를 넘었다고 했다. 서울 사수를 결의한 국무, 국회, 각급 기관장들이 슬며시 사라졌다. KBS 라디오에서도 지금 용감한 국군이 해주로 진격하고 있으니 동요하지 말라고 반복한다.

인민군이 6월 27일 오전 1시에 미아리 고개를 전차를 앞세우고 넘어왔다. 그리고 27일 새벽 2시 28분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 미처 후퇴하지 못한 국군과 군사 장비와 150만 명의 서울 시민이 적의 수중에 갇혔다. 한강 다리에서 국군과 시민이 수없이 죽고 다쳤다. 27일 새벽 5시 중앙청, 경찰청, 방송국, 형무소, 한국은행 등이 점령을 당했다. 27일 오전 11시 30분에는 중앙청 깃대에 인공기가 걸렸다. 평양방송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다고 호들갑스럽게 전했다.

이범희 목사
▲이범희 목사
김포-시흥-수원으로 제1 방어선이 설치되었다. 6월 29일, 동경에 있던 맥아더 원수가 유엔 총사령관의 임무를 받고 한국전선을 직접 시찰한다고 전용기 바탄호를 타고 수원 비행장에 내렸다. 이승만 대통령과 무초 대사가 마중하고 영등포 언덕에서 강 건너 적의 동태를 살폈다. 오후에 채병덕 총장이 전시 상황과 병력배치 상황을 보고했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