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제목
자랑하지 말라

본문
로마서 4장 16–25절

서론

Ⅰ. 인간은 자랑하려 하고, 하나님은 은혜를 드러내신다

세상은 자랑으로 움직입니다. 사람은 조금만 성취해도, 남보다 앞서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정반대의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자랑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설계하셨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말입니다.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해 그 원리를 설명합니다. 로마서 4장 16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후사 되는 것이 믿음에 속한 것은, 그것이 은혜로 되게 하려 함이라.” 즉, 하나님께서 믿음의 길을 선택하신 이유는 자랑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진정한 능력은 인간의 자랑이 꺾일 때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자랑하지 말라, 모든 것은 은혜다.”

본론

Ⅱ. 믿음의 길은 자랑을 끊고 은혜만 남게 한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자랑을 제거한 믿음’이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생애는 율법 이전의 시대에 살았던 한 인간의 여정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모든 믿는 자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자기 확신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1. 첫째, 믿음은 자랑을 배제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방식을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정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약속이 은혜로 되게 하려 함이라”(16절)고 말씀합니다. 즉, 구원이 믿음으로 주어져야, 자격의 논리가 사라지고 선물의 논리가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다면 사람마다 “나는 지켰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인간의 자랑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믿음은 내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집중하게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본질은 자랑이 아니라 신뢰이며, 구원의 중심에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합니다.

2. 둘째, 믿음의 대상은 창조와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그의 믿음은 막연한 낙관이나 긍정적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사라의 태가 이미 닫혔고, 자신도 백 세가 되어 육체의 가능성은 사라졌지만, 그는 현실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했습니다. 믿음이란 “나는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능히 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방향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향할 때, 자랑은 사라지고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자기 확신의 믿음은 결국 교만을 낳지만, 하나님 중심의 믿음은 겸손과 감사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은 자기 확신의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 신뢰의 관계입니다.

3. 셋째, 믿음의 자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태도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 한 문장은 아브라함의 생애를 요약합니다. 그는 인간적으로는 아무 소망이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란 이유는, 현실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상황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신뢰하는 결단입니다. 믿음이란 눈앞의 현실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진실하다고 믿는 용기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믿음의 눈에는 이미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기다림 속에서 자라며, 불가능 속에서 빛납니다.

4. 넷째, 믿음의 본질은 현실을 인정하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알고도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정확히 보되, 그 위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더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지만, 하나님은 그 한계를 넘어 역사하실 분임을 확신했습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 확신하였느니라.” 이 확신이 바로 믿음의 완성입니다.

현실이 아니라 말씀을 근거로, 자기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신앙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이 견고해질수록 인간의 공로는 작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커졌습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자랑은 사라지고, 감사와 경외만 남았습니다.

5. 다섯째, 믿음의 결과는 ‘의로 여김을 받은 은혜’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여겨졌다’는 말은 헬라어로 ‘logizomai’, 즉 ‘장부에 기록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의 장부에 기록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의롭다 함을 받은 이유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 공로가 아니라 은혜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칭의(Justification)의 원리입니다. 의는 우리가 쌓은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의롭다”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셨다”고만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인간의 자랑은 침묵하고, 오직 감사만 남습니다. 칭의는 인간의 노력의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회계입니다.

6. 여섯째, 아브라함의 믿음은 오늘 우리의 복음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는 것은 그만 위한 것이 아니요, 우리도 위함이니.” 즉, 아브라함의 믿음은 한 개인의 사건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적용되는 복음의 원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합니다. 바울은 이 믿음을 복음의 핵심으로 정리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십자가는 죄의 대가를 치른 사건이며, 부활은 칭의를 완성한 하나님의 서명입니다. 즉,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해결하셨고, 예수의 부활은 우리의 구원을 확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창조와 생명의 하나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본질은 같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 그 믿음은 자랑을 무너뜨리고 은혜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길입니다.

Ⅲ. 왜 하나님은 자랑을 싫어하시는가

하나님이 자랑을 미워하시는 이유는 단순히 인간이 겸손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자랑은 하나님의 은혜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1. 첫째, 자랑은 은혜를 무효화합니다: 자랑은 “내가 했다”는 고백이고, 은혜는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이 둘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믿음으로 주신 이유는, 인간의 공로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자랑이 끼어드는 순간 은혜는 흐려지고, 복음은 인간 중심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 없느니라”(롬 3:27)고 단호히 말했습니다.

2. 둘째, 자랑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습니다: 자랑은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를 높이는 태도입니다. 에덴의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던 순간이 바로 그 시작이었습니다. 자랑은 신뢰 대신 독립을, 감사 대신 자기 확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함께 일하시기를 원하시지만, 자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경쟁하려 듭니다.

3. 셋째, 자랑은 교만을 낳고 교만은 멸망을 부릅니다: 사탄의 타락이 “내가 가장 높이 되리라”(사 14:14)에서 시작되었듯, 교만은 피조물이 창조주의 자리를 침범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약 4:6)고 했습니다. 자랑은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지만, 겸손은 하나님을 초청합니다.

결국 자랑은 은혜를 가리고, 관계를 끊으며, 교만을 낳는 뿌리입니다. 하나님이 자랑을 싫어하시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자랑은 하나님의 자리를 침범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성숙이란 자랑이 사라지고, 은혜만 남는 삶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전 1:31)

Ⅳ. 성경이 허락한 ‘거룩한 자랑’

하나님은 모든 자랑을 금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밖에서의 자랑은 교만이지만, 하나님 안에서의 자랑은 예배가 됩니다. 인간의 자랑이 자기 이름을 드러내는 말이라면, 거룩한 자랑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고백입니다. 성경은 이런 거룩한 자랑을 세 가지 방향으로 가르칩니다.

1. 첫째, 주 안에서 자랑하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렘 9:23–24, 고전 1:31) 참된 자랑은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지혜나 권력, 재물은 사라지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영원합니다. 세상의 자랑은 자신을 드러내지만, 주 안의 자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배란 결국 하나님을 자랑하는 행위입니다. 예배자의 자랑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주님이 행하셨습니다.” “주님이 구원하셨습니다.” 이 고백이 주 안에서의 자랑입니다.

2. 둘째, 십자가를 자랑하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갈 6:14) 바울은 자신의 지식, 업적, 사도권조차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자랑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세상눈에는 실패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지혜와 구원의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의 자랑은 자기 부인의 절정이며, “나는 죽고 그리스도는 내 안에 사신다”(갈 2:20)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 영광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그의 자랑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은혜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할 때, 우리의 중심은 더 낮아지고, 하나님의 영광은 더 높아집니다.

3. 셋째, 연약함을 자랑하라: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 12:9–10)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족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머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 한마디가 그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연약함의 자랑은 세상의 논리와 정반대입니다. 세상은 강한 자를 칭찬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자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약함을 숨기는 사람은 자기 힘을 의지하지만, 약함을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에 기대어 삽니다. 그래서 연약함의 자랑은 겸손의 고백이자, 신앙의 용기입니다.

최원호 목사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마무리 기도

주님, 자랑할 것이 없는 우리에게 은혜로 구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공로가 아니라 은혜로 살게 하소서. 우리의 입술에서 자랑이 사라지고, 감사가 넘치게 하소서. 십자가만 자랑하고, 연약함 속에서도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