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국립묘지에는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경찰관 묘역이 있다. 경찰청은 우리나라 경찰의 역사를 임시 정부에서 찾고 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장정 제14조의 규정에 의하여 경무국이 설치되었고 1923년 임정 산하 치안 조직으로 의경대가 창설되었다. 의경대는 교민들의 보호와 일제의 밀정을 색출하는 조직이었다.

1941년 요인에 대한 경호와 청사의 경비를 위해서 경위대가 설치되었다. 경무국, 의경대, 경위대 등에서 활동한 분들은 김구(1919년 경무국장, 1932년 의경대장), 나석주(경무대장), 나창헌(경무대장), 김석(의경대), 김철(의경대), 안경근(의경대), 유상근(의경대), 장덕진(의경대), 송복덕(경위대), 권칠성(경위대) 등 111분이다.

국립서울현충원의 경찰관 묘역
▲국립서울현충원의 경찰관 묘역
광복 후 경찰에 투신한 독립유공자는 49명이다. 이중에 광복군 출신이 23명이다. 송영철(순경), 송명하(경사) 형제는 임시정부 경위대에서 활동한 부친(송봉덕)과 함께 3부자 독립 유공자이다. 두 형제는 광복군에서 활약하고 경찰에 임직하여 각각 철도 경찰대와 지리산 전투 경찰 사령부 등에서 근무했다. 김용(경무관)은 광복군 제2지대에서 활동하다가 OSS 훈련을 수급하고 국내 정진군에 편성되어 국내 진입을 기다리다 광복을 맞았다.

1951년 동료 이일범(경무관)과 신영복(경감)과 함께 경찰에 투신하여 치안국(경찰청)에서 근무했다. 이일범 경무관은 광복군 지하 공작원으로 활약한 부인(정영)과 함께 부부 독립 유공자이다. 변영근(경감)은 1950년 7월 봉화 춘양전투에서, 백준기(경위)는 무주전투에서 전사했다.

홍구표(경위)는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소령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한국은행의 금괴를 실은 수송열차를 호송하는 책임을 완수하였고 전후 대령으로 예편했다.

광복군 정보장교 출신 장동식(치안총감)은 서울 시경국장을 거쳐서 내무부 치안국장을 지냈다. 전을생(경감)과 전기생은 형제 독립유공자이다. 전을생은 중국 중앙군에 있던 형 전기생의 권유로 일본군 헌병대의 통역을 맡아 암암리에 군사기밀을 넘겨줌으로써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1943년 10월경 형은 일본군 토벌대에 생포되었고, 동생은 탈출에 성공하여 국내에 들어와서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어 있던 중,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석방되었다. 그러나 형 전기생은 광복 직전 중국에서 옥사했다고 한다.

노기용(총경)은 조병옥 군정청 경무 국장과 함께 경찰청 가운데 가장 높은 건국 훈장 독립장을 받은 분이다. 1920년 비밀결사대에 가입하여 군자금 수집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7년간 옥고를 겪었다.

김태강(경감)은 평북 강계 3.1운동 때 6개월의 옥고를 겪었고 만주로 망명하여 김좌진 장군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이병헌(총경)은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의 인쇄, 운반, 배포 등의 책임을 맡았고, 태화관의 현장 기록과 탑골공원 측과 연락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독립유공자 출신 여성 경찰관도 있다. 황현숙, 안맥결, 전창신 등 세 분이다. 황현숙(경무관)은 1919년 3월 천안 입장에서 만세 시위로 1년간 옥고를 치렀고, 1930년 2월 광주 학생운동에 동조한 동맹휴학을 배후 지도한 혐의로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 경찰에 임직하며 치안국 여자 경찰 과장을 맡았다.

안창호 선생의 질녀인 안맥결(총경)은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하였고, 서울 여자 경찰 서장을 지냈다. 3.1운동에 참여하고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한 김봉성 선생과 함께 부부 독립유공자이다.

전창신(경감)은 함흥 영생여학교 교사로 만세 시위를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8개월의 옥고를 겪었고, 광복 후 경찰에 투신하여 인천 여자 경찰서장을 지냈다. 부군이신 김기섭 목사 또한 1919년 함흥 3.1운동과 1944년 기독교 비밀결사대와 관련하여 두 번의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독립유공자 출신 경찰관 가운데 송영철, 송영하 형제, 전을생, 김해강, 이명권, 김용, 이일범, 신영을, 홍구표, 장흥식, 안맥결(부부합장) 등 11분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이범희 목사
▲이범희 목사
광복 후 독립운동가 출신 50여 명이 경찰에 투신했다. 그리고 1947년 정부 수립 이전에 간부후보생 제도를 도입하여 5년 만에 1천여 명의 새로운 간부가 배출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으로, 광복된 조국에서는 전투경찰로 반국가 세력과 싸우다가 1천여 명이 전사하였고 6.25전쟁에 참전하여 1만여 명의 경찰관이 전사하였다. 국립묘지에 경찰묘역이 있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호국경찰, 전몰군경 한분 한분의 이름과 공적이 우리 가슴에 함께 살아갈 때 자유 대한민국은 더욱 강대해 질 것이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