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9년 8월 16일부터 9월 7일까지 23일간 존스 선교사와 함께 서울에서 중부 내륙을 거쳐 부산을 여행한 뒤 귀경하기까지 남부 지역 선교 정탐기를 연재 중이다. 아펜젤러 남부순행 일기를 번역한 리진만 선교사는 지난해 발표한 히버 존스의 일기 번역의 지명 오류를 교정하는 한편, 그들이 숙박했던 경유지의 객사와 당시 지도 등을 수집해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했다. 아펜젤러와 존스의 순행일기는 마땅히 소개돼야 함에도 한글 번역이 없었던 것을 선교사가 갔던 길을 따라간다는 마음으로 리 선교사가 최초로 번역해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리 선교사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의 선교 경험을 살려 단순히 말과 뜻의 옮김을 넘어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에 임하는 자세, 구상 등을 재현하는데 주력했다(편집자 주).

1897년(또는 1898년) 연례회의에 참가한 선교사들. 맨 우측이 아펜젤러 선교사
▲1897년(또는 1898년) 연례회의에 참가한 선교사들. 맨 우측이 아펜젤러 선교사 ⓒUTS Burke Library

나는 앤드류 감독32)이 이곳에 도착하면 나의 이 우둔한 구상을 전하기 위해 이 계획을 지금 다음과 같이 짜고 있다.

나는 서울에서부터 내륙 정탐여행을 마치고 이곳 부산에 있습니다. 나는 내일 귀경하기 위한 출발을 기대합니다. 순행 결과는 선교정책 구상을 총체적으로 변경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항구 도성에 진출하여 조선의 동부지역 사역을 부산에서 해야 합니다. 사역자들이 조만간 이곳에 오기를 기대하고 저는 이 일을 위해 선교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적당한 부지를 오늘 오전 답사했습니다.

일본인 주거지역 안이나 주위에는 적당한 부지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해관과 영국 영사관이 배정을 받았고 중국 영사관 건물이 현재 건축된, 첫 번째 언덕이나 두 번째 언덕을 넘어가는 것이 적절하리라 봅니다.

1899년 정동 선교부 지역
▲1899년 정동 선교부 지역 ⓒ아펜젤러 앨범

우리의 목적에 합당한 곳은 중국인 거주 지역이 시작하는 곳에서 가능하다면 커다란 나무가 서 있는 곳에서 돌아오는 지역까지입니다. 그 높은 지역에 있는 아무 공간이든 좋은 선교 부지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최대한 많은 선교사를 조선인들한테 보내고 싶지만, 외국인 조차지(租借地)에 있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나는 당신이 서울에 당도하기 전에 이곳의 부지를 보실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왜냐하면, 서울 연차총회에서 이 문제가 제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관의 헌트 해관장이 감독님께 이 편지를 전달할 것이고 당신이 필요로 한다면 편의를 제공해 주기로 동의했습니다. 헌트 해관장 부부는 영국 성공회 교인이며 우리의 친구입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감독님이 곧 우리와 만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을 제물포에서 뵙겠습니다. 맥길 의사 부부에게 우리의 사랑을 전해주시고 스크랜턴 의사를 비롯한 우리가 따스하게 환영한다고 전해주십시오.

다음 편지는 ‘일본제일은행’에 보내는 것인데 특별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헨리 G. 아펜젤러

1904년 종군기자 로버트 던(Robert Dunn)이 환전한 150달러
▲1904년 종군기자 로버트 던(Robert Dunn)이 환전한 150달러 ⓒ미국 주간지 Collier’s

은행장님께,

나는 며칠 전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륙을 통해 순행을 마치고 도착해 귀로 길은 증기선을 이용하려 합니다, 이러한 긴 여로에는 많은 현금을 지참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기에 나는 금액이 적히지 않은 백지 수표를 지참했습니다. 홍콩상하이은행 수표를 내 지갑에 넣고 내가 필요할 때는 꺼내서 사용하기를 기대했습니다.

나는 이곳에 있는 귀하의 지점을 어제 방문했고 그 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귀하에게 불평하는 것은, 그 지점에서 무례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귀 지점 은행원들에게 나는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바로 일본인은 예의가 바른 사람들입니다.

이곳 지점에서 나는 나의 질문에 대한 공손한 대답을 들을 권리가 있고 또한 방문객은 신사로 대접받아야 합니다. 저는 그 지점에서 불한당 취급을 받았으며 적어도 그들은 내가 그렇게 느낄만한 행동을 했습니다. 나는 속으로 혹시 내가 다른 은행에 온 것은 아닌지 하며 “여기는 어느 은행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바로 들려오는 대답은 “일본 제일은행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요청을 들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나의 수표에 대해 불손하게 질문받았습니다. 단호하게 멸시하는 태도로 간단하고 퉁명스럽게 돌아온 대답은 “할 수 없소”였습니다. 나는 은행 매니저가 책상에서 일어났을 때 그에게 불평을 말했습니다. 매니저는 내가 말한 내용을 엿듣고는 백지 수표를 들고 통역에게 얘기했습니다. “이 사람의 신원 확인을 해야 하는데, 여기 해관의 헌트 해관장을 데리고 오면 됩니다”라고 말하며 “우리는 이 수표를 원하는 금액이 얼마이든 현금으로 교환하여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조금 믿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며 해관장 사무실로 향했고, 해관장과 함께 은행에 같이 가서 신사 대접을 받고 50달러를 현금으로 교환했습니다. 수수료로 70센트를 제하고 현금을 받아 기쁘게 나왔지만, 결코 나를 대접한 방식에 대해서는 만족하지는 못했습니다.

내가 아는 한 수수료율은 너무 높습니다. 어떤 요율로 그렇게 수수료를 받았는지 나는 모릅니다. 서울에서는 봉투에 넣기 전까지 100달러당 95센트의 수수료를 지급했지요. 어쨌든 나는 비록 요율 변동이 터무니없다고 느꼈지만, 헌트에게 말했듯이 현금을 바꿀 수 있어 기쁘다고 했습니다.

은행장님, 나의 수표에 관한 일은 여러분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나의 불평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 수표를 가지고 귀 은행을 방문했을 때 창구직원들은 고객을 친절하게 영접하고, 어느 은행을 가나 같은 요율로 환전하여 수표를 지불하도록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귀중한 시간을 뺏은 것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이곳을 다시 방문할 때 나는 어제 받았던 대접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기를 기대합니다. 내가 귀하의 은행 규정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공손하게 설명받기를 바랍니다.

저는 신사입니다.

아펜젤러 남부순행 일기 영인본 원본에 있는 친필로 쓴 이름
▲아펜젤러 남부순행 일기 영인본 원본에 있는 친필로 쓴 이름 ⓒ배재학당역사박물관

1889년 9월 3일
부산에서,
헨리 G. 아펜젤러

1889년 9월 4일 수요일, 부산

오전 8시 30분, 히꼬 마루(Hijo Maur)33) 증기선이 들어와 있음. 우리가 오늘 오후에 떠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어제 저녁 헌트 부인이 우리를 위해 정찬을 대접했고, 우리는 서울에 같이 있을 때 함께했던 아름다운 시간을 회상하며 이야기했다.

2차 안개 발생일을 기준으로 해서 나는 선교부의 협력 총무인 레오나르도 목사에게 편지를 작성하고 다음 사항들을 적었다:

나는 우리가 해야 하는 선교정책에 관해 대체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밤을 새우며 사역했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은 언제나 우리 선교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항상 유능한 사람들이 파송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평안도 도청이 있는 평양에서도 사역합니다. 이 일 이후에 조선 동부에서 활동하려 합니다. -이 나라의 반을 차지하는- 이곳(부산)에 1명의 선교사가 필요하고 1년 안에 북쪽 항구도시 원산에 또 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서울에서 이곳까지는 항상 가로막고 있는 산맥34)이 있어 수도로부터 원활한 활동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이 매우 중요한 사항이라 말할 수 있으며, 저의 개인적인 탐사를 통해 알게 된 이러한 사항들은 선교순행의 시간과 비용을 들일만 한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앤드류 감독
▲앤드류 감독 ⓒwikipedia.org

1889년 9월 26일 목요일, 서울

앤드류 감독(Bishop Edward Gayer Andrews)35) 부부가 9월 20일 일본을 떠나 제물포에 도착했다. 감독은 아시아선교와 회의를 위해 공식 방문했다. 목요일 오전 나는 학교 강의를 마치고 오후에 제물포로 향했다. 금요일 오전 오와리 마루호(Owari Maru) 증기선이 도착했고 나는 갑판 위에 올라 감독 부부를 영접했다.

금요일 오후(1889년 9월 27일)

우리는 제물포를 둘러보며 여러 가지 관심 있는 사역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토요일(9월 28일) 오전 우리는 가마를 타고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좀 피로했지만, 길에서 빠져나왔다는 데 대해 기뻤다. 앤드류 감독 부인께서는 그녀가 우리 선교부 지역에 도착하자 이곳이 마치 천국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고, 나도 선교부 지역이 내가 지금껏 본 모습 중 가장 유쾌한 지역 같았음을 고백한다.

스크랜턴 대부인(Mrs. W. F. Scranton)이 우리와 함께 정찬을 함께 했고 모든 선교사가 감독 부부에게 인사를 위해 방문했다. 피곤해서 우리는 일찍 쉬었다.

주일(9월 29일) 오전 앤드류 감독은 설교했고 강 형제(강재형 -역자 주)가 통역했다.

11시에 예배당36)에서 감독은 “하나님을 신뢰하세요”라는 제목으로 간결한 사고, 유창한 화법, 그리고 효과적인 전달로 설교를 했다. 그는 단순하게 성도들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탁월한 능력의 감리교 감독은 교회에 영예가 될 것이다.

1884년 창덕궁 농수정의 고종
▲1884년 창덕궁 농수정의 고종 ⓒBoston Museum,U.S.A.

오후에 우리는 성곽길을 걸어 경희궁(Mulberry Palace)37)으로 향하며, 지금은 왕실이 사는 왕궁을 멀리까지 살펴보았다. 저녁에는 찬양 예배를 드렸는데, 내가 찬양을 인도했고 감독은 ‘주 연사’였다.

월요일(9월 30일) 오전 10시에 우리는 스크랜턴 대부인 집에서 공식 연례회의38)를 열었다.

오전 시간에는 나와 스크랜튼 선교사, 그리고 스크랜튼 의사의 보고서를 읽는 것으로 진행했다. 그로부터 오늘 오전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매일 2차례의 회의를 개최하며 아직 마치지 못했다. 우리는 지난 사역에 대해 자세하게 검토해 보았고, 특히 향후 선교정책에 관해 검토했다. 여기에서의 삶은 바쁘게 돌아간다.

월요일 저녁에 감독은 올링거 집에서, 화요일 저녁은 스크랜튼 집에서 정찬을 했고, 수요일 저녁은 남자 선교사들만의 파티가 있었고, 목요일 언더우드 형제 집에서, 금요일에는 데니 판사 집에서 정찬을 가졌다.

우리 집 정찬에는 데니 판사, 다이 장군, 여러 사업가, 메릴, 미 수비대의 전사 리히트 허치스, 헤론이 참석했고, 스크랜튼 선교사, 언더우드 선교사, 헐버트 씨와 딘스모아 공사는 방문 중인 손님들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다.

아래 내용이 한국선교부 연례회의에 보고한 보고서 전문이다.

스크랜튼 대부인과 학생들
▲스크랜튼 대부인과 학생들 ⓒGCAH Digital Gallery

1889년 연례회의, 감리사 보고서

(※보고서 내용은 감리교본부에서 발행한 1889년 연례회의 자료집에 주요 사항이 정리되었다. 여기에서는 당시 아펜젤러가 보고한 선교순행 내용 중 자료집에 실리지 않은 부분을 발췌해 옮긴다. 아펜젤러가 보고한 전체 내용을 보고자 하는 독자들은 ‘1889년도 아펜젤러 순행일기 원본’을 참조 바란다.)

왕실의 칙령과 미 공사관의 명령을 받은 가운데서 나는 2회의 순행을 하였다. 그 첫 번째 여행은 1888년 10월부터 11월까지 의주군을 다녀온 것이다. 평양과 의주에서 나는 세례 청원자들을 만났고 세례를 주었으며 필요한 사항과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왔다. 장39) 형제는 평양에서 사역하고 있다.

올링거
▲올링거 ⓒGCAH Digital Gallery

올해(1889년) 2월에는 올링거(F. Ohlinger)40) 형제와 함께 주일날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나는 충청도 수부41)가 있는 곳까지 100마일을 다녀왔고, 그곳으로부터 올링거 형제는 전라도 감영이 있는 곳42)까지 183마일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을 통해 겨울 기간에도 조선의 남부 지역을 순행한다는 것은 그리 가혹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여행 기간 동안 직접적인 선교활동은 없었다.

지난달 존스 형제와 나는 정탐 여행으로 원주를 거쳐 대구, 부산까지 다녀왔다. 부산까지 가는 데 16일이 걸렸는데 돌아오는 길에 증기선을 이용하지 않았으면 1개월 정도 걸렸거나 아니면 의주군(평안북도)을 다녀올 만큼 걸렸을 것이다. 미리 계획을 잘 세운다면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은 일 년 내내 여행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나는 이 사실을 기쁘게 보고하는 바이다.

우리는 원주에 외국인이 방문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많이 가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강원도의 수부는 작은 도성이었고, 도성 구조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았으며 풍요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았다. 원주를 떠나 하루 반 만에 서울과 연결된 대로를 만났지만, 그다음 30마일의 거리는 무척 울퉁불퉁한 험한 길이었다.

이 거친 길은 처음부터 휴식 생각을 잊을 만큼 계속되었다. 바위들과 호박돌을 밟으며 10마일 정도 올라가면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르는 관문인 문경새재에 도착했다. 조령에서부터는 내리막길이었고, 못지않게 험했지만 내리막길의 길이가 좀 짧았던 것 같다.

여기를 통과하는 길은 계속해서 교차하고 있었고 내 개인적으로는 서울에서 경상도 사역을 위해 이 재를 넘는다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

경상도는 부유한 도이다. 파종이나 심긴 나무는 없었지만, 그러나 강변의 토양은 비옥했다. 대구에는 커다란 건축물이 없다.

경상도 수도 대구 성내에는 10,000채의 가구가 있다고 들었고 성 밖에도 그만큼의 집이 있다고 들었다. 이 통계는 후하게 매겨서 그렇다는 것이다. 대구 도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경상도의 중심이고, 조선의 도시 중 이만큼 넉넉하고 번성한 도성이 어디에 있는가? <끝>

1910년 광화문 모습
▲1910년 광화문 모습 ⓒGCAH Digital Gallery

[미주]
32) 당시 일본주재 감리교회 앤드류 감독(Bishop Andrews)은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1889년 12월 월례 선교회에서 서울(정동) 구역회(계삭회)를 조직하도록 권고한 장본인이다.
33) 당시 일본과 한국을 운행했던 HiGo Maru(肥後丸) 증기선의 오기일 것이다. ‘부산지방기독교전래사’ 36쪽에 보면 1889년 8월 게일이 제물포에서 부산으로 내려올 때 이용했던 증기선이 바로 히꼬마루호였고, 이후 1893년 에비슨 박사가 일본에서 부산에 올 때 이용했던 증기선 역시 히꼬마루호였다.
34) 이 산맥은 백두대간을 말한다. 조선 후기 문경지역으로 가기 위해 백두대간을 넘는 고갯길로는 이화령과 계립령, 조령 등 세 곳이 대표적이었는데 아펜젤러와 존스 선교사는 조령을 넘었다.
35) 앤드류 감독은 1872년 감리교회 감독으로 선출되었으며, 1889~1890년 한국, 일본, 중국 선교회 감독을 맡았다.
36) 정동교회를 말한다. 1885년 7월 29일 아펜젤러 목사가 정동에 사저를 마련하고 선교활동을 시작했고, 1895년 9월 9일 정동제일교회 예배당(현 벧엘예배당) 정초식 거행 이전까지 사용했던 한옥 예배당을 말한다.
37) 경희궁 터는 1883년 화재 후 뽕나무밭으로 변했고, 외국인들은 이를 ‘뽕나무궁’(Mulberry Palace)라 했다(왕립아시아학회, ‘Korea Review’ 1902년 10월호).
38) 아펜젤러는 그의 연례보고서 서두에서 조선 선교 6년째, 제3회 연례회의라고 기술했다(The Korean Mission is in its sixth year and in its third annual meeting).
39) 아펜젤러는 훈련받은 신도 가운데 2명을 최초의 ‘본처 전도인’으로 임명하였는데 장 형제가 바로 장점화이며, 다른 한 사람은 배재학당에서 한문을 가르치던 유치겸이었다.
40) 올링거 선교사는 1888년 1월 한국에 왔다. 우리나라 최초 인쇄소인 삼문활판소를 배재학당에 설립했고, 국내 최초의 영문 잡지인 ‘The Korean Recorder’와 월간지 ‘The Korean Repository’를 출간했다.
41) 충청도(忠淸道)는 충청남도, 충청북도 일대를 관할했던 행정구역으로 감영 소재지는 공주였다.
42) 1413년(태종 13년) 전국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하면서 전라도는 전주에 관찰사를 두고 현재의 전라남도, 전라북도와 제주도에 걸친 광활한 지역을 관할하였다. 당시, 전주는 전라도를 총괄하는 전라감영의 수부(首府)였다.

※ 위 일기를 판독해 영문 타자한 Betty Kim과 번역 감수를 해주신 강원대학교 영문과 신성균 박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번역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