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18일 덜레스 미 군사 고문단이 38선을 시찰했다. 덜레스 고문 오른쪽에 쌍안경을 든 신성모 국방장관, 왼쪽에 손을 들어 설명하는 유재흥 7사단장
▲1950년 6월 18일 덜레스 미 군사 고문단이 38선을 시찰했다. 덜레스 고문 오른쪽에 쌍안경을 든 신성모 국방장관, 왼쪽에 손을 들어 설명하는 유재흥 7사단장
1949년 6월 30일을 미국 정부는 미군 철수 만료 시점으로 잡았다. 미 합참의장은 남한도, 대만도, 아시아에 줄 전비가 없다고 했다. 대통령(트루먼)은 선거를 앞두고 전쟁터의 아들들을 가정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적극 반대했다. ①미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고 ②UN에 탄원서를 보내서 처리해 달라고 하고 ③학생과 시민들을 동원해서 철수 반대 가두 시위를 하고 ④백방으로 외교 전략을 편다.

미, 소의 3.8선에서 한국군과 인민군이 마주 보고 대치한다. 옹진반도와 개성의 17연대는 적의 3여단 병력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보급과 병력이 모두 배로 이동하다 보니 모든 게 적에게 노출된다. 한국군은 경비대이고, 인민군은 전투부대이며 탱크부대와 육전대까지 투입되었다. 미, 소가 철수한 3.8선에서 남과 북의 충돌이 곳곳에서 국지전으로 벌어진다.

북한은 1949년 내내 무장 게릴라를 보낸다. 급기야 지리산 전역이 낮에는 남한이 되고 밤에는 북한의 차지가 된다. 10여 차례에 걸쳐 2,400여 명의 무장 게릴라가 선동하고 공격하고 폭동을 일으키고 여, 순 반란에는 2,500명이 합세하여 2만여 명의 무장 반란군을 지휘했다.

김일성은 고무되어서 빨치산으로 부르게 하고 강동정치학원의 정예 무장 공비를 보내서 좌익마을과 조직을 가지고 남한 공산화 투쟁을 가속시킨다. 북한 지역에는 서쪽에 구월산 유격대가 있고 동쪽 지역에 호림 부대가 비밀리에 활동했지만, 다 잡혔다. 북한은 남한이 침략을 시도할 것이라고 선전하고 모두 총살시켰다.

1949년 5월 4~5일에 국군 6사단 8연대 1대대장 표무원 소령과 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 부대원 400여 명을 이끌고 월북해서 평양에서 김일성 지지 시가 행진을 했다. 여기에 남로당은 이제 전쟁 없이 남한은 적화통일 시킨다, 남한 인민이 모두 공산당을 원한다고 믿었다. 김일성은 조국통일 민족주의 조직인 강동정치학원을 정예화한다. 대남첩보 정보부대와 대남 게릴라전투 부대를 김일성 직속 기관으로 삼고 오직 이승만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한다.

남한은 1949년 8월 26일 국군 장교 안두희에 의해서 김구가 암살된다. 사회가 극도로 혼란에 빠진다. 1949년 9월 소련이 원폭 시험에 성공하고 미, 소의 냉전이 시작된다. 1949년 10월 미국이 지원한 중국 장개석 정부가 대만으로 쫓겨 가고, 10월 10일 천안문광장에서 중국 인민공화국이 선포되고 중, 소 우호동맹을 맺고 소련이 원조를 약속했다. 중국은 아시아 공산당의 맹주가 되고 평양에선 중국공산당 환영대회를 연다.

1949년 11월 평양에 김일성 동상이 제막되면서 김일성은 북한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다. 김일성은 남한을 전쟁으로 점령하겠다고 하고, 박헌영은 인민 봉기로 게릴라 점령을 주장했지만 김일성의 무력 점령이 결정되었다.

1950년 3월 3.8선의 전쟁 징후가 농후해졌다. 국군은 3.8선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이승만은 미국에 군사와 무기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은 북침을 염려하며 무기를 지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에치슨 국무장관은 한국이 외부의 군사 침략보다 내부의 적을 경계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1950년 6월 18일 덜레스 미 군사 고문단은 3.8선을 시찰하고 나서 전쟁징후가 농후하지만 보고서에는 전쟁이 없다고 한다. 한국에는 산들이 많고 다리가 좁아 소련제 탱크는 무용지물이라고 보고했다.

이범희 목사
▲이범희 목사
하지만 당시 북한군 작전국장 유상철 소장은 선제타격 작전계획으로, ①제1단계는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해서 국군 주력을 섬멸하고 3일 내 서울을 점령하고 수원-원주-삼척선으로 진출하고 ②제2단계는 전과 확대 및 예비대를 섬멸하고 군산-대구-포항까지 진출하고 ③제3단계는 소탕 및 남해안 진출로 부산-여수-목포로 전개한다는 전략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또한 1950년 5월에 인민군공격부대는 이에 전진 배치를 마친 상태였다.

이솝 우화처럼 늑대가 온다고 외쳤지만 거짓말로 여기고, 미국과 한국 정부도, 군 고위급도, 국민도 믿지 않았다. 전쟁은 무르익어 가지만 폭풍의 시기는 전쟁계획자만 알고 있었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