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와 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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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겸할 수 없는 두 식탁

본문
고린도전서 10장 14–22절 (참고: 10장 1–13절)

서론

Ⅰ. 추석의 제사상, 신앙의 선택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가위를 지나며 우리는 감사와 가족의 정을 나누지만, 동시에 깊은 신앙적 고민 앞에 서게 됩니다. “조상 제사를 드려야 하는가?” “가족이 강요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교회가 오랜 세월 동안 반복해 온 질문이자, 신앙과 문화의 경계선에서 흔들리는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한 말씀은 놀랍도록 오늘의 상황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 시대의 고린도는 헬라 문화의 중심지로, 도시 곳곳에 우상의 제단이 있었습니다. 음식의 상당수는 신전 제사 후 시장으로 흘러들었고, 신자들은 식탁에서조차 신앙의 정체성을 시험받았습니다.

바울은 단호히 외칩니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 10:14). 이는 단순히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식탁과 세상의 식탁을 동시에 겸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두 식탁의 충돌’을 직면하고, 성도의 식탁이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본론

Ⅱ. 바울의 논증: 광야의 교훈에서 식탁의 결단으로

1. 경고: 광야 세대가 왜 멸망했는가 (고전 10:1–11)

바울은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울로 제시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10:1–5).

이스라엘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 만나와 반석의 물이라는 은혜의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특권은 곧 신앙의 자동 보증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10:7)와 “음행”(10:8)과 “시험”(10:9)과 “원망”(10:10)에 빠졌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다른 제단 앞에 서기를 즐겼던 세대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실패를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모든 일은 그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10:11). 오늘날의 우상은 더 이상 신전의 신상만이 아닙니다. 자녀의 성공, 돈, 명예, 인기, 그리고 ‘가족의 체면’이 현대판 제단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묻습니다. “너는 어느 식탁에 앉아 있는가?”

2. 약속: 시험 가운데 피할 길을 주시는 하나님 (고전 10:13)

바울은 광야의 실패를 이야기한 뒤, 신자들에게 절망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전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너희가 당한 시험은 오직 사람에게 공통된 시험일 뿐이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시험’은 유혹과 시련을 모두 포함합니다. 즉, 우리의 고난은 특별하거나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알고 계신 범위 안에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허락되지 않은 고난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다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즉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선언입니다. 이 한 단어가 이 구절의 중심입니다. 시험보다 더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는 흔들려도,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미쁘지 아니하여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딤후 2:13) 하나님의 신실함이 우리의 한계를 덮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시험의 크기를 통제하십니다.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해 던져 넣지 않으시며, 감당할 만큼만 허락하십니다. 욥의 시험조차 하나님은 그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욥 1:12). 시험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선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또한 바울은 말합니다.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피할 길’은 ‘출구’, ‘탈출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시험의 한가운데서 이미 돌아설 길, 다시 일어설 길, 믿음으로 선택할 길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 길은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은혜의 방향 전환입니다. 가정의 압박 속에서도 예배의 자리를 지키는 결단, 직장에서 불의한 제안을 거절하는 용기, 유혹의 순간 눈을 돌리고 기도의 자리로 가는 행동,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피할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피할 길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걸어갈 능력까지 주십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우리가 흔들릴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붙드십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시 55:22). 결국 바울의 이 한 구절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시험은 피할 수 없지만, 넘어질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미쁘시며, 이미 출구를 준비하셨기 때문이다.”

3. 결단: 겸할 수 없는 두 식탁 (고전 10:14–22)

바울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성찬의 상과 우상의 상을 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1) 성찬은 그리스도의 언약에 참여하는 자리입니다 (10:16–17)

“우리가 축복하는 바 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참여함’은 단순히 상징적 의미가 아닙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실제로 연합하는 영적 교제의 자리입니다. 따라서 성찬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언약적 결속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받는다는 것은 “이제 나는 주님의 몸에 속하겠습니다”라는 신앙의 서약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2) 우상의 식탁은 귀신과의 교제입니다 (10:20–21)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바울은 우상의 실체를 ‘없는 것’(8:4)이라 하면서도, 그 배후의 영적 세력을 ‘귀신’(demons)이라 분명히 규정합니다. 즉, 우상의 의례는 단순한 문화적 행위가 아니라 영적 권위의 이전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의 미신·점·타로·사주 또한 ‘취미’나 ‘오락’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주권의 변질입니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며,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10:21). 믿음은 양다리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잔을 마신 자는 귀신의 잔을 버려야 합니다.

(3)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10:22)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하나님의 질투는 인간의 시기심과 다릅니다. 그것은 사랑의 독점적 헌신을 요구하는 거룩한 질투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듯, 하나님은 언약 백성에게 “나 외에는 다른 신을 두지 말라”(출 20:3)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제단에 서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너의 마음이 누구에게 속하였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적용

Ⅲ. 오늘의 식탁 앞에서 결단하라

1. 가정의 제사 문화 속에서

가족의 평화를 위해 신앙을 숨기기보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엡 4:15). “나는 조상을 존경하지만, 절은 하나님께만 드린다”는 태도는 불효가 아니라 참된 경외의 표현입니다. 조상을 기리는 마음은 제사 대신 감사 예배로 드릴 수 있습니다. 가족을 위해 요리를 준비하고, 부모를 섬기며, 함께 기도하는 자리로 바꾸십시오. 그것이 ‘효도’와 ‘신앙’을 함께 세우는 길입니다.

2. 세상 속의 보이지 않는 제단들

우상은 제사상에만 있지 않습니다. “성과의 제단”, “관계의 제단”, “돈의 제단”, “나 자신을 신격화한 제단”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고개 숙였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지금 누구의 식탁에 앉아 있는가?” 성찬은 우리를 새롭게 세웁니다. 주님의 몸을 받은 자는 이제 세상의 식탁에서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정직을 선택하고, 순결을 지키며, 불의의 이익을 거절하는 것, 그것이 성찬 받은 자의 생활 예배입니다.

3. 시험의 순간, 즉시 피하라

시험의 출구는 언제나 ‘즉시’ 열립니다. 그러나 머뭇거리면 문은 닫힙니다. 요셉처럼 피하십시오(창 39:12).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십시오(단 1:8). 그리고 엘리야처럼 무릎을 꿇으십시오(왕상 18:42). 피할 길은 도피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하는 이동입니다.

결론

Ⅳ. 주님의 식탁에 앉은 사람답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오늘의 신앙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식탁을 지키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식탁을 겸하겠습니까? 성찬은 우리를 부르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 몸을 받으라, 내 피를 마시라. 너는 내 언약의 사람이다.” 우리의 가정이, 교회가, 사회 속의 성도들이 이 언약의 자리에 서서 세상의 유혹 앞에서도 담대히 말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주의 식탁 외에 다른 상에 앉지 않겠습니다.”

최원호 목사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주님, 오늘 우리는 ‘두 식탁’ 앞에 섰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화려하고, 우상의 상은 달콤하지만, 그 끝은 멸망임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묶어, 오직 성찬의 언약 속에 머물게 하소서. 가정의 제사상 앞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게 하시고, 세상의 자리에서도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하게 하소서. 시험 가운데 피할 길을 붙들며, 언제나 주의 상에서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