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조선인들이 남대문(숭례문)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조선인들이 남대문(숭례문)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있다. ⓒ독립기념관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은 평화적인 시위였지만 일제는 무자비하게 총칼로 진압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에 고무되어 있던 한국인에게 일제의 탄압적인 무단통치와 고종황제 독살설에 대한 확산으로, 1919년 3월 1일 이후 국내와 해외 한인 지역에서 한국은 일본의 속국이 아님을 선포했다.

탑골공원에서 경신중학교 정재용 학생이 대독한 민족 대표 48인의 3.1독립선언문의 일부이다.

“우리는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만방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큰 도의를 분명히 하는 바이며 자손만대에 깨우쳐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5천 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충성을 합하여 이를 두루 펴서 밝힘이며 영원히 한결같은 민족의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박은 세계 개조의 큰 기회와 시은에 맞추어 함께 나아가기 위하여 이 문제를 내세워 일으킴이니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낡은 시대에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가 있은 지 몇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의 압제에 뼈아픈 괴로움을 당한 지 10년이 지났으나 그동안 우리의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그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과 명예에 손상을 입은 것이 그 얼마이며 날카로운 기운과 독창력으로 세계문화에 이바지하고 보탤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생략)”

평화적인 시위는 서울, 경기에서 397회, 평안도 260회, 경상도 259회, 충청도 201회, 함경도 179회, 황해도 177회, 전라도 80회, 강원도 79회, 국외에서도 98회나 있었다. 200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가를 했고, 이 중에 7509명이 사망하고, 15,850명이 부상하고, 45,306명이 구금을 당했으며, 715호의 민가가 불타고, 47개의 교회와 2개의 학교가 불타서 사라졌다.

특히 수원의 제암리교회는 전 성도를 예배당에 가두고 불을 질러 불태워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구속시키고 말할 수 없는 방법으로 고문을 하며 무력으로 강제 진압을 했지만, 결국은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꺾지 못하고 유화정책을 시작했다.

3.1독립만세운동으로 한국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선포하였고, 민족적 연합전선을 형성하였다. 이는 중국 5.4운동에 영향을 주었고, 하세가와 요시미치 총독을 사퇴시켰으며, 시위가 끝난 뒤에도 그 열기가 꺼지지 않고 각종 독립위원회와 시민단체가 결성되었고, 민족교육을 통한 계몽사업과 조선여성동우회와 근우회 등의 여성독립단체, 의열단 등의 무장 독립군이 탄생했다. 또 현재 대한민국의 모체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해서 반일 자주독립에 만족하지 않고 군주제가 아닌 자유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민족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다음은 대한민국 건국강령의 일부이다.

“우리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을 일으킨 원인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니 이른바 우리 조국의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는 우리 민족의 힘으로서 이족전제를 전복하고 5천 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체제를 건립하며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일보의 착수이다. (생략)”

이렇게 3.1운동을 계기로 활동무대가 미국, 소련, 중국 등으로 분산되어 소련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를, 미국과 상해에서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한성에서는 조선왕조 회복을 꿈꾸다가 상해임시정부로 합쳐지게 되었다.

1919년 4월 3일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의정원 회의를 열고 국호 및 관제를 의결하여 4월 13일에 드디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는 동시에 조직적이고 통일성 있는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막강한 무력에도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등 크고 작은 항일운동이 계속되었으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청산리와 봉오동전투에서 큰 전과를 이루었다. 항일투쟁의 총본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내외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1940년 8월 중국 정부로부터 중국 내 활동을 공인받았고, 드디어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1937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독일 및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은 후에 1941년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서 태평양 전쟁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아시아, 태평양 전역으로 확대되게 되었다.

이범희 목사
▲이범희 목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를 국권 회복의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여, 1941년 12월 9일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과 합동으로 대일전을 전개하였다. 연합국의 일원인 중국과 연합작전을 전개하면서 1943년 6월에 영국군 총사령부와 군사협정을 체결하고 인도, 미얀마에 공작대를 파견해서 일제에 대항했다.

전쟁 기간 일제는 전쟁에 소요되는 인력과 물자를 충원하기 위해서 한반도에서 극도의 억압과 수탈 행위를 자행하였는데,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이런 가혹한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