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부터 매주 월요일 ‘2080 사역자양육세미나’ 진행
“미래 영혼구원 사역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일터교회”

그리스도인의 일과 일상생활이 신앙과 하나로 통합될 수 있기 위한 교계의 관심과 노력이 이어지는 가운데, 삶의 현장인 일터에서 신앙과 일을 통합시키고 이를 확장하게 하는 사역자를 양성하는 일에 주력하는 기관이 있다. 솔로몬교회성장연구소는 올해 1월부터 매주 월요일 ‘일터교회 2080 사역자 양육 세미나’를 열어 본격적으로 한국교회 내 일터교회와 일터신학 확산에 앞장서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20여 년간 일터 사역을 하고, 현재는 솔로몬교회성장연구소 소장이자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일터교회신학 겸임교수로 활동하는 김동연 박사를 만나 지나온 삶의 여정과 일터교회 개척의 필요성 및 전략에 대해 들어보았다.

김동연 소장은 “모든 일터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경영하면, 그곳 ‘일터교회’에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부흥·성장을 주실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김동연 소장은 “모든 일터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경영하면, 그곳 ‘일터교회’에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부흥·성장을 주실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김동연 소장 제공
ㅡ믿음 생활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저희 가족은 부모님을 비롯하여 6남매 모두 신앙이 없는 가족이었다. 저는 전형적인 유교 집안에서 자라면서, 교회나 성당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제 삶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먼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부르셨다. 그 크신 은혜로 살아왔음을 깨닫고 지금까지 늘 감사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성인이 되어서 1986년 4월 군대를 전역하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을 무렵, 저는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4년과 1989년 2번의 한국 방문을 하던 때였고, 천주교 고백 기도문의 한 구절 ‘내 탓이오’ 운동을 펼치는 시기였다. 고 김수환 추기경이 계실 때 바티칸 교황이 한국을 첫 방문을 할 무렵부터 잠실성당을 다니게 되었고, 가톨릭 성서의 교리를 배우면서 1988년 3월 20일 ‘베드로’란 세례명을 받았다. 당시 매 주일 미사에 참여하다가 세상일에 바쁘다는 이유로 점차 미사 참여 횟수가 줄면서 인생에 큰 변화 없이 신앙에 냉담해졌다.

그러다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것은 아내를 만나면서부터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99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서울 방배동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지금의 아내가 결혼식에 앞서 결혼 조건으로 기독교 주일성수를 지키자고 했다. 사랑하는 아내의 말에 순종하여 매주 주일예배뿐 아니라 수요예배, 금요찬양예배, 매일 새벽기도, 특별새벽기도, 작정기도 모임까지 참여했다. 그 무렵 아내의 태중에 있는 아이와 함께, 방배동 소재 고 신현균 원로목사께서 개척해서 설립하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함해노회) 소속 성민교회를 섬기게 되었다. 그 이후로 방배역 3번 출구에서 3년 6개월간 노방전도를 했고, 서울 양재동 소재 드림의교회,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역삼지회와 서서울지회 소속으로 섬기게 되었다.”

ㅡ기독교인이 된 후 어떤 삶의 변화가 있었나?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고 난 뒤 금방 잊어버렸어도 제 영혼은 살이 찌고 꾸준히 성장해 왔다. 저는 지금까지 하루 세 끼, 1년이면 1,090끼, 육십 평생 6만 5천여 끼의 식사를 했지만 기억나는 식사가 많지 않고, 내 몸에 남아 있는 음식도 없다. 그러나 그 6만 5천여 끼 때문에 잘 자랐고 잘 살았으며 삶의 현장인 일터에서 일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어머니가 콩나물을 키우시는 것을 보면, 콩나물에 물을 주어도 금세 밑으로 물이 빠져 나왔다. 그러나 콩나물은 쑥쑥 자란다.

또 우리의 손에 성경이 전해지기 위해 믿음의 선진들이 어떤 몸부림을 쳤는지 알게 된 뒤,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설교를 힘써 들었다. 그리고 말씀을 깊이 묵상했다. 영어로 성경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영국의 선구적 종교개혁자 위클리프(John Wycliffe)라는 사람이다. 당시엔 성경이 라틴어로만 되어 있어 평신도들은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다. 위클리프는 22년에 걸쳐 영어성경을 완성했지만, 성경을 번역했다는 이유로 이단으로 몰려 정죄 받고, 출교당하고, 심지어 옥살이까지 했다. 사람들은 이 번역된 성경을 구하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고, 번역된 영어 성경을 읽었다는 이유로 화형을 당했다. 로마천주교회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다 하여 ‘성직자의 보물이 평신도들의 장난감이 되었다’라고 분노하기까지 했다. 이 귀한 성경이 지금 너무나 흔해졌다고 그 가치가 떨어진 것은 아니었으므로, 저는 성경을 보다 더 가까이하기 시작했다.”

ㅡ일터 사역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먼저, 성경을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한 동기가 있다. 1998년 비즈니스 법인을 설립하여 경영하면서 2009년 무렵 시니어들로 조직된 150명이 공동체를 이뤘을 때의 일이다. 세상의 모든 교육과 일터 현장이 그렇듯이 비교의식과 눈치 보기, 자존심 등으로 인해 어려움이 생겼고, 무엇보다도 일터 현장을 지배하는 세상의 신은 돈이었다. 맘몬신으로 인해 냉랭한 이 일터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없이, 양육강식처럼 상대를 누르고 나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예수님의 사랑이 일터 가운데 심어지면서, 천국 같은 일터로 회복이 되어야겠다’라는 굳은 믿음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일터에서 공동체원이 자기를 낮추고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구체적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주님께 간구하며 기도로 매달렸더니 그 응답을 들려주셨다.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된 제 안에 있는 ‘구원의 확신과 변화된 모습’에서 찾으라고 하신 것이다. 그 즉시 일터에서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강력한 응답으로 여기고, 이를 실천하게 된 것이 2010년 1월 첫 수요일부터 지금까지 매주 수요일 점심시간에 드리고 있는 일터교회 예배(채플)이다. 오늘 이 순간 삶의 현장인 일터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회사’(엡 5:10)가 되기 위해 시작한 예배였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기 전까지 연인원 450여 명의 외부강사 목사님과 크리스천 전문경영인, 해외선교사님들을 일터예배에 강사로 초청하여 매주 예배를 올려 드렸다. 그런 가운데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고, 신학박사 학위는 경기 용인 동백지구에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실천신학(Th.D) 목회학을 취득했다. 논문 제목은 ‘일터교회 사역 유형별 영성 성숙도 연구(일터 신학 관점에서)’이다.”

ㅡ일터 사역을 하던 중 신학 공부를 하고 목회자가 되었다. 신학 공부를 한 이유가 있나.

“광나루 소재 장로회신학대학교와 방배동 소재 백석대학교 실천대학원에서 신학공부를 하면서 신앙을 몸소 체득하고, 더욱 확고히 거듭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다. 자랑스러운 장로교회의 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사람이든, 교회든, 역사든, 나라든, 주인은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하나님의 주권신학이다. 하나님의 주권신학 안에서도 교단마다 신학적 입장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신학은 복음의 중심에 서는 신학이다. 또 극우와 극좌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좌우를 품고 아우르는 신학이다. 개인 구원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사회적인 이슈를 경홀히 다루지 않는다. 교회의 목회를 존중하면서도 사회 정의를 당당히 감당하는 교회이다.

외국에서 복음을 전하러 온 선교사님들이 우리나라에 그토록 많이 세웠던 ‘학교, 병원, 복지재단’들을 6.25 이후 장로교회의 분열 과정에서 어떻게 관리했을까. 선교사님들은 한결같이 동일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바른 신학의 터 위에 서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교단 산하 모든 학교와 병원, 복지재단을 한국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는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주신 선교사님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계를 복음화 하는 복음의 신앙 노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신학교에서 배운 수많은 내용은 일터 현장에서 사역하면서 일터신학을 정립하는 데에도 소중한 밑바탕이 되었다.”

ㅡ일터 사역을 하면서 경험한 가장 큰 위기는 언제였나?

“2010년 일터에서 첫 예배를 드릴 때였다. 당시 전체 구성원 150명을 분석해 보니, 70%인 105명이 비기독교인이었다. 예배 후 이 중 10여 명이 대표이사실로 방문해 당장 예배를 중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때 저는 ‘이 회사의 설립자이자 경영자로서, 헌법에서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를 갖고 있다. 또 대한민국에서 인정하는 건전한 교단에 소속돼 있고, 설립자의 경영철학으로 일터 가운데 내가 주인이 아닌 주님을 주인공이자 경영자로 모시고 싶다. 그래서 이 예배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중단할 수가 없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예배를 통해 일터에서 본인들이 불이익을 받는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고려해 보겠다’라고 덧붙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10여 명 모두가 예배를 드린다는 이유로 이 회사를 그만 두겠다고 했다.

일터에서 영적 싸움을 할 때마다 ‘나는 누구이며 하나님은 누구인가?’, 그리고 ‘방해꾼은 누구이며 방해 전략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다(출 3:11~20). 이런 일이 있을 때 세속적으로 판단하면 낙담하고 힘들고, 매출이 줄어들지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시작한 이 일터예배를 2010년 한 해 중단 없이 48번을 기쁜 마음으로 올려드렸다.

2024년이 되어 14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주님께서 더 풍성하게 채워주시고 회복되는 사랑의 공동체로 일터를 세워 주셔서 늘 항상 ‘오직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고백한다. 이런 일터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130만 개 법인 가운데 크리스천 경영자가 일하는 20만 개 법인에 일터교회 개척을 도우려 한다. 지역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 하시고, 믿음으로 잘 훈련된 크리스천 경영자들이 주의 종인 풀타임 일터 목사(사목)님을 모시고, 일터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영혼구원을 하는 것이다. 또 사목은 회사 구성원들의 인생과 삶의 고민과 갈등, 우상과 같은 자녀와 돈 문제, 주일을 범하고 십일조 결단을 못 하면서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문제 등 경제문제, 부부문제, 결혼문제, 자녀문제, 부모문제, 일터에서의 갈등문제 등을 비공개로 상담하며 회복시키는 일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역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시너지 효과는 크다. 일터에서 만연하는 상처와 습관적인 죄, 부서 간 비협력, 비효율 문제를 바로잡아 효율성이 극대화되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이와 함께 도덕적 해이로 인해 부정한 행위를 하던 구성원들이 ‘하나님의 청지기’로 회복되는 놀라운 일을 경험할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일터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경영하면, 그 ‘일터교회’에서 대한민국의 새로운 부흥·성장을 주실 것으로 확신하며 기도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