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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정예부대 제3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7천여 명이 한 달 새 전사한다. 유학산은 피로 물들고 국군 1사단의 구국의 투혼을 미 제23, 27전투단이 받친다. 맥아더는 워커에게 9월 16일까지 반드시 버텨달라고 주문한다. 워커는 울산–김해로 이어지는 워커라인을 설정하고, 잘 버텨낸다.
맥아더는 이에 인천상륙작전을 구상, 계획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맥아더는 작전사령관에 클라크 미 해군제독을 임명한다. 콜린스 대장과 세퍼드 미 해병사령관이 반대한다. ➀수심이 낮다 ②뻘이 8km에 이른다 ③적의 심장부다 ④성공률이 1/5000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이 전쟁은 정치적, 심리적, 전략적으로 서울을 빨리 수복해야 이긴다며 오직 인천상륙작전을 고집한다.
워싱턴의 합참, 국방, 육, 공, 해병대도 포항, 군산을 상륙지점으로 제의했다. 낙동강 돌출부의 미군 전선이 번번이 뚫리자,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할 미 해병대를 낙동강 전투에 투입했다.
1950년 9월 11일 맥아더의 참모인 알몬드 장군은 10군단장이 되어 일본 고베와 요코하마에서 미 해병과 7사단을 출항시키고 한국해병대와 국군17연대는 부산에서 출정시킨다. 이승만은 노구를 이끌고 부산 부두의 선장실에서 양민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드디어 한, 미 연합군이 제주도 남쪽 해상에서 합류하여 북상한다. 9월 15일 0시 30분에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혀서 신호한다. 오전 2시에 26척의 대함선이 7만 5천 명의 장병을 무장한 채 인천 앞 바다에 정렬한다. 4시간의 함포사격 끝에 오전 6시 6분에 그린비치에 상륙한다. 예정보다 1분 늦었다.
인민군은 함포사격에 놀라서 대부분 도망가고, 1개 대대와 1개 포대가 벙커에 숨어 있다가 서울, 경기 차출 의용군은 항복하고 북의 인민군은 도망간다.
9월 15일 오전 8시, 월미도는 완전 정복되었다. 밤새 포격으로 암모니아 냄새, 계란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레드, 옐로우, 블루 비치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주력부대가 진격한다. 다시 저녁 밀물이 되어 본 단이 상륙하고 9월 15일 밤에 인천 시내 전투를 했다. 9월 16일 새벽 인민군이 슬며시 도망갔다. 맥아더는 대장선 마운드 맥킨리호에서 자신의 작전을 지켜본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은 20명이 전사하고 175명이 부상했다. 인민군의 사상자는 1,400여 명이었다. 맥아더 생애의 가장 기쁜 날이다. 대성공이다. 누구도 승리를 믿지 않았다. 모두가 반대했다. 그러나 최단 시간에 성공했다.
9월 18일 유엔군은 김포공항을 점령했다. 인민군은 폭파할 시간도 없이 도망갔다. 9월 18일 오후부터 유엔비행기 이, 착륙이 시작되었다. 맥아더가 지휘한 이 작전의 성공으로 낙동강 전선의 인민군 주력부대가 대혼란에 빠졌다. 미 8군단장 워커는 9월 16일 총공세를 계획했으나 폭우로 연기했다가 9월 18일 낙동강 전 전선에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날 밤부터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했다. 인민군 13사단 최용진 사단장이 후퇴하면 쏜다고 다그치자 이학구 참모장이 더 이상 부하를 죽일 수 없다며 사단장을 쏘고 투항했다. 인민군의 전선은 일시에 무너졌다. 인민군은 저항도 없이 후퇴했다.
미 24사단 주력부대가 김천, 옥천, 대전을 탈환하고, 인천상륙작전의 미 7사단과 오산에서 만나서 한강 도하 작전을 전개한다. 서울 서쪽에서 한, 미 해병대가 시가전으로 토벌하고 인민군이 강력히 저항한다.
녹번리 전투에서 정보에서 해병으로 전과해, 내 고향을 찾겠다던 베어드 중위가 전사했다. 서울에서 강제 징집한 우리 청년 의용군 400명이 항복해 왔다.
9월 25일 서울 마포의 시가전이다. 건물을 이용하여 필사적으로 버티던 인민군은 9월 26일 서울을 포기하고 의정부로 퇴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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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희 목사(㈔한국보훈선교단 이사장, 6.25역사기억연대 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