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9년 8월 16일부터 9월 7일까지 23일간 존스 선교사와 함께 서울에서 중부 내륙을 거쳐 부산을 여행한 뒤 귀경하기까지 남부 지역 선교 정탐기를 연재 중이다. 아펜젤러 남부순행 일기를 번역한 리진만 선교사는 지난해 발표한 히버 존스의 일기 번역의 지명 오류를 교정하는 한편, 그들이 숙박했던 경유지의 객사와 당시 지도 등을 수집해 독자들의 이해를 쉽게 했다. 아펜젤러와 존스의 순행일기는 마땅히 소개돼야 함에도 한글 번역이 없었던 것을 선교사가 갔던 길을 따라간다는 마음으로 리 선교사가 최초로 번역해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 리 선교사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의 선교 경험을 살려 단순히 말과 뜻의 옮김을 넘어 초기 선교사들의 선교에 임하는 자세, 구상 등을 재현하는데 주력했다(편집자 주).

1889년 8월 28일 수요일

수요일 오전은 긴 밤을 잘 쉬었기에 매우 상쾌했다. 대구도호부(大邱都護府) 성벽의 모습으로 보자면 직사각형21) 도읍이라 할 수 있겠다. 관찰사와 판관의 관사는 도성의 북쪽 지역에 있다. 세금징수소는 동쪽과 서쪽이 아닌 남쪽과 북쪽에 있다.

서문 밖에는 그 밖의 집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경제활동은 그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규모는 성내 도읍만큼일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내가 전신국에 갔을 때 들은 얘기로는 성내에는 1만여 채의 집이 있고 성 밖에도 그만큼의 집이 있다고 했다. 이는 가옥이 20,000채, 인구로 말하자면 100,000명이 사는 커다란 도성이다. 내 생각으로는 대구 도성과 주변 지역은 평양만큼 크고 아마도 서울 이외의 도시로서 평양과 버금가는 도성은 대구가 유일할 것이다. 내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 도성의 크기를 송도와 비교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아펜젤러 선교사(가운데) 가족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부인 엘라, 왼쪽에서 두 번째는 훗날 6대 이화학당장을 역임한 앨리스
▲아펜젤러 선교사(가운데) 가족 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부인 엘라, 왼쪽에서 두 번째는 훗날 6대 이화학당장을 역임한 앨리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대구에서는 국가 소유이거나 상점 몇 군데 이외에는 타일로 장식된 집을 보기 쉽지 않았다. 도성에는 믿을지 모르겠지만 가난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도성은 잘 구획되어 있지 않았고, 경사진 곳에 있었다. 강 위의 평야로부터 현재 도성이 있는 북쪽까지 오르막으로 되어있다.

대구 시장에 진열된 물품들은 송도22)의 것과 비슷했지만, 그것은 여러분이 평양에서 느끼는 풍부함이라든가 값이 적절하다고는 느낄 수 없었다. 이곳 도성에 사는 사람들은 이 정도 규모의 도성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그런 생기가 돌지 않았다. 이것은 물론 내 첫인상이니까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교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서울이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는 평양이고 그곳(평양 선교부 –편집자 주)이 관리하는 도성은 후에 생겨날 것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평양의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한다면 평양은 커다란 거점이 될 것이다. 수도에서 당신들은 수일 이내에 다른 주요하고 영향력 있는 도성으로 갈 수 있다. 내가 확신하기로는 평양이 아직 개항장으로 지정이 되지는 않았지만 1~2년 사이에 증기선이 제물포와 평양을 오갈 것이라 믿는다.

대구읍성 복원 지도
▲대구읍성 복원 지도 ⓒ대구시 중구

송도는 서울에서 항상 관리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주요한 도성은 대구이다. 나는 남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거리 즉 3일의 여정인 부산에서 대구를 충분히 관리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경새재는 내가 서울에서 경상도를 관리하자면 넘을 수 없는 장벽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산을 넘기 위해 우리의 목숨을 담보하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겨울에 문경새재를 넘는다는 것은 생명을 거는 행위이며 항상 사람이나 야생 동물의 위험이 있다. 조선 사람들은 수 세기 동안 이 재를 넘었지만, 넘기 위험한 산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은 경상도의 중심 지역인 이곳에 오기가 수월하고 경상도 내에 있는 모든 마을에 쉽게 갈 수 있고 또한 전라도와 충청도까지도 갈 수 있다. 부산에서 증기선23)을 타고 함경도의 수부(首府)인 함흥에 가서 사역할 수 있다.

경상도는 서울에서 가는 것보다 적은 경비와 편안하게 방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방안은 현재로서 나에게는 서울 사역을 강력하게 하려는 계획의 우려이기도 하다. 평양에 선교를 시작하고 가능한 한 이른 시일에 가족을 보내고, 다음으로 부산에 파송한 후 그다음 해에는 다른 선교팀을 경상도에 보내야 한다.

청도 객사, 도주관
▲청도 객사, 도주관 ⓒ청도군

1889년 8월 29일 목요일, 정찬(순행 일행들과 회식을 함)

우리는 어제 대구에서 70리를 나아갔고 이곳에서 40리 되는 곳에서 휴식하고 있다. 우리는 어젯밤 청도 관아 객사24)에서 숙박했다.

이 도성25) 역시 성곽으로 둘러싸인 곳이었는데 성내에 400여 채의 집이 있고 성 밖에는 더 많은 집이 있는 것 같았다. 지나오는 길옆에는 논들이 많았고 주위의 산들은 메말랐고, 황폐했고, 헐벗었다. 이 두 도성26)을 봄으로써 나는 이번 긴 여정의 끝을 기다린다.

밀양부 지도
▲밀양부 지도 ⓒ밀양시

1889년 8월 30일 금요일, 남쳔

오늘 70리를 나아갔는데 부산 도착 전 30리에 있는 마을(남천)이다. 어제 마을과 비슷하다. 오는 길 도중에 많은 논이 보였다. 지대가 높은 곳으로 들어서자 잘 재배한 콩밭을 보았다. 어제(8월 29일) 오후에는 밀양에 도착했는데 낙동강 제방 위에 목 아관이 있었다.

오늘은 강을 따라 나아갔다. 마을에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것처럼 보였다. 강물이 흐르는 유역을 따라 나아가다 보면 구릉 쪽에는 많은 집이 몰려 있었다. 나에게는 커다란 도성이 이렇게 불합리하게 조성되어 있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웠고, 반면에 시골 마을들은 더 높은 곳에 더 건강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오늘 밤 강둑에서 보냈다. 남천은 지대가 높았고 아름다웠으며 수백 채의 집들이 있었다.

밀양의 관아
▲밀양의 관아 ⓒ샤를 바라의 『조선기행』

1889년 8월 31일 토요일, Fusan

8월 마지막 날에 우리는 순행 마지막 도성에 도착했다. 우리는 남천에서 30리를 지나 다른 북쪽 지방보다 땅이 덜 비옥한 도성에 다다랐다. 서울과 부산 간 대로27)는 없다.

나는 친분이 있는 헌트28) 부부에게 오늘 오후에 방문하겠다고 기별하고, 그들과 만날 준비를 했다.

부산은 지난여름 내가 이곳을 거쳐 일본으로 갈 때보다 많이 변해있었다. 일본인들은 해변에 수영이나 서핑을 하던 곳 대신, 상업적인 건물을 세우고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수익을 위한 새로운 은행 건물을 건축하려 하는데, 여러 조합이 세우고 있는 건축물 뼈대는 이를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돈 벌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건물 중 하나는 어업조합에서 만든 것이다. 생선을 잡고 말리고 수출하는 양은 대단한 분량이다. 단층 건물에 바닥은 음각된 딱딱한 돌로 깔았는데 4각형 돌의 크기는 2피트쯤 된다.

1890년 부산해관과 헌트 해관장
▲1890년 부산해관과 헌트 해관장 ⓒGCAH Digital Gallery

서쪽 지역에 있는 새로운 학교 건물은 몰려들어 오고 있는 일본 젊은이들이 들어왔다가 바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듯 보인다. 이 지역은 주기적으로 소란스럽기도 하지만 일본인 거주를 위해서 안전한 숲과 높은 구릉을 확보해 두었다. 중국 영사관이 주재하고 있는 이 지역은 풍요하고 커다란 도의 규모에 비해 큰 교역 창구라 할 수 없지만 놀랍고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 당장 진출해야 한다.29) 기다리며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렇기에 나는 이 일을 선교본부에 보고할 것이다.

1889년 9월 3일 화요일, 부산

1년 전이었으면 우리는 벌써 증기선을 타고 제물포로 출발했을 것이다. 우리는 제시간에 왔지만 험한 날씨 때문에 그 배는 정박하여 있었다. 우리는 언제 배가 뜰까 하며 기다렸다. 나는 어제(9월 2일) 연차총회에 보고할 남부 순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서(안)를 작성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보고서를 마무리할 것이다; 조선에서의 선교사역 확장에 대해 나는 지난 한 해 동안 최선의 방안을 강구해 왔다. 나는 동북지방 다시 말하자면 함경도 지방을 제외하고는 모든 지방을 정탐했다.

해관장 숙소
▲해관장 숙소 ⓒ초대해관장 William N. Lovatt 촬영

이 보고서를 끝내기 전에 나에게는 몇 가지 확신과 논평이 있는데 이는 틀림없는 것이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서울에 맨 먼저 올라와 사역을 잘 시작했다. 내가 확신하기로는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병원과 학교 사역이며, 또한 선교사들은 최고로 유능한 분들이어야 하고 잘 임명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실수가 있으면 안 된다. 서울은 조선 전체를 고려한다. 지방은 수도를 바라보게 되고 모든 문의에 관한 최종 답을 수도에서 듣는다.

1886~1890년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데니
▲1886~1890년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한 데니 ⓒOregon Historical Society

2. 평안도에 두 번째로 진출했다. 이는 그럴 이유가 있다. 서울 이외의 도성으로서 서로 비교할 만한 도성은 평양과 대구이다. 대구의 가구 수가 20,000이라 하면 인구는 평양보다 더 많을 것이고, 데니(Owen N. Denny, 德尼)30) 판사가 측정한 평양의 75,000명~80,000명보다는 약간 큰 도성이다.

모든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평양은 대구보다 우월하다. 평양은 부유할 뿐만 아니라 주위의 다른 커다란 도성에 대구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우리 선교의 2번째 선교부는 평안도 수도인 평양에 있어야 한다.

3. 경상도 사역은 부산에서 해야 한다. 이 확신은 지난달 정탐 여행의 결과이다. 사자의 경계선(the Lion Pass)을 계획하는 것은 어리석다. 경상도는 넓고, 부유하고, 71개의 군(현)31)으로 구성되어있다. 경상도 수도는 부산에서 3일 거리이고, 나는 부산에서 배로도 갈 수 있다고 들었다.

데니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태극기(국가등록문화재 제382호)
▲데니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태극기(국가등록문화재 제382호) ⓒ국립중앙박물관

경상도는 북쪽 지역보다 남부 지역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4. 함경도는 서울에서 관리하는 것보다 부산에서 담당하는 것이 더 방문이 쉽고, 사역을 잘할 수 있으며, 비용도 적게 들고, 활동이 쉽다. 부산에서 36시간이면 편안한 증기선이 원산에 도착하게 될 것이고, 거기서 함경도 수도까지는 2일 반이면 가능하다. 서울에서 위의 도성으로 가려면 도로에서 여행 중 마주치는 어려움을 제외하고도, 최소한 2배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5.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역은 이곳 부산에서 쉽고 편안하게 할 수 있다. <계속>

1885년 부산해변 모습
▲1885년 부산해변 모습 ⓒ초대해관장 William N. Lovatt 촬영

[미주]
21) 아펜젤러는 대구 성벽을 보고 직사각형 도성이라고 기술했고, 함께 여행했던 존스는 6각형 도성이라고 기술했다. 또한 이들보다 10개월 전인 1888년 10월에 대구관찰사를 예방한 샤를 바라(Louis-Charles Varat)는 “평행사변형’으로 성벽이 이어져 있었다”라고 그의 여행기 『조선기행』에 썼다. 한편, 대구읍성의 축성 과정을 기록한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총 2,124보(步), 약 2.56km였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현재 예루살렘성의 길이는 약 4km이다.
22) 아펜젤러는 송도의 영문 표기를 Sunto라 했는데, 이는 션됴→션도→선도→숑도→송도로 정착되었다.
23) 1888년 외국인으로 처음 제주도를 여행한 샤이에 롱 미국 공사관 서기관은 1888년 10월 19일 부산에서 증기선을 타고 원산을 거쳐 블리디보스톡까지 여행을 한 바 있고, 초기 선교사들 역시 처음 상주한 동해안 도시는 원산이었다.
24) 조선시대(朝鮮時代) 청도군(淸道郡)의 객사로 쓰이던 것으로 도주(道州)는 고려시대에 부른 청도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정청에 왕을 상징하는 위패(位牌)를 모시고 지방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拜禮)하였으며, 양쪽에 동·서헌의 숙박 시설을 갖추어 이곳을 들리는 관원이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25) 태종 15년(1415) 주민의 호수를 기준하여 천호 이상의 고을을 모두 도호부로 만들게 되었는데 이때 ‘밀양 도호부’로 되었고, 1895년 전국이 36군으로 개편될 때 ‘대구부 밀양군’(시 지역은 부내면)으로 되었다.
26) 두 도성은 1889년 8월 28일 체류한 청도와 29일 체류한 밀양을 말한다. 아펜젤러는 당시 지명을 ‘미량’으로 표기했다.
27) 조선시대 신경준의 『도로고』에 보면 당시 경성~부산진 간의 대로는 ‘경성동남지동래로’라 불렸으며 거리는 937리였다. 또한 『대동지지』에서는 ‘동남지동래4대로’라 불렸으며 경성~용인~달천진~문경~대구~동래 구간 940리 길의 대로(大路)가 있었다.
28) 헌트(Jonathan. H. Hunt)는 1887년 4월 13일~5월 12일 아펜젤러와 함께 평안도지방(송도, 평양)을 함께 여행한 막역한 지인이었다. 부산해관(현, 세관)이 문을 연 것은 1883년 11월 3일이다. 1905년 을사늑약 때까지 부산세관장은 청나라의 압력으로 영국, 프랑스 등 유럽 사람들이 맡았다. 제3대 부산세관장이었던 영국인 헌트는 1888년에 부임해 10년간 근무했다.
29) 아펜젤러 일기 원문에는 이렇게 단어 아래 밑줄을 쳐서 그의 부산 선교부 개설에 대한 의욕을 강조했다.
30) 데니(Owen Nickerson Denny·1838~1900)는 오리건주 판사 출신으로 1880년 상하이주재 미 총영사를 역임했다. 1886년에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임명받아 활동하며 청의 정책을 비판하다가 1890년 외교 고문직을 박탈당해 귀국했다. 아펜젤러는 1886년 4월 9일 그의 노트에서 “데니 판사는 공식적으로 국왕 폐하의 외교 고문 및 내무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라고 썼다.
31) 1895년 이전 경상도의 행정구역은 1부, 1대도호부, 3목, 7도호부, 14군, 40현이었다.

리진만 선교사

※ 위 일기를 판독해 영문 타자한 Betty Kim과 번역 감수를 해주신 강원대학교 영문과 신성균 박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번역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