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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구원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묻는다면?
본문
사도행전 4장 7–12절
서론
Ⅰ. 세상이 던지는 질문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가 처음으로 공적 재판대에 선 사건을 기록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예수의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신다는 증거였습니다. 이 일로 많은 무리가 모였고, 베드로가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자 무려 오천 명이나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그 기쁨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안과 위기감을 느끼며 두 사도를 붙잡아 공회 앞에 세웠습니다. 그들이 던진 첫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행 4:7) 이 질문은 단순히 “어떻게 기적이 일어났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너희의 자격은 무엇이냐?” “너희가 의지하는 힘은 어디서 오느냐?” “너희 믿음의 근거가 무엇이냐?”라는 본질적 도전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질문은 단지 2천 년 전 사도들에게만 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도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묻습니다. “너희가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너희 믿음의 차별성은 무엇이냐?” “무슨 권세로 기도하며, 무슨 힘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느냐?” 세상은 교회를 향해 이렇게 묻습니다.
“과학과 지식이 발달한 시대에 아직도 예수를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 “다원주의 시대에 왜 오직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 주장하느냐?” “교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며, 성도는 어떤 확신으로 살아가느냐?” 이 질문은 날카롭고 무겁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히 대답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이름 외에는 구원이 없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고백이었고, 동시에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본론
Ⅱ. 사도의 대답, 그리고 우리의 고백
1. 성령 충만으로 담대히 선포하다 (행 4:8–10)
공회 앞에서 베드로가 입을 열었을 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행 4:8) 여기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단순히 감정의 고양이나 열정이 아닙니다. 이미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사도가, 필요할 때마다 다시 성령께서 충만히 임하셔서 권능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상황에 맞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였습니다.
성령 충만은 곧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힘이나 지혜로는 권세자들 앞에서 담대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평범한 어부가 권력자들을 꾸짖고 복음을 선포하는 도구가 됩니다.
첫째, 성령 충만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두개인과 대제사장 가문은 당시 종교 권력의 최정점이었습니다. 그들 앞에서 심문받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두려움을 이기게 하고, 오히려 위축된 자리가 담대함의 자리가 되게 합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 앞에서, 직장에서, 학문과 사회 속에서 믿음을 드러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두려움이 담대함으로 바뀝니다.
둘째, 성령 충만은 진리를 분명히 선포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방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복음의 핵심을 바로 선포했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 (행 4:10) 성령 충만은 상대를 설득하려는 기술이 아니라,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하게 합니다.
셋째,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지혜로 말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미리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를 관원 앞에 세울 때, 무엇을 말할지 염려하지 말라. 성령이 그때 할 말을 가르치실 것이다.” (눅 12:11–12) 베드로의 말은 바로 이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성령께서 우리 입술과 생각을 주장하실 때, 우리의 말은 단순한 인간의 언어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도 동일합니다. 가족 앞에서, 직장 동료 앞에서, 불신 사회 앞에서 복음을 말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성령 충만을 구하십시오. 두려움 대신 담대함을, 침묵 대신 진리를, 인간의 지혜 대신 하나님의 지혜를 주시는 성령께서 오늘도 역사하십니다.
2.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셨다 (행 4:11)
베드로는 이어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구약의 성취를 가리킵니다. “버린 돌”은 인간이 평가하기에 쓸모없다고 내던진 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버린 돌을 “머릿돌”로 세우셨습니다. 머릿돌은 건물의 기초와 방향을 잡고, 전체를 지탱하는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은 예수를 무가치하다 여겨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예수를 교회의 기초로, 구원의 토대로 세우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두 가지 의미를 줍니다.
첫째, 세상은 여전히 예수를 버린 돌로 여깁니다. 오늘 한국 사회는 기독교를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라 비웃고, 예수의 복음을 배타적이라 비난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평가가 진리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머릿돌이시며, 그 위에 세워진 교회만이 흔들리지 않는 집입니다.
둘째, 우리도 버린 돌 같은 존재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 세상에 버림받고 소외된 우리를 하나님은 머릿돌 위에 세워주셨습니다. 세상이 무가치하게 여기는 사람을 들어 하나님은 구원의 집을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품어야 합니다. 사람은 나를 버려도, 하나님은 나를 머릿돌 위에 세우십니다.
3.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행 4:12)
베드로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음이라.” 이 말씀은 구원에 대한 세 가지 선언입니다.
① 구원의 배타성: 예수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세상은 “모든 종교가 결국 같은 산에 오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철학은 지혜를 줄 수 있지만, 죄를 사하지 못합니다. 도덕은 삶을 교양 있게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과 화목케 하지 못합니다. 종교적 열심은 인간의 노력이지만, 구원의 문을 열지는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의 이름 안에만 있습니다.
② 구원의 보편성: “천하 사람 중에” 이 말은 특정 민족이나 계층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헬라인도, 로마인도, 한국인도, 오늘 우리도 다 포함됩니다. 복음은 배타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포괄적입니다. 다른 길은 없지만, 그 한 길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습니다.
적용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도전
오늘 사회는 다원주의와 상대주의가 지배합니다. “네가 믿는 것도 옳고, 내가 믿는 것도 옳다.”, “중요한 건 진심이지, 어떤 종교든 상관없다.” 겉보기에 포용적인 말 같지만, 이는 절대 진리를 흐리는 미혹입니다. 진리를 상대화하면 결국 진리 자체가 사라집니다.
오늘 교회가 흔들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며 “오직 예수”라는 고백을 주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선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다른 이름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확신이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도 오직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이름을 가르치지 않고, 오직 예수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성도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결론
Ⅲ. 부인할 수 없는 증거와 우리의 고백 (행 4:13–22)
사도들의 증언을 들은 종교 지도자들은 놀랐습니다.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들이었지만, 그들의 말 속에는 권세와 지혜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행 4:13–14)
첫째, 비난할 말이 없는 삶입니다. 지도자들은 사도들을 정죄하려 했지만, 치유된 사람이 눈앞에 서 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복음은 말로만이 아니라 삶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가정과 일터, 관계와 삶의 현장에서 ‘비난할 말이 없는’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고 성도를 조롱하려 해도, 변화된 삶이 곧 살아 있는 증거가 될 때 그들의 입은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공회가 의논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행 4:16) 복음의 역사는 사람의 입장이나 해석에 따라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억누르려 해도, 치유의 역사와 변화의 증거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구원받은 증거, 예수 안에서 변화된 인생, 성령의 열매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셋째, 우리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고백입니다. 지도자들이 위협하며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라” 했을 때,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응답했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행 4:20) 복음은 억압한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억압이 강해질수록 성도들의 입술은 더 담대해집니다. 오늘 세상도 여전히 우리에게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험한 구원, 우리가 만난 주님은 너무나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기도
주님, 사도들이 공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충만히 임하셨기 때문임을 믿습니다.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 충만을 구하게 하시고, 두려움 대신 담대함으로, 변명 대신 진리를 선포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로 살아가느냐? 어떻게 구원받았느냐?” 그 질문 앞에서 우리가 머뭇거리지 않고 분명히 고백하게 하옵소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았다. 다른 이름에는 구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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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