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랑하시므로 책망하시는 하나님
본문
요한계시록 3장 14–22절
서론
Ⅰ. 사랑은 때로 책망으로 나타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책망하십니다. 사람의 사랑은 종종 달콤한 위로로만 머무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게 하는 거룩한 간섭으로 드러납니다.
요한계시록 2–3장은 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주님의 영적 진단서입니다. 그중 마지막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는 외적으로는 가장 풍요롭고 자랑스러웠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위태롭고 병든 교회였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물질적 풍요 뒤에 감춰진 영적 빈곤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9)
하나님은 미워서 꾸짖지 않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다시 살리시기 위해 책망하십니다. 사랑 없는 책망은 폭력이고, 책망 없는 사랑은 방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회복을 목적으로 합니다. 오늘 이 말씀은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본문 1
Ⅱ. 라오디게아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14–16절)
주님은 먼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십니다. 이는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교회의 병을 고치실 수 있는 권위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14절) 이 짧은 한 절 속에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본질적 속성이 담겨 있습니다.
1. “아멘이시요” ― 변치 않는 진리의 하나님
‘아멘’은 “참되다, 확실하다”는 뜻입니다. 보통 우리는 기도의 끝에 ‘아멘’이라 고백하지만, 주님은 스스로 “나는 아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 자신이 진리의 완성이며, 약속의 보증이시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진리를 상대화했습니다. “세상과 타협해도 괜찮다, 이것도 믿음이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진리는 유행을 타지 않는다.” 그분은 세상 가치에 맞춰 진리를 수정하지 않으시며, 언제나 동일하신 분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2.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 말씀을 삶으로 증거하신 하나님
‘증인’은 단순히 말로 전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생명으로 진리를 증명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신 것을 십자가에서 행동으로 증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참된 증인이십니다. 하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는 말만 하는 교회였습니다. 예배는 있었지만 헌신은 없었고, 기도는 있었지만 순종은 없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너의 믿음은 입술에 머무르느냐, 아니면 삶으로 드러나느냐?” 진정한 신앙은 말이 아니라 삶의 증언으로 증명됩니다.
3.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 모든 생명과 부요의 근원이신 하나님
‘근본’은 ‘시작’, ‘통치자’를 의미합니다. 라오디게아는 의료, 금융, 섬유 산업으로 부유했던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의 모든 시작과 생명의 근원은 나에게 있다” 하십니다.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자이심을 깨닫게 하시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능력, 재능, 건강, 모든 부요는 결국 주님의 손에서 비롯된 은혜입니다. 그 사실을 잊는 순간, 인간은 자립을 신앙으로 착각하고 하나님 없는 신앙을 만들게 됩니다.
4. 주님의 진단: 영적 체온을 잃은 교회 (15–16절)
주님은 먼저 “내가 네 행위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너의 행동을 보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행위의 동기와 중심, 즉 마음의 온도를 아신다는 의미입니다. 겉으로는 봉사하고 예배하고 헌신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의 불이 꺼져버렸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미지근함’, 곧 온도의 상실이었습니다. ‘뜨겁다’는 성령의 불,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사랑과 헌신을 뜻합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지도 않았지만, 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신앙을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를 드렸으나 감격이 없었고, 봉사를 했으나 기쁨이 없었습니다. 형식은 남았으나, 생명은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지근한 신앙의 병입니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불신이 아니라, 무감각입니다.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고, 은혜에도 감동하지 못하며, 회개해야 할 일에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것, 그것이 미지근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토하다’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단 한 번만 사용된 강렬한 표현으로, 역겨움, 견딜 수 없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토해내신다는 것은 그 교회가 이미 하나님의 생명 순환에서 이탈된 상태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만에서 비롯된 영적 질병이었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돌아가는 시스템, 성령의 감동 없이도 유지되는 예배, 회개 없이도 성장하는 조직, 그것은 부흥이 아니라 위장된 병세입니다. 우리는 이미 미지근한 라오디게아의 그림자 안에 들어온 것입니다. 냉담보다 더 위험한 것은 무감각입니다. 차가운 사람은 회개할 수 있지만, 미지근한 사람은 자신이 병든 줄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의 행위를 안다. 이제 깨어나라.” 그분의 책망은 단절의 선언이 아니라 회복의 경고음입니다. 우리의 신앙 체온을 다시 성령의 불로 덥히라는 사랑의 호소입니다.
본문 2
Ⅲ. 사랑으로 책망하시는 이유 (17–20절)
주님은 진단으로 멈추지 않으시고, 치유와 회복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1. 자기 확신의 병 (17절)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오디게아는 로마 제국의 대표적 부유 도시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성공한 교회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단은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확신’이라는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주님은 다섯 가지 영적 병을 지적하십니다. ① 곤고함 – 은혜의 감격을 잃은 탈진의 신앙. ② 가련함 – 하나님이 아닌 자기 노력에 의지하는 신앙. ③ 가난함 – 믿음의 자산이 소진된 상태. ④ 눈 멂 – 영적 분별력을 잃은 상태. ⑤ 벌거벗음 – 거룩을 잃고도 수치를 느끼지 못하는 영혼. 자기 확신은 회개를 가로막습니다. “나는 괜찮다”는 말이 들리는 순간, 영혼은 더 이상 치유되지 않습니다.
2. 하나님의 처방: “내게서 사라” (18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수치를 가리며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주님은 회복의 세 가지 처방을 주십니다.
① 불로 연단한 금 — 믿음의 정금. 고난 속에서 정화된 믿음이 진짜 부요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의 삶을 불 속에 두십니다. 그 불은 파멸이 아니라 정화의 도가니입니다.
② 흰옷 — 거룩의 회복. 라오디게아의 검은 옷 대신,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는 흰옷이 필요합니다. 의로움은 우리의 행위에서 오지 않습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게 하십니다.
③ 안약 — 영적 시력 회복. 라오디게아는 의학이 발달한 도시였지만, 정작 영의 눈은 멀어 있었습니다. 성령의 조명 없이는 말씀도 깨닫지 못합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의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시 119:18)
3. 사랑의 징계와 회복의 초청 (19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나님의 징계는 벌이 아니라 훈련입니다. 그분의 책망은 파괴가 아니라 회복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꾸짖으신다는 것은 아직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열심을 내라”는 말씀은 냉담한 심령에 불을 다시 붙이라는 명령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방향의 전환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회복의 시작은 회개입니다.
4.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주님 (20절)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은 교회 안이 아니라 문밖에 서 계십니다. 예배는 계속되었지만, 주님은 배제되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주님이 떠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여전히 두드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강제로 문을 부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기다리십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것은 공동체 이전에 개인의 결단입니다. 문을 여는 순간, 잃어버린 교제가 회복됩니다. 그분은 손님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주인으로, 친구로, 사랑하는 분으로 들어오십니다.
결론
Ⅳ.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님은 일곱 교회 모두에게 동일한 말씀으로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보통 사람의 말은 “들으라”로 시작하지만, 주님은 “들을지어다”로 마무리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장의 끝이 아니라, “이제는 들었으니, 어떻게 응답하겠느냐”는 부르심입니다.
사람의 말로 들으면 비평이 나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말씀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순종의 초청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성령이 은혜제일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이 지금 네 마음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마무리 기도
하나님, 우리의 식어진 마음을 성령의 불로 다시 뜨겁게 하소서. 미지근한 신앙을 깨우시고,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하게 하소서. 자기 확신에 갇혀 주님을 문밖에 세운 우리의 교만을 용서하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진리를 보게 하시고, 귀를 열어 성령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믿음의 금과 거룩의 흰옷과 성령의 안약을 주님께로부터 다시 받게 하시며, 책망을 사랑으로 받아 회개와 순종으로 나아가게 하소서. 이제 우리의 마음 문을 엽니다. 들어오셔서 함께하시고, 교회를 새롭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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