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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년, 해방 3개월이 지나도록 독립에 대한 소식이 없고 오히려 신탁 소문이 나오니 온 나라가 술렁이었다.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미국, 중국, 소련 외상이 모여서 한국의 신탁통치를 보도한다. 미국은 신탁으로 정치를 안정시키고 자유 민주주의를 심겠다는 전략이고, 소련은 한국이 공산주의가 우세하니 소비에트화가 된다고 자신했다.
이에 대해서 김구는 ‘또 다른 핍박이다’, ‘제2의 독립운동을 하자’며 반탁의 지도자가 된다. 박헌영은 반탁에서 소련의 지령을 받고 찬탁을 하며, 공산정권 수립을 노력한다. 여운형은 반탁을 하며 통일 임시정부를 구상한다. 김규식도 반탁을 하며 통일 임시정부를 구상하고 명분과 실리를 추구한다.
1945년 12월 송진우는 암살되고 친탁, 반탁의 희생자가 된다. 미군정은 박헌영을 감시하며 일제 관리와 경찰을 그대로 쓴다. 행정 경험이 필요하지만 하지는 국민의 반대로 곤경에 빠진다. 이미 자치위원회가 145개나 조직되어 움직이고 있었고 지방 유지, 지주, 민족주의자들이 1945년 12월부터 1946년 1월 2일까지 좌, 우익이 크게 대결을 벌인다. 어느 지역위원회는 군정을 도와서 치안을 유지하고 어느 지역위원회는 공산당으로 투옥된다.
1946년 2월 14일, 하지는 민주위원을 제안하고 자신의 자문위원으로 선임한다. 2월 15일 좌익은 민주위원의 대립으로 민주 민족전선을 결성한다. 평양에선 조만식 장로를 인민위원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소비에트식을 반대한다. 소련은 조만식 선동에 실패하자 즉시 그를 제거한다.
1946년 2월 28일 소련은 임시위원회에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세우고 동유럽식 소비에트 이식을 북한 쪽에서 지체 없이 진행한다. 임시위원회는 사회주의 체제를 선포하고 첫째 무상몰수-무상분배로 소작인들의 절대 지지를 받는다. 둘째, 모든 기업을 국유화하고 생필품을 배급한다. 또한 예금, 통신, 전기 등 모든 산업을 체제 유지의 동력으로 삼고 인민위원회에서 모든 것을 장악하고 결정하기로 한다. 그리고 소련의 대리인 김일성을 세워서 북을 소비에트로 발표하고 인민위원회, 노동조합, 부녀자연맹, 청년연맹을 조직해서 정치 권력을 대리인 김일성에게 넘겨준다.
1946년 11월 3일 인민위원 선거가 시작되었다. 유권자의 의사가 아닌 찬반선거이다. 사회주의 계획이 북이 이식되자, 재산몰수와 토지개혁에 견딜 수 없는 지주, 관리, 신앙인, 지식인이 월남한다. 김일성은 이를 의도적으로 막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짐이 되는 정적을 남한에 맡긴다고 생각한다. 남한으로 온 월남인들은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된다. 월남인 100만 명과 해외귀순자 30만 명 대부분이 서울에 사는데, 경제가 너무나 어려웠다. 이들은 미군정에 불신이 커지고 정치 소용돌이에 빠졌다.
1946년 10월 대구철도노조가 남로당의 지령으로 폭동을 일으켰다. 경찰 200명, 공무원과 시민 1,000명이 폭도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남로당은 군경, 대학, 공장, 군정 어디에나 침투되어 무장폭동을 선동했다. 미군정은 남로당 체포 명령을 내린다.
박헌영은 월북하고 여운형은 좌우합작을 시도한다. 하지는 좌우합작을 기대한다. 이승만은 좌우합작의 잘못됨을 직접 미국에 가서 설득한다. 이승만은 미국의 후원 없이는 정치권력을 얻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조정을 받는 자가 아니라, 정치와 정책을 가진 고도의 외교수단가이다. 좌우익의 뿌리 깊은 반목은 정치, 노동, 학교, 사회, 지식인, 예술인까지 갈라놓았다.
1947년 3월 1일 3.1절은 좌우가 따로 행사하고 남대문에서 충돌했다. 동유럽은 소비에트화 되고 소련의 위성도시가 되었다. 서유럽은 미국의 먀샬플랜 지원으로 새롭게 재건되고 있었다. 좌우의 냉전은 유럽에서 성공하고 미국은 남한에서 곤경에 빠진다. 좌우합작을 주장하던 여운형이 암살되고 장덕수도 암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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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