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4월 27일 원수부에서 조칙을 받들어 나랏일을 위해서 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장충단을 세웠다.
﹡1901년 2월 16일 ‘장충단을 특별히 만들어서 제사를 지낸 뒤로 군사들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이 감격하고 고무되었습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출범과 함께 군경 희생자 묘지 조성을 검토하던 중 6.25 전쟁이 발발했다. 급한 대로 지금의 장충단 공원일대에 안장을 했지만 이내 한계에 봉착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대량으로 발생한 전몰장병의 유택을 마련하는 일은 시급한 과제였다. 군 당국에서 대구, 경주 등 낙동강 지역에서 후보지를 물색하다가 1953년 9월 지금의 위치로 확정하였다.
﹡1954년 3월 묘지조성공사가 시작되었다.
﹡1956년 4월 군묘지령이 제정되고 군묘지(국군묘지)라는 이름으로 개원되었다.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와 태평양 국립묘지를 참고했다고 본다.
﹡1965년 3월 군묘지령에서 국립묘지령으로 개명되었다. 군인과 경찰관 외에 독립유공자와 국가사회 공로자들이 포함된 첫 국립묘지의 탄생이다.
﹡1986년 국방부 산하에 국립 대전 현충원이 설치되었고, 1995년 서울시에서 관리하던 4.19묘지가 국가보훈처 소속으로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1990년대 말 6.25 참전 용사들이 전반적으로 노령화되고 안장 수요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영천과 임실을 시작으로 국립호국원이 조성되었다.
﹡2002년에는 5.18과 3.15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2005년 국립묘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보훈처가 주관부처가 되었다. 현재 국립묘지는 국립현충원 2개소(서울, 대전), 국립호국원 6개소(영천, 임실, 이천, 산청, 괴산, 제주), 국립4.19, 3.15, 신당 선열공원 등 12개소가 있다. 또한 50여 개의 합동묘역이 있으며, 12개소가 다시 국가 관리묘역이 되었다.
그리스 중동부에는 2,500년 이상 된 기념비가 있다. BC 480년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죽은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전사를 추모하기 위해서 세워진 기념비이다. 기념비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지나가는 이방인이여, 가서 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전해주오. 그들의 명을 받들어 여기 누워있노라. 고’(고대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
기념문은 기억의 중요한 수단이다. 쇠와 돌에 새기는 것은 마음에 새기는 것과 같다. 로마는 그리스의 기억 기술을 강화해서 국민을 통합하고 번영시켰다. 스피키오와 세네카는 기억술의 대가였다고 한다. 공간의 시각화를 통해서 기억을 강화하고 통합해서 국가 발전으로 승화시켰다. 그래서 서양에는 전쟁기념관을 비롯한 수많은 메모리얼이 세워져 있다. 메모리얼은 추모의 언어를 시각화한 기억의 공간이다. 메모리얼에 새겨진 추모의 전에는 기억을 소환하고 활성화한다.
우리나라는 사적지, 기념관, 기념비, 현충탑 등의 독립운동시설 973개소와 국가수호시설 1,286개소 등 2,259개의 메모리얼이 있다. 동작동 국립묘지는 민족사의 혈맥을 이은 분들과 만나는 장소이다. 그분들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자리를 내준 거룩한 응달이다. 그래서 국립묘지에 들어서면 무거운 분위기 속에 마음가짐을 새롭게 한다. 여기에는 5만 4천 기의 묘비가 있고 봉안된 위패와 안치된 유골이 19만 1천여 개 위에 이른다.
제2묘역 맨 앞자리에 채명신 장군의 묘비명은 “그대들 여기 있기에 조국이 있다”이다. 용문산 전투에서 전사한 학도병은 그의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길손이여 내가 왜 누었느냐고 묻거든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 누었노라고 전해주오” 따뜻한 새봄이다. 국립묘지에서 그들을 한번 만나보자! 우리의 정체성을 알게 될 것이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