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함께 배우고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지향한다.
데오 순더마이어(Theo Sundermeier)는 선교사역을 할 때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고 다른 한쪽이 도움을 받는 ‘타자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콘비벤츠(Konvivenz)란 이름을 빌려 서로 돕고, 서로 배우고, 서로 나누는 ‘배움의 공동체’, ‘나눔의 공동체’, ‘잔치의 공동체’의 교회를 강조하였다.
우리 교회는 남한 성도가 일방적으로 탈북 성도를 돕거나, 또 탈북 성도가 남한 성도에게 도와 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서로가 작은 교회(셀모임)를 통하여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며 서로 모르는 것을 배우고 함께 기도한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서로의 필요를 알게 되면 조용히 돕는다. 도울 때도 선생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섬긴다. 한 집사님은 변호사이며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지만, 정말 겸손하게 자기 구역 식구들을 잘 섬겨 감동을 준다. 탈북 성도들도 남한 성도들을 집으로 초청하기도 하며 어린아이들을 서로 돌본다. 우리 교회는 남북한 성도가 따로 없고 모두가 물댄동산교회 교인만 있다.
7. 주체사상도 복음으로 해결된다.
북한 정권은 주체사상으로 북한 주민들이 다른 사상을 갖지 못하도록 한다. 말이 주체사상이지 김일성 3대 세습을 유지하기 위해 내세운 세뇌 교육에 지나지 않는다. 탈북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어려움이 닥칠 때 가끔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라고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서 부활 복음으로 양육하고 난 다음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도리어 이들은 북한에서 학습 받는 주체사상이 허구라는 것을 알고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여 남한 성도들보다 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 고린도후서 10장 4~5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라는 말씀처럼 복음은 절대 능력을 가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형성된 모든 가치관을 무너뜨리므로 주체사상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8. 구역모임을 통하여 소통을 이루어 간다.
우리 교회는 코로나 이전에 작교(작은교회. 셀모임)가 활발하게 모임을 가졌다. 교회에서도 모이지만, 집에서 모이기도 하고 야외로 많이 데리고 갔다. 코로나가 심하지 않을 때도 계속해서 양평, 강화도, 서울 시내에 집을 얻어 식사를 같이하고 밤새 교제하면 가까워진다. 한번은 젊은 부부들을 데리고 강화도에 가서 고기를 구워 먹는데, 한 탈북 성도가 “목사님, 한잔하면 안 되나요?”해서 내가 “안 되지요”라고 했더니, 이 형제가 “다른 목사님은 술 마시던데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옆에 있는 여집사님이 “그 사람 가짜 목사야”라고 말해 모두 웃었다. 경치 좋은 곳에 가서 함께 식사하고 운동하고 사진 찍고, 차 마시면서 살아온 이야기도 듣고 함께 기도하고 하면 가까워진다.
Ⅳ. 맺음말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남북은 분단 이후 많은 부분이 이질화되었기 때문에 북한에서 온 탈북민들과의 소통이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북한 사역을 하는 많은 목회자가 탈북민 사역이 힘들다고 하는 것이다. 필자도 이 사역을 하면서 그만두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네가 내 백성을 거두어주어서 고맙다’, ‘너도 가려고 하느냐?’는 말씀을 듣고 약 30년 가까이 이 사역을 해왔다.
그런데 필자가 탈북민 사역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 것은 부활 복음을 접하면서부터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셨다(마 12:39). 즉 예수님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사도들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았으나, 부활하신 것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그래서 부활은 기독교의 심장이다.
우리 교회는 부활 복음으로 내가 주인 되어 살았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삶을 강조한다. 이는 곧 예수님의 말씀을 내 삶으로 담아내라는 것이다. 탈북민 사역이 힘든 것은 내가 주인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으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처럼, 나는 이미 죽고, 이제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교회 내 남북한 성도의 소통 문제도 내 힘이 아니라 내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인내하며 그분의 사랑으로 그들을 품으므로 해결될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절대 능력을 가지기 때문이다. 아멘! <끝>
조요셉 물댄동산교회 목사