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서울현충원 제2장군묘역에는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원일 제독의 부부합장묘가 있다. 손 제독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의 장남이다. 손원일 제독은 상해 중앙대학 항해과를 졸업하고 중국 해군의 국비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3년간 독일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중국에서 해운업에 종사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자마자 진해고등해원 양성소 출신 정긍모, 김영철, 한갑수 등과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1945년 11월 11일 군정 당국과 협의하여 해방병단을 창설하고 초대단장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 해군의 창성일이 된 날이다. 해병병단은 1946년 6월 해안경비대로 개칭되고, 손 제독은 해안경비대 총사령관 겸 해병학교(해사 전신) 교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정부수립과 함께 해안경비대가 해군에 편입되고 대한민국 최초의 해군제독, 초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6.25전쟁 직전 해군은 7천 명(해병대 1,200명 포함)의 병력에 함정 36척(경비대 33척, 지원 3척)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구잠함(P.C) 4척을 구입하였지만 전쟁 전에 배치된 것은 PC-701(백두산) 1척 뿐이었다.
1949년 10월 1일 손원일 제독은 단장으로, 손옥규 중령을 함장으로 인수단 17명이 미국으로 출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 해군이 사용하다가 퇴역하여 미 해양대학교 실습선으로 사용되고 있는 엔슨 화이트 헤드는 제2차 대전 때 전사한 이 학교 출신의 엔슨 소위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무기와 탄약을 제외하고 1만 8천 달러에 인수하여 2개월에 걸친 정비작업을 거쳐서 백두산함으로 명명되었다. 묘하게도 같은 이름이 명명된 것이다. 백두산함은 하와이 진주만에서 3인치 포와 무기를 장착한 후 1950년 3월 20일 출항하여 1950년 4월 10일 진해항에 도착했다. 숙련훈련을 마치고 다시 진해항에 복귀한 것은 6.25전쟁 발발 전날인 6월 24일 11시 30분이었다.
그날 밤 600명의 북한 특수부대 무장병력을 태운 1천 톤급 북한 무장수송선 한 척이 부산을 향하여 은밀히 침투하고 있었다. 백두산함(함장 최용남 중령)은 5시간에 걸친 추격전을 펼쳐 치열한 격전 끝에 적함을 침몰시켰다. 일본에 주둔하던 미군의 병력과 무기와 군수물자가 부산항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백두산함이 부산 앞 바다를 지켜낸 덕분이었다.
해상전투를 승리로 이끈 백두산함은 군사지구 방어, 서해안 봉쇄, 여수 철수, 덕적도, 연평도 탈환, 인천상륙작전 등에서 활약하였다. 3인치 함포는 전쟁기념관에 전시물로, 백두산함은 전쟁기념관에 벽면 그림으로, 돛대는 2010년 문화재로 지정되어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손원일 제독과 박옥규 중령은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었다. 손 제독은 백두산함을 인수한 후에도 미국에 남아서 함정 추가 구입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고, 박옥규 중령은 백두산함을 최용남 중령에게 인계한 후 인수단을 이끌고 미국에 와 있었다. 척당 1만 2천 달러에 추가로 구입한 PC-702(금강산), PC-703(삼각산), PC-704(지리산) 등 3척에 무기를 장착하여 진해항에 입항한 것은 1950년 7월 하순이었다. 4척의 함정 구입 자금은 6만 달러다. 정부 자금 4만 5천 달러에 해군 장병과 가족의 모금액 1만 5천 달러가 보태졌다.
물론 함정 전조를 위한 자체 노력도 대단했다. 1946년 2월 말 조함청이 설치되어 일제의 진해공장에서 일하던 한국인 기술자, 기계, 자재 등을 이용한 총무공정에 이어 국내 건조 함정이 점차 늘어가고 있었다.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여사는 이화여전 음악과 출신으로, 손제독이 쓴 가사에 곡을 붙인 해병행진곡(해군가)의 작곡자이며 해군 부인들과 삵 바느질로 백두산함 구매금을 마련했다. 세브란스 의전을 나온 동생 원태는 몇몇 의사의 면접과 신체검사 등으로 해병학교 학생 선발에 힘을 보탰다. 온 가족이 해군 건설에 힘을 다한 것이다.
민영구 제독은 상해 만국항해학교를 졸업하고 중일 전쟁 때 군대와 군수품을 수송하면서 임시정부의 비밀업무를 수행했다. 1943년 광복군 조직에 함께하고 총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광복 후 해군에 투신하여 작전참모부장과 해군 사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부친(민재호)과 부인(이국영) 또한 독립유공자이다.
제2차 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아이젠하워 총사령관을 보좌하고, 광복 후 해방병학교의 교관을 맡았고,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의 정보장교를 하다가 미 해병 장교로 전과하여 서울수복 작전 중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제19, 21묘역에 해군 장병들의 묘소가 있다.
이범희 목사(6.25역사기억연대 부대표, 6.25역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