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9년 8월 16일부터 9월 7일까지 23일간 존스 선교사와 함께 서울에서 중부 내륙을 거쳐 부산을 여행한 뒤 귀경하기까지 남부 지역 선교 정탐기를 연재 중이다. 아펜젤러의 남부순행은 총 6차에 걸쳐 진행한 국내 선교여행 중 5차에 해당하며, 첫 남부 지역 여행이다. 아펜젤러가 기록한 남부순행 일기는 132년간 전문이 번역·공개되지 않다가 감리교정보자료실과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의 협력으로 리진만 선교사에 의해 최초로 번역·공개되는 것이다. 역자는 존스 선교사가 같은 기간 기록한 남부순행 일기도 작년 10월 본지에 최초로 번역·공개한 바 있다(편집자 주).
1889년 8월 20일 화요일
금일 아침 우리는 관찰사와 목사(牧使)께서 우리를 기꺼이 면담하겠다는 통보를 받고 강원감영 수부를 떠나기 전 두 분 고관들을 예방하기로 했다.
관찰사는 무뚝뚝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연배가 드신 분이고, 우리에게 대할 때나 말할 때 보면 고지식하고 막무가내처럼 보였다. 수부 전체는 이 감영에서 정한 원칙들로 움직인다. 접견실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목사는 55~60세 정도로 보였는데 관찰사보다 인품이 더 나아 보였다. 우리가 관찰사를 예방했을 때 관찰사께서 우리가 타고 온 말(馬)을 보기를 원해 우리 말을 보여드리고 가져왔다.
나의 강원도 수부(도청)에 대한 인상은 실망스러웠다. 강원도 감영이 소재한 곳은 주로 쌀농사를 짓고 있다. 동쪽으로는 높은 산10)이 있고 서편에는 낮은 구릉이 있고 북쪽과 남쪽에는 논이다. 원주 도성은 성벽이 없었고, 타일로 된 집도, 뭔가 살만한 물건도, 팔릴만한 것도 없었다. 나는 외국 물품 몇 개가 소개된 것을 봤다.
여기에 크리스천들이 있다면 우리는 이곳에 진출할 것이지만, 그러나 이곳은 선교 중심이 아니고, 앞으로도 선교사역의 중심지는 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조선을 여행하면서 처음으로 조선 사람들은 뱀을 숭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제 길을 지나며 본 2개의 기둥에는 뱀 모양이 조각되어 있었다. 원주 인근에서 우리는 2개의 작은 불탑을 보았다.
오늘 아침 말을 타고 지난 길은 아름다웠고, 자연 그대로였으며, 기복이 심했지만, 야생의 매력이 있었다. 삼림이 울창한 그 풍광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이곳 원주를 방문한 첫 번째 서양 사람이라고 들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증명할 방법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은둔의 고장을 첫 번째로 방문한 개신교 선교사임은 틀림없다. 사람들이 굉장한 호기심을 보였는데 여기서 나타낸 그 모습은 내가 황해도 안악을 처음 방문했을 때도 보지 못한 반응이었다. 여행하느라 무더웠지만 여기 산속의 공기는 상쾌했다.
1889년 8월 21일 수요일
우리는 서울에서 대구로 이어지는 대로(大路)11)에 다다랐다. 우리가 지난 길은 높은 산과 깊은 계곡 길로 정말로 험한 길이었지만 야생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우리는 이제 충청도 땅을 밟았는데 사람들이나 길이 좀 낫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충주에 미치기 30리 앞12)에서 숙박했다. 여인숙에는 우리가 잘 방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축사 옆에서 가축들과 함께 자게 되었는데 이는 내 인생 첫 번째 경험이다.
충주는 옥토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고 조선의 관점에서 본다면 괜찮은 도성이었다. 거기에는 성벽이 있었는데 관리가 잘되어 있었고 성벽 밖에도 성 안쪽만큼의 집들이 보였다.
오늘은 날씨가 매우 뜨거웠다. 지금 시각이 오후 3시인데 우리는 나아갈 수 없었다, 존스와 나는 이곳에서 20리 거리에서 신나는 수영을 했다. 나는 방금 엘라와 앨리스에게 서울로 가는 사람 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1889년 8월 22일 목요일 (일기 쓰지 않음)
1889년 8월 23일 금요일
대로에 닿았을 때부터 나는 조선에서 일찍이 밟아보지 못한 험한 길을 만났다. 수요일 지나온 길은 그리 힘들지 않았지만, 어제 아침부터 그러니까 100리 길은 정말 험난한 여정이었다. 충청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는 산맥13)같았다.
1889년 8월 24일 토요일
나는 어제 충청도에서 경상도에 이른 일정을 쓰기로 한다. 목요일 오전 우리는 산악길을 10마일(40리) 나아가서 쉬었다. 오후에도 역시 우리는 조선에서 가장 힘들고 험난하고 위험한 길을 10마일 지났다.
문경새재에 있는 성문과 성벽은 위의 2개의 도(道)를 가르고 있었다. 이 문경새재는 꽤 높은 산꼭대기에 있었다. 이쪽으로 넘어와서 우리는 문경현 아관 객사14)에서 잤다.
나는 금세 사람들의 독특한 억양을 간파할 수 있었다. 물론 평안도 사람들의 방언 구조에 관해 얘기하기는 이르지만, 경상도 사람들은 그들과 같거나 비슷한 사투리를 쓰고 있었다. 이 두 지방 사람들이 말하는 데에는 분명 유사한 점이 있다. 이 사람들은 그들이 강조하는 것에 대해 표현하는 독특한 버릇이 있다. 그들은 토끼가 산야를 뛸 때처럼 문장을 말할 때 그렇게 한다. 물론 그들은 우리가 서울에서 말하는 단어와 다른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서울이 표준임을 인식하고 있다.
단감나무가 계속해서 보였다. 감나무는 아름다운 나무이고, 크고, 잎사귀는 거무튀튀하고 가지는 굵다. 논도 멋졌다. 우리는 문경, 함참15), 상주, 모두 작고 그리 중요하지 않은 목(현)을 지나왔다.
우리는 이 지역에서 다른 지역을 지나올 때 보다 더 많은 기업 간판을 볼 수 있었다. 여인들은 방직 일을 했고, 남자들은 실을 잣거나 모자를 만들었다. 나는 한 남자와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품행에 관한 설교를 했다. 상투적인 대답 이외에는 없었지만 나는 그에게 어떤 일 하느냐고 물었다. 그가 답하기를 “놀기요”, 이 뜻은 ‘빈둥거림’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화살을 돌려 말하기를 조선인들이 가난한 이유는 단지 여인들만 일하기 때문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미국인들은 남자들이 힘든 일을 하고 또한 여인들에게는 쉬운 일만 맡긴다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창피하다고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돌아서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듯이 단지 “그거 좋군요” 하며 파괴는 다툼보다 낫다고 여길 것이고 내가 여기서 떠나면 그는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그렇게 고대하던 복숭아와 참외 산지에 도착했다. 나와 존스는 건강하다.
1889년 8월 25일 월요일16), 션산
우리는 아관의 객사가 아니고 조그만 마을17)에서 체류했는데 경상도 감영 도성이 있는 곳까지는 여기서 100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우리는 지난 토요일 오후 빗속에 나아갔기 때문에 진두18)에서 주일을 보냈다.
오늘 아침 우리는 50리를 나아갔다. 여정에 특별한 것은 없었다. 야산들은 민둥산이었고 평안도의 남부 지방처럼 붉은색 흙이 많이 보였다. 북쪽 집들과 비교해 이곳 집들이 나았고, 거기에는 규모가 큰 마을이 많이 있었다.
1889년 8월 27일 화요일, 대구 경샹도
우리는 마침내 넓고 부유한 경상도의 수부에 도착했다. 우리는 산을 가로질러 왔는데 이 경사진 계곡은 내가 조선에서 본 곳 중 가장 광대한 풍경이었다.
우리가 이 계곡에 들어섰을 때 해는 막 산꼭대기를 넘어갔다. 우리는 3마일 이상을 천천히 올랐고, 빠른 물살이 지나는 중턱 좌우에는 볏논이 있었고 그 위쪽에는 산이 우뚝 서 있었다. 계곡 폭은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물길은 구불구불했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우리는 공기가 시원하고 상큼하다고 느꼈다.
나는 오늘만큼 말을 타고 여정을 즐긴 일은 없었다. 침구를 더 덮었지만, 밤에는 싸늘했다.
모든 사람이 오늘은 늦잠을 잤고 우리는 늦게 출발해서 이곳에 왔다. 이곳 감영 북문을 통해 오후 1시에 도착했다. 이곳 경상도 수부의 첫인상 역시 그리 좋지는 않았다.
남문 뒤쪽으로 말을 타고 나가 봤으나 파는 물건을 볼 수 없었다. 나는 실망해 되돌아왔다. 우리는 판관(判官)19)에게 호위병을 요청했고, 오늘이 마침 장날20)이어서 장마당을 구경하러 갔다. 감영은 서쪽에 조성되어 있어 우리는 서문을 통해 장마당으로 갔다. 가는 길 역시 그리 넓지는 않았고 팔려고 내놓은 소량의 무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지나가면서 더 많은 무를 보았고(규모가 크지 않음), 더 나아가니 팔려고 내놓은 무가 가득했다. 길은 사람들로 뒤덮였고 우리가 동쪽으로 방향을 틀자 거기가 ‘커다란 시장’의 중심이었지만 이름을 아주 잘 못 지은 것 같다,
조선인들이 필요로 하는 바늘부터 쇠지레에 이르기까지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나와 있었다. 시장 광경은 우리가 서울에서 매일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시장 경기는 매우 활발했다. 우리는 방문자를 위해 가설된 건물로 올라갔다. 관찰사와 고관들이 이곳에 올라 커다란 밀짚모자부터 헐렁한 반바지 등 진열된 상품들을 천천히 둘러보는 곳이란다. 시장 광경은 참신한 모습이었고 대구는 단지 중요한 도시일 뿐만 아니라 결코 가난하거나 비생산적이지 않은 경상도의 한가운데에 있다. 우시장도 보았다. 이곳의 암소와 황소는 서울이나 북쪽 지방의 소보다 크지 않았다. 서쪽으로 더 가서 낮은 구릉에 올라 대구 도읍과 주변의 근사한 풍광을 볼 수 있었다. <계속>
[미주]
10) 원주의 진산인 치악산(1,288m)
11) 1770년 작성된 신경준의 『道路考』에 따르면 경성에서 시작해 용인~양지~충주~대구~동래~부산진까지 가는 ‘경성동남저동래로’를 말한다.
12) 존스의 일기를 참조하면 이들이 원주에서 충주로 향할 때 소태재를 넘었기에 거기서 충주 도착 전 30리 지점은 목계 나루터일 것이다.
13) 문경새재가 위치한 소백산맥 조령산(1,026m)을 말한다.
14) 문경현 객사는 현, 문경서중학교 앞에 있는 관산지관(冠山之館)이다. 주관(정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좌익사는 정면 2칸, 측면 2칸인데 두 건물이 반 칸 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15) 현, 함창을 아펜젤러 일기 원본에는 한글로 ‘함참’으로 기록했다.
16) 아펜젤러는 8월 22일(목요일) 일기를 쓰지 않았고, 또한 8월 26일을 착각해 25일로 적었다.
17) 함께 여행했던 존스는 8월 26일 숙박지를 인동도호부(lager Magistracy of Andong) 객사라고 기재했고 아펜젤러는 날짜 옆에 한글로 ‘션산’ 이라고 쓰고 객사에서 묵지 않았다고 기록했는데, 두 분의 일기를 비교해 검토해 보면 당일 숙박은 인동도호부 객사일 것이라는 신빙성이 있다.
18) 진두(津頭) : 조선시대 뱃나루 터가 있어 나루 진(津)과 머리 두(頭)를 합쳐 진두라고 하였음. 현 경북 의성군 다인면 양서2리이다.
19) 당시 대구도호부의 관찰사는 김명진(金明鎭)으로, 대구읍지에 따르면 1888년 8월부터 1890년 6월까지 재직했으며. 이들을 영접한 판관은 홍용관(洪用觀)이었다.
20) 대구읍지에 따르면 “읍장(邑場)은 매 2일과 7일에 서상(西上)에서 열리는 장이다. 서상은 부(府)의 서쪽으로 3리 거리에 있다”라고 하여 아펜젤러의 설명과 일치한다.
※ 위 일기를 판독해 영문 타자한 Betty Kim과 번역 감수를 해주신 강원대학교 영문과 신성균 박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번역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