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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토지개혁이 늦어지고 전기가 공급되지 않고 경제가 너무 어려웠다. 미군정의 정치 고문은 사상의 자유를 허락하고 공산당을 억압하지 말라고 한다.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았다고 불만을 키우고 이간질하는 세력이 너무나 많았다.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좌익(공산주의) 선동과 폭동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1948년 9월 미국은 남한을 방어하는 최소한의 경비대만 요구한다. 도별로 경비대대를 창설하고 전투 훈련은 시키지 않는다. 군사 지원도 없이 3.8선경비대는 일본군이 버리고 간 군복을 입고 일본 소총으로 무장했다. 탱크도 지원하지 않고, 정찰기는 단 3대이고, 바주카포 몇 문이 전부였다. 3일간의 유류만을 지원해서 북진통일을 막는다고 했다. 미 군사고문단의 보고는 남한이 북진통일을 외치며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다. 트루먼은 선거를 앞두고 미국 청년을 집에 보낸다고 공약을 하며 철수를 준비했다.
1948년 10월 2일, 제주 진압부대인 육군 14연대가 여수에 주둔했다. 이 부대 김지회 중위와 지창수 상사가 야밤에 국군 장교 20여 명을 학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경찰 일부와 주민들이 합세하여 순천까지 좌익들이 장악한다. 반란군이 2만 명까지 늘어났다. 군경 일부와 주민 일부가 좌익이 이기기를 응원한다.
인민위원회가 들어서고 인공기가 게양되고 인민재판으로 우익 인사와 가족들이 수없이 처형된다. 산골짜기에 하루이틀 사이에 우익 인사의 시체가 30명, 50명, 70명씩 쌓인다. 대구 6연대에 좌익이 특히 많았고 지리산, 백운산, 태백산, 오대산 지역이 남한에 40%의 좌익 게릴라 거점지역이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경악했다. 정부는 여수, 순천 지역에 군 병력 4분의 1을 투입해서 진압한다. 시가지는 지옥의 거리가 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군대 내에 대대적인 색출 작업으로 전체 군 병력의 10분의 1이 되는 좌익 세포들을 색출해서 물리치고 제거한다. 이승만 정부의 숙군작업은 군대 내에 반란을 막는 신의 한 수가 되었다.
1948년 12월 소련군이 북에서 인민공화국 수립 100일 만에 철수한다. 소련의 대리자 김일성을 세워서 북을 소비에트화하고 소련 철수로 미군도 철수시킨다는 작전이다.
1949년 3월 북의 인민대표단 주석 김일성이 부주석 겸 외상인 박헌영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소련의 외무장관의 극진한 환영을 받으며 스탈린과 만나서 경제협력과 비밀리에 군사원조를 약속받는다. 후르시쵸프의 회고록에 따르면 북한이 남한보다 정치, 경제, 조직에서 월등하다고 판단했고, 김일성이 남한을 총으로 통일하겠다고 하면서 명령만 내리면 남한 좌익이 모든 기관을 점령하고 즉시 승리한다고 장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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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전투고문단 70여 명이 투입되고 소련제 전차로 105, 166, 165 전차사단이 설립되고 기갑부대가 창설되었다. 북한의 각 지역에 청년과 부녀자, 학생까지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북한 주민들이 왜 군인과 병기가 자꾸 들어오느냐 불안해하자 김일성이 인민위원회는 적을 막기 위해서 준비한다고 하면서 누가 적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계속>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