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이후 1945년 9월 9일,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든 시민이 광복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광복 이후 1945년 9월 9일,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든 시민이 광복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위키미디어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이날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미, 소의 연합군 합동회의에서 소련은 어디에서 병력을 동원할지 이야기하고, 해군과 공군의 작전지역을 제안했다. 미국은 어떻게 병력을 운용할지 이야기하고, 해군과 공군의 작전지역을 의논한다. 소련은 만주와 북한 지역으로 진격하며 공세를 편다. 일본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소련군은 전투를 하지 않고 만주와 북한을 점령한다. 북한은 남녀노소가 만세를 부르며 소련군을 해방군이라고 환영한다. 미국은 소련군의 진격속도에 당황한다.

1946년 8월 11일 오전 2시, 미국은 소련에 38선을 제의한다. 소련이 남하를 고집하면 36선이든지 미국의 전함이 상륙할 수 있는 부산만이라도 원했다. 소련이 미국의 38선 제의에 즉시 응답했다.

미군은 부산에서 1천km나 떨어져 있는 오키나와의 미 24사단에서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한국에 즉시 투입하기 어려웠다. 소련은 약속을 지키고 38선 이북으로 돌아간다. 소련군은 북한에서 해방군으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다. 미군은 오키나와에서 일본 본토 진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힘없는 일왕의 무조건 항복 소리가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이었다. 일본은 갑자기 패전국이 되고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승리자가 되었으며, 한국은 36년 만에 굴욕에서 해방된다. 희망과 환희의 시간이다. 온 나라가 감격에 겨워서 만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러나 광복은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닌, 주어진 것이다. 내가 찾은 것이 아니라, 남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다. 임시정부나 광복군이 국가적으로 연합군에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광복의 기쁨 속으로 미군과 소련의 태양이 떴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의 치스타코프는 “소련은 북한의 협조자요 해방군”이라고 연설한다. 북한 국민이 대대적으로 소련군을 환영한다. 전 소련 정치국 위원 이반은 당시에 북한의 환영에 대해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소련군을 크게 환영한다고 느꼈다”고 했다. 소련은 북한을 직접 통치하기보다 인민조직에 통치권을 넘긴다.

1945년 8월 26일 소련은 평양에서 일본에 항복 조인식을 마치고, 북한 인민위원회에 자치권을 넘긴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 미주리호 선상에서 미국은 일본에 항복조인식을 받는다. 미국은 스스로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가장 강력한 군사력이 있고, 가장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으로 자유세계의 경찰을 자처하고, 자부심으로 전쟁에서 흘린 피를 씻어낸다’고 한다.

소련은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의 북쪽 국토를 원했지만, 미국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미국의 단독 승리를 주장한다.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미국 군함이 입항한다. 건국위원회 여운형과 조선공산당 이승엽이 마중 나왔다. 9월 9일 미군정 보고서는 3명의 건국준비 위원이 와서 미군정에 협조자와 비협조자를 구분해 주고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에는 이미 건국위원회가 있고 135개의 지방자치 조직이 생겨났다. 미군정은 건국위원회도, 임시정부도, 인민위원회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날 서울 총독부에서 일본의 항복조인식이 있었다.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받고 한국이 구경한다. 일본의 통치권을 미국이 인수한다.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간다. 승리의 축포도, 환희의 나팔 소리도 없다. 광복이 아니라 미군정의 시작이다. 38선에서 미군과 소련군이 반갑게 만난다.

이범희 목사
▲이범희 목사
내 나라 내 땅이지만 무심한 38선은 민족의 단절로 이어졌다. 교통이 두절 되고 전신, 전화의 통신망이 끊겼다. 당시 북한의 총발전량은 180만kW였고, 남한에 보내는 전력이 7만 5천kW였다. 석탄도 북한에서 하루에 13회 차씩 들어오다가 전기와 함께 끊겼다. 남한의 800개 공장, 중요한 화학제품 공장이 250여 개였지만, 겨우 100개 이하가 가동되었다.

38선을 경계로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 해방 후 1년간 하루 1천여 명이 목숨을 걸고 넘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는 이렇게 분열로 굳어졌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