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방법

초등학교 때 2천 권, 중학교 때 3천 권, 그리고 고등학교 때 3천 권은 저에게 예행연습처럼 보였습니다. 번역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고급스러운 양질의 종이에 전문 삽화가가 그린 듯한 대부분 미국 책들은 60년대와 70년대에 보았던 대한민국의 허접한(?) 책의 품질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문제는 책의 내용이었습니다. 어떤 단어는 한국어로 번역되는 순간 그 의미가 다른 의미로 느껴져 있는 그대로 영어로 읽는 것이 얼마나 많던지요? 모르는 단어를 위해 웹스터나 콜린스 사전을 찾으면 나오지 않던 단어도 많았고, 신간일수록 신조어가 많았습니다. 인간의 언어의 문법 체계와 단어, 관용구의 한계에 부딪힌 저는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솔로몬이 천 권의 책을 저술했다고 하는데 ‘주님 제게도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주세요! 그리고 어떻게 책을 읽으면 좋을까요?’라고 어린아이처럼 기도했습니다. 그때 주신 것은 네 가지 독서법입니다. 물론 이것이 학문화되고 제도화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는 지금도 책을 보면 이렇게 읽고자 합니다. 저는 깊이가 있는 책을 먼저 고르고, 같은 종류의 책이라 해도 기도 가운데 가장 가치가 있어 보이는 책을 골라서 그 책을 꼭 네 번씩 읽습니다. 당시에 사용했던 저의 독서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완독, 선독, 정독에 이어 마지막 숙독을 할 때는 그 책의 모든 언어가 살아 움직이고 생동하는 기쁨을 맛보며 읽을 수 있다.
▲완독, 선독, 정독에 이어 마지막 숙독을 할 때는 그 책의 모든 언어가 살아 움직이고 생동하는 기쁨을 맛보며 읽을 수 있다. ⓒunsplash
1. 완독(完讀): 서양에서는 이러한 독서를 대화 읽기(Dialogic reading)라고 부릅니다. 책을 읽다 보면 때론 문장마다 어려운 어휘나 문맥, 그리고 매우 전문적인 용어들이 나옵니다. 첫 장부터, 때로는 중간에 이러한 부분들을 만나면 전체 책을 다 읽지 못하고 지체되거나 또는 완독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기도 가운데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 해도 책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간혹 어려운 부분이 있어도 우선적으로 전체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 더 집중하여 다 읽어 나갔습니다.

2. 선독(善讀): 서양에서는 스키밍(skimming)이라고 해서 ‘흩어읽기’라고 합니다. 정확하게 선독과 동일한 의미는 아니지만 상통하기는 합니다. 제가 읽었던 선독은 첫 번째 읽었던 완독, 즉 전체의 의미를 파악한 이후에 두 번째 읽을 때에는 전체에서 빠트린 것은 없는지, 그리고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집중적으로 읽고 분석하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첫 번째와 두 번째 읽은 책이 서로 보완관계에 이르게 됩니다.

3. 정독(精讀): 서양에서는 정독을 ‘thorough reading’이라고도 하며, 분석적 독서(Analytic reading)라고도 합니다. 저에게는 적어도 첫 번째와 두 번째 읽었던 완독과 선독 독서법은 이 세 번째 단계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많은 사람이 어려운 책을 읽으면 정독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시작부터 정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첫 장부터 정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헤겔의 법철학, 정신현상학을 처음부터 정독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헤겔의 법철학은 이 책이 쓰이던 독일의 정치적, 철학적 배경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아직 근대국가로 출범조차 할 수 없는 봉건적 체재에 있던 독일이 지금의 폴란드와 덴마크, 발트 3국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프로이센가 태동하던 시기에 구심점이 없던 독일 국민에게 준 철학적, 정치적 통찰에서 나온 책입니다.

정독은 완독과 선독과 같은 두 번에 걸친 독서를 마친 다음에 주는 선물과도 같습니다. 저는 정독하는 단계에 이르면 그 책의 각 문장이 살아서 움직이고, 저자의 심리적 상태와 목적, 그가 구상하는 아이디어까지 파악하는 즐거움을 선사 받습니다. 왜, 어떤 목적에서 이 책을 썼는지를 파악할 때의 기쁨은 이러한 기쁨을 아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정독에 이를 때에 사고의 폭이 넓어지고, 연관 학문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역사적 배경과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는 지적 호기심이 급증했습니다. 그래서 한 분야를 읽으며 쉬지 않고 또 다른 분야를, 그리고 또 다른 분야를 읽었습니다. 어느 날 도서관의 난로가 북풍 마파람에 꺼져 동상이 걸릴 듯한 손으로 호호 하며 읽다가, ‘겨울이 왔구나’하고 느낄 정도로 계절을 잊고 책에 빠진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책을 읽으니 즐겁고,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영어로 읽으니 번역하는 오류도 잡아 주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들이 기초체력이 되어 학문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습니다.

4. 숙독(熟讀): 숙독은 익숙하게 잘 읽는 것을 말합니다. 서양에서는 깊이 읽는다고 해서 ‘딥러닝(deep reading)’이라고 합니다. 인공지능의 ‘딥러닝(deep learning)’은 ‘딥리딩(deep reading)’에서 왔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정독은 본 게임이라면 숙독은 완결편입니다. 그동안 이 책을 읽으면서 빠트린 것은 없는지,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내가 미처 잘 못 이해한 것은 없는지를 돌아보면서 읽어 갑니다. 완독을 할 때에는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읽어서 군기가 바짝 든 초기 상태입니다. 어떤 책이 어떤 성격의 책인지를 모르고 읽기에, 우선 전체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선독을 할 때에는 휴전선 보초를 선 초병처럼 어디에서 적군이 나타날지 눈을 부릅뜨고 바라보면서 읽습니다. 즉 세밀한 부분, 작은 부분이라도 빠트려서는 안 되는 곳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눈으로 보고 빠진 부분을 읽어 나갈 때 균형 잡힌 시각을 갖게 됩니다. 그다음 세 번째로 정독을 할 때는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하다”는 성취감과 만족감, 그리고 때로는 포만감을 느끼며 읽습니다. 정독은 완성품을 완성품답게 읽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숙독을 할 때는 종갓집 씨간장의 깊은 맛을 음미하듯 그 책의 모든 언어가 살아 움직이고 생동하는 기쁨을 맛보며 읽습니다. 정독을 할 때에는 남의 책을 읽지만 숙독을 할 때는 그 책이 이미 나의 몸의 일부가 되어 버립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스쳐 지나갈 수 없듯이 적어도 저에게 책방은 유일한 안식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헌책방에서, 때로는 서점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을 발견하게 되면 출판사 외판원을 하거나 아니면 아르바이트를 해서 얻은 수입으로 원하는 그 책을 손에 넣어야 했습니다. 청계천 헌책방들을 탐방할 때마다 제 양손에서 책들이 가득했고, 제가 대학을 졸업할 당시의 집은 책으로 도배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6년이 넘는 시간 목회를 하며 여러 번 이사를 했습니다. 그 가난한 초보 목회자가 이삿짐은 별로 없는데 책은 많아서 운반하는 트럭 두 대에 실어도 부족했습니다. 웬만한 집이 아니면 제가 가지고 있는 엄청난 책을 들여놓을 수도 없었습니다.

책을 떠난 필리핀 선교사역, 그리고 다시 책을 찾은 영국

영국 버밍엄대학교의 도서관 전경
▲영국 버밍엄대학교의 도서관 전경 ⓒflickr
그토록 책을 좋아하던 제가 필리핀 선교사로 가게 된 것입니다. 책을 좋아할 뿐 아니라 책 없이는 저의 존재를 생각할 수 없었던 제가 필리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책이 없이도 가능한 삶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혼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신 일입니다. 종일토록 전도하고, 목회자들을 훈련하고, 목양하는 일이 이토록 고귀한 일임을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 제가 필리핀 선교 사역 10년을 마치고 영국 버밍엄대학교에 박사학위를 하러 갔습니다. 펜을 놓은 지도 16년, 그리고 목회와 선교 사역을 한 지 16년이 되어서 학문 세계는 별세계처럼 느껴질 법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반전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제가 읽었던 책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전혀 제가 접한 적이 없는 영역이 있었습니다. 이슬람, 유대교(Judaism),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 세속화(Secularization), 부흥과 대각성운동 등은 거의 잘 모르는 분야였습니다. 유럽 최초로 이슬람을 연구하고 새로운 학문으로 도입한 버밍엄대학교에서 코란을 통째로 암송하는 사람들, 그것도 아랍어로 코란을 암송하는 사람들과 이슬람을 같이 공부하는 것 자체가 저와 체급이 맞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랍어를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 및 헬라어를 공부했다고 하지만 유치원 수준인 제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하고 그 어렵다고 하는 고전 히브리어를 이미 오랫동안 연구해 온 사람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니 제가 읽었던 책을 기초로 한 유럽 문명사는 개괄적인 것이었고, 유럽 각 국가와 지역에 따라 거대한 나무에 있는 수많은 잔가지와 같이 그 분야별로 전문가 집단들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유럽의 문명을 기독교 문명이라고 말했는데, 기독교가 빠지게 된 유럽을 파악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몇 줄도 안 되는 신문 기사나 단편적인 이해로 유럽 기독교 쇠퇴를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20여 년 전 제가 영국에 가보니 저는 어린아이보다 못한 상태로 이 분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저 자신이 세상에서 먼지보다 작게 느껴진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매일 전도하고, 지도자 훈련을 하고 목회하던 필리핀이 그리웠습니다.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16년의 학문적 공백을 빌미로 ‘이 과정을 중단하면 어떨까?’라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그냥 제가 하는 박사과정(Ph.D)만 하고, 이슬람, 세속화, 유대교, 후기 근대주의, 부흥과 대각성운동 등은 아예 거들떠도 안보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학문들은 과목만 해도 10학기 또는 40학기 이상 필요했습니다. 거대한 대학 전체의 커리큘럼을 분석하고 제가 참여할 수 있는 과목들을 추렴하니 하루에 16시간 이상을 쏟아야 했습니다. 숙소에 와서도 필요한 필독 도서(required reading)를 읽고, 또한 학술 발제 준비를 하면 새벽 네 시를 넘기기가 일쑤였습니다. 백지에서 시작했지만, 백지에 그림을 그리듯 알아가는 과정이 저를 더 채찍질하였습니다. 영국에 있는 동안에 매일 평균 2시간에서 2시간 반 동안 수면을 취했습니다. 한 번은 3시간을 잔 적이 있는데, 정말 9시간, 10시간 자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대학교 때 접했던 미국 책들과 다르게 학문의 뿌리에 해당하는 유럽의 책들, 특히 영국의 도서관은 그 깊이와 넓이, 유관 분야가 남다름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미국이 강대국이라고 해도 뿌리는 아니고, 가지에 해당하며 학문의 깊이가 일천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 보낸 18개월의 프로그램에서는 미국사, 교회사, 미국 문명사를 연구했습니다. 이때 역시 유럽에서 공부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지금 초강대국인 미국의 배경에는 아이비리그 중에서도 하버드와 같은 대학의 학문적 역량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학문의 뿌리는 유럽이기에, 유럽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슬람을 이슬람 문명권으로 볼 때 전혀 다른 개체로서의 연구가 필수 불가결합니다. 기독교 문명의 기초(Foundation)에 해당하는 유대교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깊고 놀라운 영감과 성경의 이해를 돕습니다. <계속>

김종필 목사
▲김종필 목사
김종필 목사
미국 파토스 재단 대표
필리핀 한 알의 밀알교회 개척 및 위임 목사
미국 보스턴 소재 임마누엘 가스펠 센터 바이탈리티 소장 역임
미국 시티 임팩트 라운드테이블(City Impact Roundtable) 집행위원 역임
필리핀 그레인 오브 휘트(Grain of Wheat) 대학·대학원 설립자 및 초대 총장
영국 버밍엄 대학 철학박사(Ph.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