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11월 장진호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미군들은 100일 전 다부동의 영상 35도의 더위 속에서 싸우다가 영하 35도의 추위와 싸워야 했다.
▲1950년 11월 장진호전투에서 미 해병 제1사단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미군들은 100일 전 다부동의 영상 35도의 더위 속에서 싸우다가 영하 35도의 추위와 싸워야 했다.
장진호 전투는 스탈린 그라드 전투, 모스크바 전투와 함께 세계 3대 동계전투의 하나로 불린다. 동상 사상자가 전체의 40~60%를 차지할 정도로 혹독한 추위와의 전쟁이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미 해병 제1사단은 올리버 스미스 장군의 탁월한 지휘로 중공군의 압도적 공세를 뚫고 흥남 부두로 이동하는데 성공했다.

중공군 9병단은 궤멸상태의 타격을 입고 3개월간 재편성을 위해서 후방으로 후퇴했다. 제23묘역에는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카튜사 박덕원 일병의 묘가 있다.

장진호 전투 전사자 묘는 군인 31위, 경찰관 3위가 서울에 26위, 대전에 8위가 있다. 북한에서 수습된 미군 유해 중에서 김석주, 김용수, 정환조, 박진호 일병과 같이 국군으로 확인되어 봉안된 경우도 있다. 경찰관은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 3대대에 배속된 40여 명의 화랑부대 대원으로, 장진호 서북단의 유담리 전투에서 전사한 박은택, 이상길, 전병중 경사이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중공군 9병단 예하 12개 사단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한 작전을 말한다. 이 전투를 초신 퓨(Chosin Few) 전투라고도 한다. 살아온 병사들이 극히 적었다는 뜻이다. 유엔군은 17,843명 중 전사 1,029명, 실종 4,894명, 부상 4,582명, 동상 7,338명이 사상했고, 중공군은 52,098명 중 전사 7,304명, 부상 14,062명, 동상 30,732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장진호 전투의 주역은 미 제10군단 예하의 미 해병 제1사단(사령관 올리버 스미스 소장)이 있었다. 미 해병 제1사단은 인천상륙과 서울수복작전에 성공하고 원산에 상륙했다. 스미스 장군은 알몬드 장군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진격 속도를 최대한 늦춤으로써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겹겹이 둘러싸고 쉼 없이 끊임없이 공격해 오는 적의 공세에 스미스 장군은 “후방의 적을 격멸하고 함흥까지 진출하는 공격이다”라고 명령했다.

미군들은 100일 전 다부동의 영상 35도의 더위 속에서 싸우다가 이제는 영하 35도의 추위와 싸워야 했다.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혹한의 악조건 속에서도 수배에 달하는 적군의 파도공격을 격파하면서 흥남으로 이동한 것은 미 해병의 자랑이었다. 전선의 미 해병에게 소원을 묻는 종군기자에게 “내일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미 해병 제1사단의 사투에 힘입어 동부전선의 10군단과 국군 수도사단과 3사단이 무사히 후방으로 철수했다. 미 하와이 호놀룰루에 미 태평양 국립묘지가 있다. 미국은 1954년, 영광의 작전을 통해서 북한군과 중공군 유해 13.528위와 미군 유해 4.167위를 교환한 바 있다. 6천여 명에 이르는 전사자와 실종자 대부분이 장진호 일대에 남아있다.

1950년 흥남 철수 때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탄 피란민들. 60명 정원의 자리에 14,000여 명이 탔다. 3일간 운항 후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을 땐 아기 5명이 태어나 있었다.
▲1950년 흥남 철수 때 메러디스 빅토리호에 탄 피란민들. 60명 정원의 자리에 14,000여 명이 탔다. 3일간 운항 후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을 땐 아기 5명이 태어나 있었다.
흥남 철수는 세계 전사에서 위대한 구조의 하나로 이름을 올렸다. 그곳에는 현봉학 박사가 있었다. 함흥 고등보통학교와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미국 버지니아 주립 의대에 유학했다. 1950년 3월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하던 중 6.25전쟁이 발발하자 해병대 문관과 미 제10군단 알몬드 장군의 통역을 맡았다.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알몬드 장군을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피난민 98,000명을 구출할 수 있었다.

흥남 철수 책임자는 미 10군단 부참모장 에드워드 포니 대령이었다. 국군의 실무 책임자는 제1군단 예비참모 박시형 대령이었다.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 선생의 아들이며, 중국군과 광복군으로 활동하다가 국군에 입대하였다. 함흥 팀장 제임스 모어 중령은 “이건 전쟁이다. 전쟁에서는 군대가 우선이다. 피난민 중에 공산주의자가 있으면 배가 폭파될 수도 있다”고 불허했다. 하지만 끈질긴 간청과 교섭으로 알몬드 장군의 마음이 움직였고, 12월 19일 철수가 시작되었다. 피난민 철수에는 총 13척의 선박이 동원되었다.

마지막 배인 메리디스 빅토리아 호의 구조는 극적이었다. 비행기 연료를 적재하고 있었고 기뢰의 위험이 컸지만 레너드 라루 선장은 최대로 태웠다. 60명 정원의 자리에 14,000명이 탔다. 12월 23일 11시에 출발한 배가 26일 9시 15분 거제도 장승포항에 도착했다. 5시간에 걸쳐서 모두 내리고 보니 아기 5명이 태어나 있었다.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참모장 제임스 로버트 러니는 “한국인들이 어떻게 이렇게 질서 있게 서있는지 절망적인 상황에서 보여준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라고 했다.

빅토리아호는 미 의회에 의해 용감한 배의 명예가 주어졌다. 또 미 교통부에 의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구조로 선언되었다. 라루 선장은 1955년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현시학 제독은(당시 중령) 현봉학의 동생으로 1950년 7월 서해안 봉쇄작전, 해병대통영상륙작전, 1951년 1월 황해도 월사리 피난민 5,000명을 구출해서 백령도로 이동했다. 형은 동해에서, 동생은 서해에서 피난민 구출에 헌신했다.

6.25전쟁이 끝나고 현봉학은 미 제퍼슨 대학교 교수로, 현시학은 함대 사령관,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장군 제1묘역에 안장됐다. 아래 동생 피터현은 재미 저술가로서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과 흥남대철수’를 저술했다.

이범희 목사
▲이범희 목사
포니 대령은 제2차 대전에 이어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포항 제1해병사단의 창설에 도움을 주었다. 빅토리아호는 1993년 퇴역하여 중국에 고철로 36만 달러에 매각되었다. 우리가 인수해서 거제도에 교육장으로 활용했어야 하는 아쉬움이 크다. ‘김치 파이브’의 애칭을 얻은 이경필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거제도 사람들의 온정을 잊지 않기 위해서 거제도에서 동물병원으로 주민들을 섬긴다. 자유 대한민국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 육군 장교로 최전방 철원에서 근무했고, 그의 아들이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하며 국방에 힘을 다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국가안보를 위한 흥남철수기념관을 개관하는 것이다. 쓰라린 역사를 잊지 않아야 한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