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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본문
누가복음 10장 38~42절
서론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 선택
우리 인생은 수많은 선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합니다. 무엇을 먹을지, 누구를 만날지, 어떤 일에 집중할지, 어떤 말에 반응할지…. 모두 작아 보이지만, 그 선택들의 합이 결국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특별히 신앙의 여정에서는 더 큰 선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것인가, 자신의 이해와 계획을 따를 것인가? 예배를 우선할 것인가, 일상의 일들을 우선할 것인가?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세상의 소리에 묻혀 살아갈 것인가?
오늘 본문에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같은 집, 같은 예수님을 모신 자리에서,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리아의 선택을 이렇게 평가하십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것은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눅 10:42) 이 말씀은 단순히 ‘잘했다’는 칭찬에 그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묻고 계십니다. “너는 지금 어떤 편을 택하고 있느냐?” 그 질문 앞에 우리는 다시 서야 합니다.
본론 1
마르다의 환대 – 신앙의 출발은 열림이다
본문 38절은 마르다의 행동으로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여기서 ‘영접하다’는 단어는 단순히 손님을 맞이한 것 이상의 뜻을 가지며 적극적인 환대, 기꺼이 삶을 열어드리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이는 단지 예의를 갖춘 차원의 행위가 아니라, 내 삶의 영역을 열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신앙적 고백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문화에서 여성의 이름이 주체적으로 언급되는 일은 드물지만, 누가는 분명히 기록합니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마르다는 단순히 가사를 잘하는 여인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공간을 연 것이고, 가정의 책임자로서 주님을 삶에 초대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어디까지 초대했는가?”
그분을 나의 ‘집’까지, 즉 내 삶과 감정과 사고의 중심까지 모셔드렸는가? 아니면 단지 문 앞에 세워두고 있는가?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영접은 시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집 안에 모신 후, 그분을 내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삼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본론 2
마리아의 선택 – 말씀 앞에 머무는 삶
39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매우 조용하지만, 성경 전체에서 가장 강력한 ‘제자도의 그림’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는다’는 표현은 단순히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니라, 유대 문화 속에서는 제자가 스승 앞에 앉는 고백의 행위입니다. 사도행전 22장 3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말리엘의 발치에서 율법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그와 같은 자세로, 전적인 순종과 배움의 자세로 주님 앞에 머무른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공적으로 가르침을 받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고, 마리아의 선택을 받아주시고 존중하십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복음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로고스’로 받아들였습니다. 로고스는 단지 정보가 아니라, 존재를 깨우는 진리이며, 생명을 주는 계시입니다. 그녀는 그 말씀 앞에서 멈추었고, 그 말씀을 삶의 가장 중심에 두었습니다. 신명기 8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마리아의 모습은 단지 듣는 자가 아니라, 말씀과 함께 거하려는 자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말씀 앞에 멈추고 있습니까? 그분의 음성 앞에 앉아, 진정으로 듣고 있습니까?
본론 3
분주한 마르다 – 경건한 의도, 그러나 중심을 잃다
40절에서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는 말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마르다의 섬김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잘 대접하고 싶었고, 유대 전통에서는 손님 접대가 신앙 행위의 중요한 일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좋은 의도가 마음을 지배하면서 중심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그녀는 일을 하다 지쳤고, 급기야 동생 마리아를 향해 불만을 표출하며 예수님께 항의합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말 속에는 비교, 정죄, 억울함, 인정받고 싶은 마음까지 섞여 있습니다. 섬김이 의로 바뀌고, 봉사가 자아가 되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신앙의 위기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호하지만, 정중합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문제는 ‘일’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마음이 일에 지배당했을 때, 우리는 주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신앙인의 모습도 비슷합니다. 사역은 넘치지만 기도가 사라지고, 예배는 있지만 회개는 없습니다. 우리는 바쁨을 영성이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성은 “주님 앞에 머무는 시간”에서 시작됩니다.
본론 4
마리아의 선택 – 영원한 분깃, 빼앗기지 않는 은혜
예수님은 마리아를 향해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것은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눅 10:42) ‘좋은 편’이라는 표현은 단지 좋은 선택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최우선적인 몫’을 뜻합니다. 시편 16편 5절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이 ‘좋은 편’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말씀 앞에 앉은 자, 예수님과 함께 머문 자에게 주어지는 분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확증하십니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본론 5
오늘 우리에게 묻는 경고 – “너는 어떤 편을 택했느냐?”
요한계시록 3장 17절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전혀 다릅니다. “네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이 구절은 신앙인의 ‘자기 진단’과 ‘하나님의 진단’ 사이의 간극을 보여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유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면이 무너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지쳐 있었고, 거룩한 감각은 무뎌졌으며, 형식과 외형은 갖추었지만 본질은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영적 자기기만의 전형입니다.
이 다섯 가지 진단 - 곤고함, 가련함, 가난함, 눈 멂, 벌거벗음 - 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오늘 우리 신앙의 실체를 낱낱이 드러냅니다.
1) “곤고하다”는 말은 외형은 멀쩡하지만 내면은 눌리고 지쳐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기도도, 예배도, 섬김도 있지만, 그 중심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지치고 상한 마음을 회복할 시간 없이 그냥 버티기만 하는 신앙, 주님 앞에서는 무너질 줄 모르고 사람들 앞에서는 '은혜롭다'는 말로 포장된 상태입니다.
2) “가련하다”는 말은 긍휼을 받아야 할 자인데, 본인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오히려 타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자기의에 빠져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불쌍한데, 스스로는 강하다고 여기는 영적 착시입니다.
3) “가난하다”는 것은 완전한 무능력, 즉 전적인 의존이 필요한 상태를 말합니다. 말씀을 읽어도 살아있는 음성으로 들리지 않고, 기도를 드려도 형식에 불과하며, 사역을 해도 주님과의 교제가 없습니다. 영적 파산 상태입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이 말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은, 이런 무너짐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4) “눈이 멀었다”는 것은 분별력을 잃은 상태입니다. 세속과 복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진리를 왜곡된 기준으로 해석합니다. 외형만 보고 하나님의 뜻을 말하고, 유행하는 콘텐츠나 분위기를 따라 신앙을 판단하며, 실제로는 성령의 조명 없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5) “벌거벗었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자신들의 수치를 처음 자각했듯이, 오늘 우리의 신앙도 성령의 은혜 없이 그대로 드러날 때 부끄러움뿐입니다. 종교적 포장은 있지만, 진정한 회개도 없고 거룩의 열매도 없습니다.
이 말씀은 단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경고가 아닙니다. 오늘의 교회, 그리고 오늘의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심령 깊은 외침입니다.
핵심 메시지
지금 우리의 신앙은 어떤 상태입니까?
예배는 드리고 있지만 그 안에 눈물이 사라진 지 오래고, 기도는 하고 있지만 더 이상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지 않으며, 봉사는 하고 있지만 사역의 분주함이 오히려 주님과의 거리를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부자다’는 착각 속에, 우리는 말씀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 없이도 괜찮은 듯 살아가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어느 순간 ‘주님 없이도 신앙생활이 굴러간다’고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치명적인 영적 병든 상태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마르다의 자리에 서 있는가, 아니면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치에 멈춰 서고 있는가? 분주함이 경건을 대신하고, 바쁨이 헌신처럼 여겨지는 시대 속에서,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적용
“너는 지금 어떤 편을 택했느냐?”, “너는 지금 무엇 앞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하루의 스케줄이 아닌, 삶의 중심을 향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멈추지 않는 자는, 결국 그 분깃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에 반응하여 다시 발치에 앉는 자는, 결코 그 자리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친히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그것은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결론
주님의 발치에서 다시 시작하라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그 한 가지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빼앗기지 않을 것이며, 그 분깃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그 자리를 선택해야 합니다. 일과 사역이 아닌, 주님의 임재 앞에 멈추는 자리를 분주함이 아닌, 경청과 사랑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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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오늘도 제 마음은 분주하고 생각은 산만하지만, 다시 주님의 발치로 나아갑니다. 주님, 저의 영혼이 마르다처럼 일에 치우치지 않게 하시고, 마리아처럼 말씀 앞에 머무는 은혜를 주옵소서. 분깃이 되시는 주님, 제가 그 좋은 편을 잊지 않게 하시고, 영원히 빼앗기지 않을 생명의 자리를 선택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