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전현충원의 독립유공자 묘
▲국립대전현충원의 독립유공자 묘
독립운동은 명성황후 시해를 계기로 일어난 1차 을미의병(1895)을 시작으로, 을사늑약에 저항하여 일어난 2차 을사의병(1905), 군대해산으로 출발된 3차 정미의병(1907) 등으로, 20년에 걸친 의병전쟁으로 약 20만 명이 희생되었다.

1918년 2월 11일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 선언은 약소 민족에게는 복음으로 받아들였고, 1919년 2월 8일 선언에 이어 국내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남녀노소, 종교를 초월하여 100만 명이 참여한 1,600회의 거국적 비폭력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으로 결집된 민족의 역량은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임시정부는 상해에서 중경까지 10여 곳을 옮겨 다니며 27년간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독립유공자의 국립묘지 안장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57년 1월 순국선열의 안장이 가능하도록 군묘지령이 개정되었지만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안장이 되지 못하다가, 1962년 원호법이 개정되고 독립유공자에 대한 서훈이 이루어지고 1962년 3월 11일 김재구 지사가 처음으로 안장되었다.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철원 애국단 사건으로 4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곳 독립유공자 묘소는 1964년 3위를 시작으로 1966년 28위, 1967년 14위, 1968년 20위를 안장했는데, 이후 김동삼, 노백린, 박은식, 서재필, 신규식, 이상룡, 장인환, 전명운 의사 등의 유해가 봉환되면서 애국지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성지가 되었다.

독립유공자 묘소는 국립 현충원 외에도 효창공원, 북한산 국립공원, 망우리 역사문화공원, 도산공원, 신암 선열공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소에 산재해 있다. 효창공원에는 김구,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안중근의 묘소가 있다. 안중근의 묘는 가묘이다. 북한산 국립공원(수유리) 선열묘역에는 김도연, 김범진, 김병로, 김창숙, 서상일, 신숙, 신익희 신하균 부자, 양일동, 유림, 이시영, 이준, 조명욱 등 15위가 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문일령, 박찬익, 방정환, 서동일, 오세창, 유상규, 한용운 등 15위가 있다.

서울 강남 도산공원에는 안창호, 이혜련 부부 합장묘가 있다. 안창호 유해는 망우역사문화공원에서, 부인 이혜련 유해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모셔 왔다.

국립묘지로 승격된 대구 선암 선열공원에는 임용상 의병장을 포함하여 52위가 모셔져 있고,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에는 어네스트 베넬(영국)과 호지 헐버트(미국) 등 외국인 독립유공자가 안장되어 있다. 그 외에 대부분의 독립유공자는 선산이나 연고지 등에 안장되어 있다. 권세연(양주), 기삼연(장성), 김동신(장수), 김복한(홍성), 김좌진(보령), 김창균, 김석현(나주), 김하락(서천), 노응규(서천), 민금효(원주), 민용금(산청), 박상진(경주), 박차정(밀양), 손병희(서울 우이동), 신채호(청원), 신남일(장수), 안계홍(보성), 양진애, 양상기(광주), 여운형(서울 우이동), 유근(용인), 유인석, 유흥석(춘천), 유중악(가평), 이장년(상주), 이규감(아산), 이석용(임실), 이석(홍성), 이소응(제천), 이육사(안동), 이춘영(양평), 김백선(양평), 이한응(용인), 전태산(장수), 정환직, 정용기(영천), 채광묵(용인), 최익현(예산), 허위(구미) 등이 대표적인 경우이며 김약연, 송몽규, 윤동주 등의 경우와 같이 해외에 있거나 소재가 확인되지 않은 묘소도 적지 않다.

독립운동은 애국계몽운동, 의병전쟁, 의열투쟁,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군 무장투쟁, 미주 독립운동, 국내 사회·문화투쟁 등으로 이어졌으며, 1930년대 이후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극심해지는 가운데 침체기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국내 항일운동은 노동운동, 문화운동, 민족말살정책 반대투쟁 등으로 전개되었다.

조선말 외세의 침탈로 위기를 맞은 유림은 위정척사파와 개화파로 나뉘어 활동하다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으로 합류한다. 위정척사파는 재야 유림이 중심이 된 것으로, 중화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충군, 애국사상에 기초한 것이고, 개화파는 집권 세력이 중심이 된 개혁세력이었다. 개화파는 1882년에 김홍집, 김윤식, 어윤종과 같은 온건개화파와 김옥균, 박병효, 홍영식, 서광범 등의 급진개화파로 분화되었지만, 서재필에 의해서 독립협회운동으로 개혁사상이 전파되고 민권의식이 성장할 수 있었다.

1908년 영국의 데일리 메일 조선 특파원 프레드릭 멕켄지의 독립운동 목격담 ‘한국의 비극’에서는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사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나라에 버림받는 것보다 애국자로 죽는 것이 낫습니다”라는 조선 의병들의 결의를 전하고 있다.

이범희 목사
▲이범희 목사
서울 현충원 대한독립군 위령탑에는 ‘독립군 숙의’라는 글이 있다. 조국의 독립을 간절히 기원하며 숙의하는 독립군들의 비장한 모습이다. 이들을 본받아 나라의 안정과 번영과 세계선교를 위한 성도의 비장한 기도가 끊이지 않아야 한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