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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유럽의 동부전선에서 싸웠다. 그 대가를 유럽에서 찾고자 했다. 소련은 3,400만 명이 참전하고, 2천만 명이 전사했다. 이제 유럽은 영국과 프랑스의 것이 아니다. 유럽은 이제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에 속하게 된다.
독일은 전범 국가이다. 네 조각으로 분리해서 공동으로 관리하기로 한다. 베를린도 분할해서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가 관리하기로 한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출신 성분이 다르다. 뿌리가 다르니 한 나무가 될 수가 없다. 미국은 자유시장경제, 자본주의이다. 소련은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공산주의이다.
오스트리아도 독일에 협력했으므로 같은 전범 국가이다. 오스트리아도 분할 통치하기로 하고 미국의 워커 장군이 점령군 사령관으로 진주한다. 소련도 즉시 진입한다. 미국과 소련은 유럽 땅 차지하기의 경쟁을 벌인다.
1943년 버마전선은 태평양 전쟁의 전선이다. 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노리고 일본이 기득권을 가진 영국과 미국과 벌이는 전쟁이다. 일본이 연합군의 배후를 차단하는 전략으로 버마전선까지 확대해서 전선은 무제한의 소모전이 계속됐다. 이 무렵 유럽전선은 고착상태였다.
미국은 중국의 장개석 군이 일본과 좀 더 적극적으로 싸워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장개석 군은 일본과 싸우면서 중국 내의 모택동 공산군과 힘겹게 싸운다.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이집트 카이로에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총리,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전후 일본의 처리 문제를 논의하며 일본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반환하고 한국을 적절한 시기에 독립시키며 일정 기간은 신탁통치를 한다고 결의한다.
1943년 11월 28일부터 12월 1일까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이란의 독립과 주권, 영토 보전을 약속하였고,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감행키로 하고 총사령관으로 아이젠하워 장군을 임명했다. 소련은 대일 참전을 독일 패배 후에 하겠다고 하며, 한국의 독립을 스탈린도 묵시적으로 동의했다.
1944년 유럽전선이 급박하게 돌아간다. 한국 문제는 잊히고 의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은 태평양 전선에 맥아더를 참전시킨다. 미국은 필리핀을 50년간 통치하고 있었다.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크림반도의 휴양도시 얄타에서 미국 루즈벨트, 영국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세계평화를 위해서 소련의 협력이 필수라며 스탈린을 우대했지만, 이것이 미, 소 냉전의 시발점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여기서 미국은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약속받았고 한국이 분할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얄타회담 2개월 후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미, 소의 세계평화 협정안은 불투명해지고 말았다.
1945년 4월 25일부터 6월 26일까지 연합국 50개국이 국제 연합헌장에 서명하였고 10월 24일 발효되었다. 전후 구상에서 한국은 미, 영, 중, 소가 신탁통치 한다고 약속했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했다. 81일간의 참혹한 전쟁으로 오키나와 주민 8만 명, 일본군 12만 명, 한국인 700여 명이 전사하면서 일본 총리가 1억 명 옥쇄를 선언했지만, 1945년 6월 드디어 미군이 오키나와 점령에 성공했다.
미국은 소련에 대일참전을 요청하면서 극동전선 48도선(신의주 위쪽)을 소련에 양보했다.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 트루먼, 영국 애틀리, 소련의 스탈린이 전후 세계 질서를 논의하고 스탈린에게 대일 참전을 촉구했다. 이때 트루먼이 전문을 읽고 악인은 훌륭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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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 8월 9일 소련 대일참전, 8월 15일 10시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